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윤송정/연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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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원- 나의 고모와 ‘개화 신여성의 선구자’

람휘(覽輝)윤정원(尹貞媛) 고모님을 그리며,

조선말기 이 나라 대한제국이 사라져가는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중국으로 독립운동, 망명, 현재까지 행방불명, 작고(?) 하신 그리운 윤정원(尹貞媛) 고모님을 되새기며 신여성으로서 대한제국의 여성을 교육, 계몽 하려는 근대여성의 개척사를 알아 보고자 한다.

내 고모님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람휘(覽輝). 이름은 정원(貞媛), 서울 창신동 출신으로 (1883.~ ?) 조선 말기의 독립운동가.여성교육자 이시며 부군은 당시에 지식인으로 계몽가,교육자인 최석하(崔錫夏) -(註 參考)로 슬하에 1남1녀를 두셨다. 애국지사이시며 독립운동가,정치가이신 부친 운정(雲庭) 윤효정(尹孝定)의 5남1녀로 태어난 외동딸 정원(貞媛)은 한국의 신여성으로 일본 동경음대와 메이지여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하고 또 유럽 벨기에로 유학한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다. 이후 관립 한성고녀(현 경기여고)에서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왕실 황후의 가정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일 합방으로 일제에 의해 강점되어 모든걸 내려놓고 1910년 중국 북경으로 가족과 함께 망명을 하여 독립운동과 교육에 일생을 바치시고 지내셨지만 광복이후 서울의 친족과 연락이 두절되어 아직까지 고모님 의 행적이 알길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름도 낯선 "개화여성(開化女性)" 그대여!

대궐에서 운동회를 연 한성고녀 윤정원(尹貞媛)!

윤정원(1883~?)은 탁지부(현, 재무부서)주사와 대한자강회 부회장을 지낸 부친 윤효정의 권유 로 1898년 일본 유학을 떠나 명치(明治)여학교와 동경음악대학에서 영어와 음악을 공부했다. 당시 부친이신 운정(雲庭) 윤효정(尹孝定)의 후원으로 유럽으로 가서 벨기에를 출발점으로 해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학하다가 1908년 관립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고의 모체)가 설립된 후 서주임관(4등)으로 임명,교수로 초빙되어 최초의 관보 사령의 여성교사로 봉직하였다. 1908년 4월 최초의 고등여학교인 이곳에 교수로 취임하고 7월 6일 부터 수업 연한은 본과 3년, 예과 2년이었으며 교과목은 일반 과목 외에 가사, 재봉, 수예등 여성들에게 필요한 분야를 가르쳤다. 학교가 문을 열자 100여 명이 입학하고 여학생들은 파라솔을 받치고 책보를 끼고 등교를 했으며 남학생들처럼 교련 훈련을 받았다.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교태를 부리며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추문이 퍼지고 아기를 밴 학생들이 다닌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27세가 된 당시의 노처녀(?) 윤정원은 이 학교의 교사가 되어 남녀평등을 외쳤다. 윤정원(尹貞媛)은 우리나라(대한제국) 관보의 사령에 따른 최초의 여성교사였다.

민족을 담지하고 대표하는 것은 항상 남성이었고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곧 어머니나 아내, 딸 혹은 누이로서 주변에 놓였다. 개화사상이 전파되면서 인습에 찌들어 있던 여성들에게 근대 교육의 기회와 사회에서의 활동영역이 주어지고 지위 향상이 운위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성인 민족이 외세와 식민지배라는 암흑의 현실과 대결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허용된 것이었다.

1909년 4월 28일 경희궁에서 거행된 '여성 유학생 환영회'에 700~800명의 하객이 운집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고 미국과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세 여성에게 거는 기대는 가히 대단하였다. 당시 고종황제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학생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은장을 훈장으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부인사회와 각 여학교에서 윤정원씨와 더불어 박에스터씨와 하란사씨가 외국에서 귀국하여 여자 교육에 종사함과 의료에 근무함을 감복하여 당시에 서궐(西闕: 경희궁)에서 환영회를 준비하고 세 여성을 영접하여 예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그 역사를 관하건대 조선 오백여년 부인계에서 외국에 유학하여 문명한 지식으로 여자를 교육함은 초유한 미사(美事)라 여자 학업이 종차(從此) 발달됨은 가히 장대(壯大)한 일이어라.'('황성신문' 1909.5.5.)

세 여성에게 걸었던 사회의 기대와 달리, 그들이 뜻을 펼치기에 아직 시대는 너무 암울했다. 세 사람(윤정원, 박에스터, 하란사)은 한국 여성이 활동하지 못했던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한 세대 후 등장하는 신여성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개척자인 여성이었다. 근대 학교 교육을 받고 근대 지식과 교양을 몸에 익힌 새로운 유형의 여성들이 1890년대 이후부터 사회 영역에 진출했다. 19세기 말 일본이나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고 1900년대 이후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근대 신여성의 대표로는 윤정원을 비롯하여 하란사와 박에스터, 차미리사등이 흔히 언급되며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제1세대 근대 여성으로 일컬을 수 있다.

이후 1920년대 나혜석, 김원주, 김명순, 윤심덕 등 역사로 보아 신여성으로 흔히 지칭되는 범주로 당시 신여성 개념의 본령을 이루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제2세대 근대 여성 중 민족주의/자유주의 계열의 여성 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20세기의 시대적 조류 탓이기도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빠진 그 시대의 환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의 변절에 실망하여 중국과 만주 등으로 떠났던 윤정원 등이 진정한 근대여성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에도 상당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악플, 악소문이야기가 그 당시에도 있어 시대에 상관없이 사람 사는 데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되기까지 여성으로서 근대교육을 받은 기본적인 토양은 대부분이 기독교신자의 집안이며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유한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가난한 집안에서 공부한 사람들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된 부모를 두어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신교육에 대한 열망과 여성의 권위신장을 위한 깨인 사상을 갖게 되기까지 기독교에서 받은 영향과 선교사들의 후원은 근대여성의 교육에 지대한 공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후 1910년 한성고녀가 일본의 식민지화로 전락,학교의 주도권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가 교명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어 교육의 뜻을 잃어 1년반의 교편을 내려놓고 중국 북경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고 부군 최석하도 이회영,이시영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전초지로 서간도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당시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중에 윤정원의 신세를 지지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소문이 들 정도로 음악과 외국어 교습을 하며 궁색치 않게 지냈지만 부군 최석하의 아까운 48세의 병환으로 조사(早死)하여 광복 즈음에 고국의 가족에게 서찰을 보낸후 연락이 끊겨 아직도 생사 불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한번도 뵙지는 못한 나의 고모님이신 람휘(覽輝) 윤정원(尹貞媛)이지만 그당시 신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다가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제대로 개화여성으로 날개를 펼치지 못한 것이 너무 애석하게 느껴지며 그 후손인 우리가 과연 얼마나 구한말 개화기 신여성의 포부를 알겠는가 새삼스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가 고모님의 함자에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주) 최석하(崔錫夏, 1864-1912) 호는 우양생(友洋生). 평안북도 의주 출신. 교육자이시며 법률가이다. 1898년 일본 고베(神戶)에서 보통과 수료. 1908년 메이지대학 법학과 졸업. 졸업생때 대표연설을 하였으며 일본 유학생들의 모임 태극학회를 발기하고 귀국후 독립지사들과 신진 정치가로 활약한다. 1909년 사부(師父)로 모셨던 윤효정(尹孝定)의 딸인 윤정원(尹貞媛) 과 결혼하였으나 당시 안창호를 비롯한 신민회의 간부 망명계획으로 이회영,이시영 등과 서간도로 망명,큰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망명지인 서간도 밀산 독립군 무관학교의 개교를 보지 못한채 아깝게 병사하였다. 논설로는 국가론 , 태극학보 제1호(1906); 조세론, 한국민족의 경제방책 등 이 있으며 지금도 학회에서 그의 논문은 두루 애용되기도 한다. 문헌現代漢城の風雲と名士(日韓書房, 1910; ペリカン社, 1997 復刻版), 227-231면에서는 세 번 사지(死地)에 들어간 최석하 라고 표현한다.

      • 동명이인 최석하(1866-1929)는 같은 의주 사람으로 의주관찰부 주사, 평안북도 도평의원 역임. 1916-18년 평북 지방 토지 조사위원회 위원, 1929년 중추원 참의와 경학원 강사를 지낸 친일파의 사 람이다. 친일인명 사전(3), 726-727면. ***


참고 문헌 ; 한국여성인물사전, 태극학회, 한국근현대사학회, 대한민국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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