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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 손기남[편집]

손기남(孫起南, 1539년~1606년)은 조선 중기의 선비이자 충신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문선(文善), 호는 돈암(遯巖)이다. 고려 건국공신 손긍훈(孫兢訓)의 후손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나 강토가 왜구들의 만행으로 짓밟힐 때 선비로서 성현의 혼령이 왜구의 불길에 타는 것을 개탄하여 목숨을 걸고 경북 의흥향교의 오성위판과 경서를 선암산 바위굴에 옮겨 보존하여 숭유를 국치로 했던 당시 시대정신과 절개를 지켜낸 인물. 왜란이 끝난후 다른 지역 향교의 재건시 표본이 됨

연보[편집]

•1539년[편집]

경북 군위군 의흥현 금양에서 출생

•1592년[편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향교의 오성위판과 경서를 인근 선암산 바위굴에 안치하여 보존함으로서 왜란후 영남지역 향교 재건의 표본이 됨은 물론 선비로서의 절개를 지켜냄

•1597년[편집]

난리가 끝나자 산아래 용연언덕에 초막을 짓고 위판을 안치한 후 춘추향사를 두해반이나 지내는 예의를 다함

•1597년[편집]

향년 68세로 일기로 사망

•1607년[편집]

의흥현에서 공의 열의를 조정에 품함에 따라 토지 2결과 벼슬이 내려짐

•1699년[편집]

공의 사당을 세우라는 조정의 명이 내렸으나 이루지 못함

•1718년[편집]

숙종 44년 의흥현감 조하성에 의해 향교의 문밖에 모성효의비 건립

•1775년[편집]

북학파의 비조인 성균관 대사성 서명응이 묘갈명을 찬함

•19세기 후반[편집]

돈암선생실기책판 간행 - 후손 손만진등이 기존의 것을 보완하여 박재운의 편집을 거쳐 발행

시호[편집]

통정대부 대사성 재감 첨정

유적[편집]

모성효의비[편집]

1718년 의흥현감 조하성이 의흥향교 입구에 건립한 비각. 성인을 숭모하고 의리를 본받는다는 뜻. 주요내용은 '몸소 신위를 받들어 두번이나 병화를 피하여 깊은 산골에 모셨다가 마침내 옛 향교로 돌렸네. 십실에 충성하니 유궁에 의리가 현저하도다. 천추에 깎여지지 않는 흰 돌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화계서원[편집]

돈암 손기남을 모시기 위해 1699년(숙종25년) 조정의 명에 의해 의흥면 금양리에 건립된 사당으로 화계사라고도 부른다. 1726년 박현보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터만 남았다.

모성당[편집]

1897년 의흥군수 신태철이 유서깊은 서원인 화계서원이 빈터로 변해 춘추향사를 지내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새로 건립한 사당

숭덕사[편집]

손기남의 불천지위 위패를 있는 사당으로 모성당 바로 옆에 있음

성재암[편집]

손기남이 1592년 4월 21일부터 향교 대성전에 있던 오성위판과 경서를 안치하고 8년동안 춘추향사를 지냈던 암굴로 경북 군위군 의흥면 선암산 해발 700미터에 위치

손정(우물)[편집]

경북 군위군 의흥면 지호동에 있으며 선암산에 안치한 오성위판의 매월 삭망때 사용하던 우물

용연정[편집]

왜란이 끝났으나 옛 향교가 불타 없어짐에 따라 2년반동안 오성위패를 안치하고 춘추향사를 행하였던 초막으로 손씨향교라고도 함

유허비각[편집]

1915년 9대손 손치붕등 후손들이 손기남의 효의정신을 기리기위해 금양마을에 세운 비각

유물[편집]

돈암손선생 실기목판[편집]

돈암 손기남의 일대기를 기록한 목판으로 구체적인 간행시기는 알수 없으나 후손 손만진등이 당시의 사료를 정리하고 보완하여 박재운의 편집을 거쳐 19세기 후반경 간행된 것으로 추정. 현재 남아있는 것은 총 23장

한국의 유교장서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편집]

이중 21장이 2015년 10월 한국에서 12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포함되어 현재 경북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중 나머지 2장은 경북 군위군 숭유관에 진열보관중관

돈암집[편집]

1859년 박문현이 저술한 사료 모음집. 중앙관청인 예조와 관찰사, 의흥현감의 공문에서부터 지역 향교간 통문까지 다양한 문서와 사료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돈암 손기남이 행한 공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객관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주요 자료목록으로는 예조등급관문(조정의 6조중의 하나인 예조로부터 발급받은 문서), 영문관문(도 관찰사가 하급관청에 보낸 공문), 및 관문후록(공문의 첨부물), 태학통문(성균관의 통지문), 사림정장(지역 유림들이 고을수령에게 낸 소장), 관제(사림정장에 대한 고을수령의 회신), 정영장(도 관찰사에 직접 올린 소장), 영제(정영장에 대한 관찰사의 답신), 본관보장(고을수령이 상관에게 보고한 문서, 향장(유생들의 글), 본손정장(손씨 문중에서 고을수령에 올린 소장), 통문(향교단위에서 주고받는 문서형식의 서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