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4권 > 2. 결택분(決擇分) ② > 73 - 82쪽
K.572(16-157), T.1605(3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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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집론 제4권
무착보살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2. 결택분(決擇分) ②
1) 제품 ②
집제(集諦)란 무엇입니까?
모 든 번뇌 및 번뇌의 증상에서 생겨나는 여러 가지 업을 총괄적으로 집제라 이름한다. 그러나 박가범(薄伽梵)의 가장 수승한 설법에 따르면 애(愛)이거나 후유애(後有愛)이거나 희탐구행애(喜貪俱行愛)이거나 피피희락애(彼彼喜樂愛)를 집제라 이름하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수승하다는 것’이란 그 변행(遍行)의 이치를 지칭한 것이다. 애착에 연유해서 여섯 가지 변행의 이치를 구비하는 까닭에 가장 뛰어나다고 하게 된다.
어떠한 것이 그 여섯 가지입니까?
첫 번째는 사변행(事遍行)이고, 두 번째는 위변행(位遍行)이고, 세 번째는 세변행(世遍行)이고, 네 번째는 계변행(界遍行)이고, 다섯 번째는 구변행(求遍行)이고, 여섯 번째는 종변행(種遍行)이다.
번뇌란 무엇입니까?
중 생수(衆生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연기(緣起)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경(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삿된 행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계(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무리 짓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끊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번뇌를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중생수(衆生數)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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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섯 가지와 열 가지를 가리킨다. 여섯 가지는 탐(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의(疑)ㆍ견(見)을 말하고, 열 가지는 앞에서의 다섯 가지와 견을 다시 다섯 가지 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으로 말한다.
어떠한 것이 모양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만약 법이 생겨나는 때 그 모양이 적정(寂靜)하지 못하다면, 이같이 생겨나는 것에 기인해서 심ㆍ신이 그 적정하지 못함을 상속하여 전향하는 것이 번뇌의 모양이다.
어떠한 것이 연기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번뇌의 수면욕(隨眠欲)을 영구히 끊지 못한 때문이고, 순번뇌법(順煩惱法)이 현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고, 바르지 못한 사유의 현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번뇌가 생겨나는 것을 연기라고 이름한다.
어떠한 것이 경계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일 체의 번뇌를 써서 그 일체 번뇌의 소연경(所緣境)이 되는 것 및 여러 가지 번뇌사(煩惱事)를 연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욕계의 번뇌 중에서 무명ㆍ견ㆍ의를 제외한 여타의 번뇌는 그 상지(上地)를 연하는 경이 되지 못하고, 상지의 여러 번뇌도 하지(下地)를 연하는 경이 되지 못하니, 이는 그 지(地)에 해당하는 욕망을 여읜 때문이다. 또 멸제와 도제를 연하는 여러 번뇌는 멸제와 도제를 직접 연하는 경이 되지 못하고, 단지 그것에 의지해서 허망하게 일어난 분별에 연유해서만 소연이 된다고 해설한다. 또 번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연무사(緣無事)와 연유사(緣有事)이다. 연무사란 견과 그 견에 상응하는 법이고, 여타의 번뇌를 연유사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상응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탐 (貪)이 진(瞋)과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진과 의(疑)의 경우도 이와 같다. 나머지는 모두 상응하는 것으로 탐과 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진이 탐ㆍ만(慢)ㆍ견(見)과 상응하지 않으면 만도 진(瞋)ㆍ의(疑)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무명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일체 번뇌에 상응하는 무명이고, 두 번째는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니, 불공무명이란 진제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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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 이 진ㆍ의와 상응하지 않고, 의는 탐ㆍ만ㆍ견과 상응하지 않으며, 분(忿) 따위의 수번뇌도 서로간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참(無慚)ㆍ무괴(無愧)는 일체의 불선품(不善品) 가운데에서 항상 서로 상응하고, 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도 일체의 염오품(染汚品) 가운데에서 항상 서로 상응한다.
어떠한 것이 차별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여 러 번뇌가 온갖 이치에 의지하여 갖가지 문(門)의 차별을 세우는 것으로, 소위 결(結)ㆍ박(縛)ㆍ수면(隨眠)ㆍ수번뇌(隨煩惱)ㆍ전(纏)ㆍ폭류(瀑流)ㆍ액(軶:멍에)ㆍ취(取)ㆍ계(繫)ㆍ개(蓋)ㆍ주(柱)ㆍ올(杌)ㆍ구 (垢)ㆍ소(燒)ㆍ해(害)ㆍ전(箭)ㆍ소유악행(所有惡行)ㆍ누(漏)ㆍ궤(궤)ㆍ열(熱)ㆍ뇌(惱)ㆍ쟁(諍)ㆍ치연(熾然)ㆍ조림(稠林)ㆍ구애 (拘礙) 등이다.
결(結)에는 몇 종류가 있습니까? 또 무엇이 결이고, 어느 처에 결이 있습니까?
결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애결(愛結)ㆍ에결(恚結)ㆍ만결(慢結)ㆍ무명결(無明結)ㆍ견결(見結)ㆍ취결(取結)ㆍ의결(疑結)ㆍ질결(嫉結)ㆍ간결(慳結)이다.
애 결이란 3계의 탐결에 계류받기 때문에 삼계를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싫어하여 떠나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해서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해서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에 결이란 유정에게 있는 고 및 순고법(順苦法)이 심법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 에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에경(恚境)의 모양에 처해서 심법이 이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해서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리세의 고를 초래해서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만결이란 일곱 가지 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만(慢)ㆍ과만(過慢)ㆍ만과만(慢過慢)ㆍ아만(我慢)ㆍ증상만(增上慢)ㆍ하열만(下劣慢:卑慢)ㆍ사만(邪慢)이다. 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과만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고 여기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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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과만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더 낫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아만이란 5취온에 처해서 아ㆍ아소의 존재를 관찰하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증상만은 법을 아주 수승하게 증득하지 못하고도 자기가 이미 법을 아주 수승하게 증득하였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하열만은 자기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사람을 자기보다 조금 못하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사만은 공덕이 없는데도 자기에게 공덕이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거만한 마음이 그 성품이다. 이처럼 만결에 계류받는 까닭에 아ㆍ아소를 깨닫지 못하고 또 깨달아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아ㆍ아소를 집착해서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견 결이란 세 가지 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살가야견(薩迦耶見)ㆍ변집견(邊執見)ㆍ사견(邪見)이다. 견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삿되게 출리(出離)하고자 하는 허망한 분별에서 허망한 것을 추구하여 마침내 집착이 왕성해진다. 삿되게 출리하려는 그 허망함에 집착해서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취 결이란 견취결(見取結)과 계금취결(戒禁取結)이다. 취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삿된 출리의 방편에 대해서 허망하게 분별 내어 집착하게 된다. 삿된 출리의 방편을 허망하게 집착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의결이란 진제에 대해서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킨다. 의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불ㆍ법ㆍ승의 삼보에 대한 의혹이 허망하게 생겨난다. 이처럼 의심 내는 까닭에 삼보의 처소에서 바른 행을 닦지 못하게 되고, 삼보의 처소에서 바른 행을 닦지 못하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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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결이란 이로움에 탐닉해서 다른 사람의 호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질투하는 것을 가리킨다. 질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자신의 이익을 아끼고 중히 여겨서 법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이로움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간 결이란 이로움에 탐닉하여 생활필수품에 대한 인색한 마음을 가리킨다. 간결에 계류되는 까닭에 저축하는 것만을 아껴서 원리법(遠離法)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저축하는 것만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불선법을 널리 행하고 갖가지 선법을 행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서 미래세의 고를 초래하여 마침내 고와 상응하게 되는 것이다.
박 (縛)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박(貪縛)ㆍ진박(瞋縛)ㆍ치박(癡縛)이다. 탐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괴고(壞苦)에 처하도록 묶어지고, 진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고고(苦苦)에 처하도록 묶어지고, 치박에 연유해서 모든 유정이 행고(行苦)에 처하도록 묶어진다. 또 탐박ㆍ진박ㆍ치박에 의지하는 까닭에 선법의 가행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를 이름하여 박이라 하는 것이다.
수 면에는 일곱 종류가 있으니, 욕애수면(欲愛隨眠)ㆍ진에수면(瞋恚隨眠)ㆍ유애수면(有愛隨眠)ㆍ만수면(慢隨眠)ㆍ무명수면(無明隨眠)ㆍ견수면(見隨眠)ㆍ의수면(疑隨眠)이 다. 욕애수면은 그 욕탐분(欲貪分)이 추중(麤重)한 것을 가리킨다. 진에수면은 그 진에품(瞋恚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만수면은 만품(慢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무명수면은 무명품(無明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견수면은 견품(見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의수면은 의품(疑品)이 추중한 것을 가리킨다. 만약 욕구를 여의지 못하면 그 욕애와 진에에 연유된 수면이 증가되고, 유구(有求)를 여의지 못하면 유애에 연유된 수면이 증가하고, 삿된 것을 여의지 못하고 범행(梵行)을 추구하면 만ㆍ무명ㆍ견ㆍ의에 연유된 수면이 증가하게 된다. 중생이 약간의 대치도(對治道)를 성취하고 교만을 부려서 성제(聖諦)에 어리석으면서도 외도(外道)나 사도(邪道)의 해탈법이나 그 해탈의 방편을 허망하게 분별해내면, 마침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인 정법과 비나야(毘奈耶) 가운데에서 머뭇거리면서 의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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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번뇌란 그 과보를 이루는 여러 가지 번뇌가 모든 수번뇌이다. 수번뇌는 번뇌는 아니지만 번뇌가 제거되고도 남아 있는 염오이기에 행온에 소속되는 모든 심소법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탐 따위의 여섯 가지 번뇌를 제외한 그 여타의 염오가 행온에 수렴된, 분(忿) 등의 여러 가지 심소법이다. 따라서 탐ㆍ진ㆍ치를 ‘수번뇌의 심소법’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번뇌로 인해서 그 시법이 따라서 고뇌하게 되는 것이다. 심법을 고뇌에 따르게 해서 그 염착을 여의지 못하게 되고 해탈하지 못하게 되고 장애를 끊지 못하게 되는 까닭에 수번뇌라고 이름하니, 이는 세존께서 “너희들이 긴긴밤을 탐ㆍ진ㆍ치에 고뇌받아 어지러웠으니, 그 마음이 항상 오염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전 (纏)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혼침ㆍ수면ㆍ도거ㆍ악작ㆍ질ㆍ간ㆍ무참ㆍ무괴이다. 누차 왕성하게 마음을 휘감는 까닭에 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지(止)를 수습하는 것에 의해서 그 버리는 모양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아울러 그것의 소의(所依)가 되는 범행 따위에 수렴되는 청정한 시라(尸羅)를 행하는 때에도 마음을 휘감게 되는 것이다.
폭 류(瀑流)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욕폭류(欲瀑流)ㆍ유폭류(有瀑流)ㆍ견폭류(見瀑流)ㆍ무명폭류(無明瀑流)이다. 그 흐르는 것이 세차게 울리는 것이 폭류의 이치이니, 잡염에 따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욕폭류는 이 같은 욕구를 훈습(薰習)하게 되고, 두 번째의 유폭류의 유구(有求)를 훈습하게 되고, 그 밖의 두 가지는 삿된 것의 훈습으로 범행을 구하는 것이니, 능의(能依)와 소의(所依)가 상응하는 도리이기 때문이다.
액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욕액(欲軶)ㆍ유액(有軶)ㆍ견액(見軶)ㆍ무명액(無明軶)이다. 그 이계(離繫)를 장애하는 것이 액의 이치이니, 청정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 순서에 따라 세 가지의 구하는 것의 훈습이 상응하여 현행(現行)하게 된다.
취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쟁근(諍根)을 집취(執取)해서 그 후유(後有)를 집취하는 것이 취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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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욕 심에 탐착하는 계(繫)와 박(縛)에 연유해서 그 염착을 탐닉하는 것으로 인을 삼는 것을 모든 속인들이 서로 다투는 경우이니, 이같이 투쟁하는 근본은 바로 첫 번째의 욕취에 해당한다. 욕심에 탐착하는 계와 박에 연유해서 그 염착을 탐닉하는 것으로 인을 삼는 것은 모든 출가인들이 서로 다투는 경우이니, 이 같은 투쟁의 근본은 바로 나중의 세 가지 취에 해당한다. 예순두 가지의 견취(見取)는 견취에 해당하는 것이고, 제각각 별도의 계율로 금하는 바가 많아서 고행하는 것이 계금취이고, 또 그러한 것에 의지하는 살가야견이 아어취(我語取)이다. 그러므로 견취와 계금취로 인해서 여러 외도의 무리들끼리 서로 논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고, 아어취로 인해서 여러 외도의 무리들끼리 서로 쟁론을 벌이지 않고 바로 정법과 논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집착이 바로 논쟁의 근본이다. 다시 능인취(能引取)가 있으니 후유(後有)의 고가 이숙되는 까닭에 취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계(繫)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탐욕신계(貪欲身繫)ㆍ진에신계(瞋恚身繫)ㆍ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ㆍ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이다. 정의(定意)를 장애하는 성품의 무리인 까닭에 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이 같은 네 가지가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인이 되는 때문이다. 재물을 탐애하는 따위가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다투는 일이나 바르지 못한 행이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행하기 힘든 것을 계율로 단속받는 고뇌도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정리(正理)와 어긋나게 경계를 추구하는 것도 인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개 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욕탐개(欲貪蓋)ㆍ진에개(瞋恚蓋)ㆍ혼침수면개(昏沈睡眠蓋)ㆍ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ㆍ의개(疑蓋)ㆍ낙출가위(樂出家位)ㆍ각사행위(覺邪行位) ㆍ지거사위(止擧捨位)의 선품을 드러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개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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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올(株)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주올(貪株)ㆍ진주올(瞋株)ㆍ치주올(癡株)이다. 이는 탐ㆍ진ㆍ치에 연유해서 예전에 익힌 것을 방편으로 삼기 때문이다. 탐 등으로 그 행을 삼기에 마음이 다스리지 못해서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어 해탈을 이루기 힘들게 된다.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이 같은 행을 끊기 힘들게 하는 까닭에 주올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구 (垢)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구(貪垢)ㆍ진구(瞋垢)ㆍ치구(癡垢)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해서 이 같은 시라(尸羅)의 학처(學處)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처소에 범행을 닦는 지혜로운 이가 함께 머무르다가 마을이나 외진 곳에서 이 같은 범죄를 목격하고서 “이 장로가 이와 같은 일을 범했고 이와 같이 행하였습니다”라고 공표되는 마을이나 외진 곳에서 법의를 부정하게 염색했거나 바느질한 일 따위를 구(垢)라 이름하는 것이다.
소해(燒害)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소해(貪燒害)ㆍ진소해(瞋燒害)ㆍ치소해(癡燒害)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생사의 소해를 받는 까닭에 소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전 (箭)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전(貪箭)ㆍ진전(瞋箭)ㆍ치전(癡箭)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유(有)에서 유가 깊이 일어나는 것을 추구해서 이를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불ㆍ법ㆍ승의 삼보와 고ㆍ집ㆍ멸ㆍ도의 4제에 늘 의혹을 내는 까닭에 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소 유(所有)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소유(貪所有)ㆍ진소유(瞋所有)ㆍ치소유(癡所有)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재물을 축적하느라 두려움이나 원한이 많아져 그 살아가는 것이 어지러운 까닭에 소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악 행(惡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탐악행(貪惡行)ㆍ진악행(瞋惡行)ㆍ치악행(癡惡行)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언제나 신ㆍ어ㆍ의의 악행을 저지르는 까닭에 악행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이 같은 탐ㆍ진ㆍ치의 문에 의지하여 한량없는 악행과 불선한 행이 널리 생겨나는 까닭에,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을 건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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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모 든 유정이 세간에서의 소유에 애착하는 것으로 인(因)을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고, 세간을 분별 내어 그 원상(怨相)으로 인을 삼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탐ㆍ진ㆍ치를 악행이라고도 이름하고 불선근이라고도 이름하는 것이다.
누(漏)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이다. 마음을 연달아 쏟아 흩트리되 끊어지지 않기에 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무엇 때문입니까?
외문(外門)에 의지하여 쏟아져 내리는 까닭에 욕루를 건립하는 것이고, 내문(內門)에서 쏟아져 내리는 까닭에 유루를 건립하는 것이고, 그 두 가지의 소의문(所依門)에 의지하여 쏟아져 내리는 까닭에 무명루를 건립하는 것이다.
궤 (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궤(貪匱)ㆍ진궤(瞋匱)ㆍ치궤(癡匱)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유(有) 및 생필품을 추구하되 만족을 모르기에 언제나 가난한 중고에 고뇌하게 되므로 궤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열 (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열(貪熱)ㆍ진열(瞋熱)ㆍ치열(癡熱)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정리에 의지하지 않고 여러 모양에 집착하거나 그 좋아하는 바에 집착하는 것이다. 모양에 집착하거나 그 좋아하는 바에 따르는 것에 연유하여 몸과 마음을 애태워서 괴롭히기에 열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쟁(諍)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쟁(貪諍)ㆍ진쟁(瞋諍)ㆍ치쟁(癡諍)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칼과 창을 쥐고서 여러 전쟁이나 온갖 싸움을 일으키기에 탐 등을 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치 연(熾然)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치연(貪熾然)ㆍ진치연(瞋熾然)ㆍ치치연(癡熾然)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비법하기에 탐욕의 거센 불길에 태워지는 것이고, 평등하지 않기에 탐욕의 거센 불길에 태워지는 것이다. 또 삿된 법의 거센 불길에도 태워지는 것이기에 치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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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림(稠林)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조림(貪稠林)ㆍ진조림(瞋稠林)ㆍ치조림(癡稠林)을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여러 생사에 근본하는 행 가운데 처해서 널리 염착을 일으켜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갖가지 신체를 감수케 하여 5취(趣)로 유전시키기에, 탐조림 등으로 해설해서 조림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구 애(拘礙)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탐구애(貪拘礙)ㆍ진구애(瞋拘礙)ㆍ치구애(癡拘礙)를 가리킨다. 탐ㆍ진ㆍ치에 의지하는 것에 연유하는 까닭이다. 신체와 재물에 연연하여 깨닫는 바 없이 그 처(處)의 번잡함을 즐기기에 약간의 선법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싫증내게 된다. 이로 인해서 모든 선법을 닦지 못하게 되기에 구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처럼 번뇌의 의문(義門)은 그 차별이 한량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사행(邪行)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탐 과 진, 두 가지의 번뇌를 가리킨다. 경계(境界)와 견(見)에 미혹해서 사행(邪行)과만(慢)이 일어나고, 유정과 견에 미혹해서 사행과 살가야견ㆍ변집견ㆍ사견이 일어나고, 소지경(所知境)에 의해서 사행과 견취ㆍ계금취가 일어나고, 여러 가지 사견에 미혹해서 사행과 의심이 일어나고, 대치(對治)에 미혹해서 사행과 무명이 일어나고, 일체(一切)에 미혹해서 사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열 가지 번뇌는 모두 고제와 집제에 미혹해서 여러 가지 사행이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바로 그 같은 인연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또 열 가지 번뇌가 모두 멸제와 도제에 미혹해서 여러 사행이 일어나는 것에 연유해서 그러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까닭이다.
어떠한 것이 계(界)에 기인하기 때문입니까?
진 (瞋)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는 3계(界)의 계(繫)에 통한다. 진은 오직 욕계의 계(繫)에 해당할 뿐이다. 또 탐의 욕계에서는 낙(樂)ㆍ희(喜)ㆍ사(捨)에 상응하는 것이니, 욕계나 초정려ㆍ제2정려의 경우도 이와 같으나, 제3정려에서는 낙(樂)과 사(捨)에만 상응하고, 그 이외에서는 오직 사에만 상응하게 된다. 진은 고(苦)ㆍ우(憂)ㆍ사(捨)와 상응하지만 욕계에서는 주로 희ㆍ사에 상응하고, 초정려와 제2정려에서는 낙ㆍ희ㆍ사에 상응하고, 제3정려에서는 낙ㆍ사와 상응하고, 그 이상에서는 오직 사에 상응할 뿐이다.
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4권 > 2. 결택분(決擇分) ② > 83 -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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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의 경우처럼 살가야견ㆍ변집ㆍ변취ㆍ계금취의 경우도 이와 같다. 사견은 욕계에서는 우ㆍ희ㆍ사에 상응하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그 감수하는 바에 따라 모두 더불어 상응하게 된다. 의는 욕계에서는 우ㆍ사에 상응하고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그 감수하는 바에 따라 모두 더불어 상응하게 된다.
무명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상응무명(相應無明)과 불공무명(不共無明)이다. 상응무명은 일체의 번뇌에 상응하는 까닭에, 이 같은 처소마다 그 감수하는 바에 모두 상응케 된다. 불공무명은 욕계에서는 우ㆍ사에 상응하고 그 이상의 계(界)에서는 그 감수하는 바에 따라 모두 상응하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번뇌는 모두 사와 상응하는 것이기에 일체의 번뇌가 중용위(中庸位:六識身)에 떨어지면 바로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탐은 욕계에서 6식신(識身)에 존재하는 것이니, 탐의 경우처럼 진ㆍ무명도 이와 같다. 탐은 색계에서는 4식신에 존재하고 무색계에서는 의식신(意識身)에 존재하게 된다. 이 같은 탐의 경우처럼 무명도 이와 같다. 만ㆍ견ㆍ의는 일체처에서의 의식신에 존재하게 된다. 탐ㆍ진ㆍ만은 욕계에서는 일부분의 사(捨)를 연하여 전향하는 것이니, 욕계의 경우처럼 색계ㆍ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그 나머지 일체 사물은 일체 사물을 두루 연하여 전향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중(衆)입니까?
두 가지 중번뇌(衆煩惱)가 있으니 첫째는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둘째는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에는 다시 네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견도의 고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두 번째는 견도의 집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세 번째는 견도의 멸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고, 네 번째는 견도의 도제에서 끊어지는 중번뇌이다. 욕계에서 고제의 인견(忍見)으로 끊어지는 것에는 모두 열 가지 번뇌가 있다. 고제의 인견에서 끊어지는 경우처럼 집제ㆍ멸제ㆍ도제에서 끊어지는 바도 이와 같다. 색계에서 고제의 인견 등의 네 가지에서 끊어지는 것에는 각각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진은 여기서 제외된다. 색계의 경우처럼 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견도에서 끊어지는 중번뇌는 총괄하여 백열두 가지의 번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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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계의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에는 여섯 가지 번뇌가 있으니, 구생(俱生)의 살가야견과 변집견 및 탐ㆍ진ㆍ만ㆍ무명이다. 색계의 수도에서 끊어지는 것에는 진을 제외한 다섯 가지 번뇌가 있다. 색계의 경우처럼 무색계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같이 수도에서 끊어지는 중번뇌는 총괄해서 열여섯 가지의 번뇌가 있게 된다.
어떠한 것이 끊어짐입니까?
이 같은 차별의 끊어짐은 이러한 작의단(作意斷)에 연유하기에 이로부터 끊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차별의 끊어짐’이란 변지(遍智)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원리(遠離)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또 대치(對治)의 성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지는 피인연사변지(彼因緣事遍智)ㆍ자체변지(自體遍智)ㆍ과환변지(過患遍智)를 말한다. 원리란 비록 그러한 곳에 잠시 태어났으나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대치의 성취에 기인하는 것’이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는 태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태어난 자는 끊게 되기 때문에 대치도의 성취는 이 같은 작의단에 연유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이 작의단입니까?
작의를 총연(總緣)해서 일체법이 모두 무아의 성품임을 관찰하고 번뇌를 끊게 된다. 무상행(無常行) 등의 행은 단지 무아행(無我行)을 다스려 닦으려는 까닭이다.
‘이로부터 끊게 되는 것’이란 어디서부터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과 거에 따르지도 않으니 이미 소멸했기 때문이고, 미래에 따르지도 않으니 아직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고, 현재에 따르지도 않으니 도가 갖춰지지 않은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번뇌가 추중(麤重)하는 것에 따라서 그 끊는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 끊어짐을 삼는 것이다. 어떠한 품(品)의 추중이 생겨나면 그 어떠한 품으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어떠한 품의 대치가 생겨나면 그 어떠한 품의 추중이 소멸되어 평등해진다. 그 평등한 것이 마치 세간에서 날이 밝으면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과도 같다. 이 같은 품에 연유해서 이계(離繫)하는 까닭에, 미래의 번뇌를 불생법(不生法) 가운데 머물게 하는 것을 끊어짐이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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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번뇌가 증상되어 생겨나는 여러 가지 업입니까?
사 업(思業)이나 사이업(思已業)을 총괄해서 업의 모양이라고 한다. 다시 다섯 종류의 업이 있으니, 첫 번째가 취수업(取受業)이고, 두 번째가 작용업(作用業)이고, 세 번째가 가행업(加行業)이고, 네 번째가 전변업(轉變業)이고, 다섯 번째가 증득업(證得業)이다. 지금은 이러한 이치 가운데에서 의다분별(意多分別)은 가행업에 해당한다.
어떠한 것이 사업(思業)입니까?
복업(福業)과 비복업(非福業) 그리고 부동업(不動業)이다.
어떠한 것이 사이업입니까?
신 업(身業)과 어업(語業)및의업(意業)이다. 또 이 같은 신(身)ㆍ어(語)ㆍ의(意)의 3업(業)이 선하거나 불선한 것이다. 불선(不善)이란 십불선업도(十不善業道)이니, 살생(殺生)ㆍ불여취(不與取)ㆍ욕사행(欲邪行)ㆍ허광어(虛誑語)ㆍ이간어(離間語)ㆍ추악어(麤惡語)ㆍ잡예어(雜穢語)ㆍ탐욕(貪欲)ㆍ진에(瞋恚)ㆍ사견(邪見)이다. 선(善)이란 10선업도(善業道)이니 살생을 여의는 것이고, 불여취를 여의는 것이고, 욕사행을 여의는 것이고, 허광어를 여의는 것이고, 이간어를 여의는 것이고, 추악어를 여의는 것이고, 잡예어를 여의는 것이고, 탐하지 않는 것이고, 성내지 않는 것과 정견이다.
살생 따위는 마땅히 다섯 가지로 그 모양을 분별해야 한다. 사악한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마음으로 즐기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방편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번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구경(究竟)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계경에서 “고사(故思)에서 조작되는 업이다”라는 말씀과도 같다.
무엇을 가리켜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故思造業]’이라 이름합니까?
다 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니, 다른 사람에게 권유받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근본에 집착하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전도된 분별을 내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고, 이 가운데에서의 근본에 집착하는 것도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다. 이 같이 전도된 분별을 내는 것이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기에, 짓거나 늘려 나가거나 이숙(異熟)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짓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업을 지어 현행케 하는 것이고, ‘늘려 나가는 것’이란 그 습기를 점차 늘려 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경계에서 말씀하신 결정수업(決定受業)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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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리켜 결정수업이라 이름합니까?
업 을 짓는 바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니, 이숙을 받는 것이 결정되고 그 분위(分位)가 결정된 것이다. 10불선업도의이숙과는 삼악취(三惡趣)가운데의 하품ㆍ중품ㆍ상품에 떨어져 방생(傍生)ㆍ아귀ㆍ나락가의 이숙을 받는 것이다. 그것의 등류과(等流果)는 인취(人趣) 가운데에서 제각기 그 모양을 따라 자신과 대중이 모두 쇠퇴하여 줄어듦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증상과(增上果)는 각기 그 모양에 따라 느끼는 모든 외부 사물이 쇠퇴하여 줄어드는 것으로, 그 자세한 설명은 경전에 나온 그대로이다. 10선업도의 이숙과란 인취와 천취(天趣)의 이숙을 받는 것이다. 등류과란 그 같은 처소에서 각각 그 모양에 따라 자신과 대중이 모두 흥성하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것의 증상과는 그 같은 처소에서 각각 그 모양에 따라 모든 외부 사물이 흥성함을 감지하는 것이다.
선 불선업(善不善業)은 선취(善趣)와 악취 가운데에서 그 이숙이 생겨나는 것을 감지하는 때에 존재하는 초인업(招引業)과 원만업(圓滿業)이다. 초인업은 이 같은 업에 기인해서 능히 이숙과를 감지하는 것이고, 원만업은 이 같은 업이 생겨난 것에 기인해서 애불애과(愛不愛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혹 어떤 업은 하나의 업력(業力)에 기인해서 다수의 신체를 끌어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업은 다수의 업력에 기인해서 하나의 신체를 끌어 오기도 하고, 또 어떤 업은 다수의 업력에 기인해서 다수의 신체를 끌어 오기도 하는 것이, 마치 한 유정이 다수의 업을 성취한 것과 같다.
무엇을 가리켜 이숙과를 순서대로 받는 것[次第受]이라고 합니까?
그 신체 중에서 무거운 것이 먼저 익는 것을 가리킨다. 임종하는 때에 현전하는 것이거나, 또는 예전에 자주 익힌 것이거나, 또는 처음으로 행한 것의 이숙이 먼저 익은 것이다. 계경의 말씀에 따르면 세 종류의 업이 있으니, 복업ㆍ비복업ㆍ부동업이다.
어떠한 것이 복업입니까?
욕계에 계류되는 선업이다.
어떠한 것이 비복업입니까?
불선업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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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것이 부동업입니까?
색계와 무색계에 계류되는 선업이다. 마치 계경에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복업ㆍ비복업과 부동도 이와 같다.
어째서 복과 부동의 행이 무명을 연하여 생겨난다고 하게 됩니까?
두 종류의 우매함이 있으니, 첫 번째가 이숙과에 대한 우매함이고, 두 번째가 진실한 이치에 대한 우매함이다. 이숙과에 대한 우매함에 연하는 까닭에 비복행을 발휘시키고, 진실한 이치에 대한 우매함에 연하는 까닭에 복행과 부동행을 발휘시키게 된다. 살생의 업도(業道)는 탐ㆍ진ㆍ치가 그 방편을 이루는 가운데 진에 연유해서 구경을 이루는 것이니, 불여취ㆍ욕사행ㆍ탐욕의 업도도 이와 같다. 허광어의 업도도 탐ㆍ진ㆍ치가 그 방편을 이루는 가운데 어떤 한 가지에 연유해서 구경을 이루는 것이기에, 허광어ㆍ이간어ㆍ잡애어의 업도도 이와 같다. 사견의 업도도 탐ㆍ진ㆍ치가 그 방편을 이루는 가운데 치에 연유해서 구경을 이루는 것이 마치 계경에서 “공업(共業)이 있고 불공업(不共業)이 있고 강력업(强力業)이 있고 열력업(劣力業)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공업이란 무엇입니까?
갖가지 기세간(器世間)을 갖가지로 차별시키는 업이다.
불공업이란 무엇입니까?
유 정세간(有情世間)을 갖가지로 차별시키는 업이고, 또 모든 유정을 전전시켜 증상케 하는 업이다. 이 같은 업력에 연유해서 여러 유정이 상호간에 그 구경의 모양을 의지하는 것을 증상연(增上緣)이라고 해설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서로 증상하는 세력을 가지기 때문에 공업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리하여 경전에서 “이는 유정과 그 밖의 유정이 서로 바라보는 것 등이니, 수용하지 않고 뒤바뀌지 않고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다.
강력업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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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업을 강력하다고 이름하는 것은 그 업을 대치하는 힘이 강한 것에 연유하는 때문이다. 또 고사에서 조작되는 일체의 선업도 모두 강력하다고 이름하게 된다. 이 같은 업에 의지하는 까닭에, 박가범께서도 “나의 거룩한 제자들은 한량없이 광대한 업으로써 그 마음을 어질게 훈습하기에, 여러 가지 조작되어진 유량(有量)의 업에 끌려가지도 않고, 이에 머무르지도 않고, 저들 중생의 수에 떨어지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그 대치하는 힘이 약한 보특가라의 고사에서 조작되는 갖가지 불선업이 여러 선업을 유추하게 되는 것도 모두 강력하다고 이름하고, 또 고사에서 조작되는 업이 이숙하는 과보의 그 결정을 끊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도 강력업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일체 선불선업이 이숙하는 그 과보의 결정이 성도(聖道)의 힘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것을 강력업이라 이름한다.
또 욕계에 계류되는 모든 불선업의 성품도 모두가 강력한 것이다. 또 예전에 익힌 바도 강력업이라 이름하고, 또 그 같은 강력한 지위에 의지하는 것도 강력업이라 이름한다. 또 대치가 불가능하게 조작되어진 갖가지 업을 강력업이라 이름하니, 열반법(涅槃法)이 없는 까닭이다. 또 전(田)에 연유해서 강력업이 발휘되고, 또 마음의 가행에 연유해서 강력업이 발휘되고, 또 아홉 종류의 인(因)에 의지해서 강력업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는 전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일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소의(所依)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작의(作意)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의요(意樂)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보조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수습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많은 중생이 함께 행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과 반대되는 것이 열력업(劣力業)이니, 세존께서도 어떤 때에는 “그들의 장부(丈夫)인 보특가라가 이러이러한 순소수업(順所受業)을 짓거나 늘리는 것에 따라서 이러이러한 이숙과를 받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청정한 범행을 닦을 수가 없고 또한 모든 고를 바르게 끊어서 고의 변제(邊際)를 이루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도 말씀하셨고, 또 어떤 때는 “그들의 장부인 보특가라가 이러이러한 순소수업을 짓거나 늘리는 것에 따라서 다시 이러이러한 순소수업의 이숙을 받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청정한 범행을 수습해야 할지니 또한 모든 고를 바르게 끊어서 고의 변제를 이루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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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경전의 말씀에는 어떠한 비밀스러운 뜻이 있습니까?
여 기에서 부처님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사설(邪說)을 제지하고자 함이니, 소위 낙구행업(樂俱行業)이 낙구행(樂俱行)의 이숙을 능히 감득(感得)한다는 것이고, 또 고구행업(苦俱行業)이 고구행(苦俱行)의 이숙을 능히 감득한다는 것이고, 불고불락구행업(不苦不樂俱行業)이니 다시 능히 불고불락구행의 이숙을 감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은 정설(正說)을 계시하고자 함이니, 소위 낙구행의 이숙을 능히 감득하는 낙구행업과 고구행의 이숙을 능히 감득하는 고구행업 및 불고불락구행의 이숙을 능히 감득하는 불고불락구행업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다 시 이 같은 정설을 열어 보이시려는 것이니, 낙구행업의 순락수(順樂受)란 즐거움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낙구행업의 순고수(順苦受)란 고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낙구행업의 순불고불락수(順不苦不樂受)란 불고불락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다. 또 ‘고구행업의 순락수’란 다시 즐거움의 이숙을 받는다는 것이고, ‘고구행업의 순고수’란 고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고구행업의 순고불고불락수’란 순불고불락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다. 또 ‘불고불락구행업의 순락수’란 즐거움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불고불락구행업의 순고수’란 고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고, ‘불고불락구행업의 순불고불락수’란 불고불락의 이숙을 다시 받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경전의 비밀스런 뜻이라고 이름하게 된다.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율의업(律儀業)ㆍ불율의업(不律儀業)ㆍ비불율의업(非不律儀業)이다.
율의업이란 무엇입니까?
별 해탈율의(別解脫律儀)에 수렴되는 업이고, 정려율의(靜慮律儀)에 수렴되는 업이고, 무루율의(無漏律儀)에 수렴되는 업이다. 별해탈율의에 수렴되는 업이란 바로 7중(七衆)이 수지 받는 율의이니, 필추율의(苾芻律儀)ㆍ필추니율의(苾芻尼律儀)ㆍ식차마나율의(式叉摩那律儀)ㆍ근책율의(勤策律儀)ㆍ근책녀율의(勤策女律儀)ㆍ오파색가율의(波索迦律儀)ㆍ오파사가율의(波斯迦律儀) 및 근주율의(近住律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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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출가율의(出家律儀)를 건립하게 됩니까?
수행으로 악행을 원리하고 욕행(欲行)을 원리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오파색가율의와 오파사가율의를 건립하게 됩니까?
율의를 남김없이 받아 지켜서 악행을 원리하되 욕행을 원리하지 못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어떠한 보특가라에 의지해서 근주율의를 건립하게 됩니까?
악 행을 원리하지 못하고 욕행도 원리하지 못하는 보특가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만약 오파색가의 학처(學處) 일부분만을 닦아 익히는 것만으로 성취하였다고 말하는 경우에, 오파색가율의를 그 말과 같이 성취하지 못하였으면서 성취하였다고 말하게 되면, 이를 범계(犯戒)라 하는 것이다.
선체반택가(扇半擇迦) 따위가 오파색가율의를 수지하는 것을 제지하여야 합니까?
그 가 오파색가율의를 수지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더라도 그의 오파색가의 성품은 자동적으로 제지된다. 필추ㆍ필추니 등의 2부(部)의 출가대중(出家大衆)을 가까이 모실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반택가(半擇迦)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생경반택가(生更半擇迦)ㆍ질투반택가(嫉妬半擇迦)ㆍ반월반택가(半月半擇迦)ㆍ관쇄반택가(灌灑半擇迦)ㆍ제거반택가(除去半擇迦)이다.
정 려율의에 업이 수렴된다는 것은 한번 일어나면 계율을 범하게 되는 번뇌의 종자를 꺾어 누를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욕계의 욕(欲)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하는 것이다. 초정려(初靜慮)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 같은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한다는 것이다. 제2정려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한다는 것이다. 제3정려의 욕을 여읜다는 것은 그같이 존재하는 것에서 원리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이름하여 정려율의에 수렴되는 신ㆍ어의 2업(業)이라 한다. 무루율의에 수렴되는 업은 사제(四諦)를 인견(忍見)한 이가 무루(無漏)의 작의(作意)하는 힘으로 누없이 원리하는 계율의 성품을 성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같은 것을 이름하여 무루율의에 수렴하는 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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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율의업(不律儀業)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불율의업은 그가 태어난 종성(種性)에 기인하거나, 또는 그가 종사하는 직업에 기인해서 그 기약된 바가 현행하여 그의 업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어떠한 것을 이름하여 불율의라 합니까?
이 른바 양을 잡아 생계를 잇는 일, 닭을 쳐서 생계를 잇는 일, 돼지를 길러 생계를 잇는 일, 새를 잡아 생계를 잇는 일,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일, 사슴 사냥으로 생계를 잇는 일, 토끼 덫을 놓아 생계를 잇는 일, 도둑질로 생계를 잇는 일, 망나니짓으로 생계를 잇는 일, 소를 잡아 생계를 잇는 일, 코끼리를 길들여 생계를 잇는 일, 단(壇)을 세우고 용을 부리는 주문[呪龍]을 외워 생계를 잇는 일, 감옥을 지켜서 생계를 잇는 일, 첩자 노릇으로 생계를 잇는 일 등이다.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순락수업ㆍ순고수업ㆍ순불고불락수업이다. 순락수업이란 욕계에서 제3정려까지 존재하는 선업이고, 순고수업이란 불선업을 가리킨다. 순불고불락수업이란 제3정려 이상에 존재하는 선업이다. 또 업의 차별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ㆍ순생수업(順生受業)ㆍ순후수업(順後受業)이다.
순 현법수업이란 업이 현법(現法) 가운데에서 이숙되어 성숙하는 것이니 자정(慈定)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조작되어지는 바가 감소되거나 증가되거나 반드시 현전해서 이숙을 얻게 되는 것이다. 자정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무쟁정(無諍定)에서도 일어나고 멸정(滅定)에서도 일어나고 예류과(豫流果)에서도 일어나고 아라한과에서도 일어나는 것이 이와 같다. 또 부처님께서 상수(上首)로 계신 승가 대중 가운데에서 짓는 선악도(善惡道)도 반드시 현전해서 그 이숙을 얻게 된다. 또 유여(有餘)의 맹렬한 이근(利根)이 그 의요(意樂)의 방편으로 행하는 선업과 불선업도 현전해서 그 이숙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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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생수업이란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도중에 그 이숙이 성숙되는 업으로써 5무간업(無間業)을 가리킨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선업과 불선업이 있다. 무간지옥에 태어나 그 이숙을 성숙시키는 일체에 모두 순생수업이라 이름한다. 순후수업이란 무간에 태어난 후에 그 이숙이 성숙하는 업을 바로 순후수업이라 이름한다. 또 업의 차별에는 네 종류가 있으니, 흑흑이숙업(黑黑異熟業)ㆍ백백이숙업(白白異熟業)ㆍ흑백흑백이숙업(黑白黑白異熟業)과 능히 모든 업을 소진시키는 비흑백무이숙업(非黑白無異熟業)이 있다. 흑흑이숙업이란 불선업을 가리키고, 백백이숙업이란 삼계의 선업을 가리킨다. 흑백흑백이숙업이란 욕계에 계류되는 작업(作業)이니, 혹 어떤 업을 의요케 하려는 까닭에 검다고 하고 방편에 기인해서 희다고 하거나 혹 어떤 업은 방편에 기인해서 검다고 하거나 의요케 하려는 까닭에 희다고 하는 것이다. 비흑백무이숙업이 모든 업을 능히 소멸시키는 것으로, 무간도(無間道)에서 가해(加行)하는 모든 무루업을 가리킨다. 총괄하면 모든 무루업은 모든 장애가 순종하는 바탕이 되는 성품이기에, 그 자체에 맞춰 곡(曲)ㆍ예(穢)ㆍ탁(濁)의 모든 염오업(染汚業)과 정모니(淨牟尼) 따위의 모든 청정업(淸淨業)을 건립하는 것이다. 다시 보시 따위의 온갖 청정업이 있다.
보시업(布施業)이란 무엇입니까?
인 연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등기(等起)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처소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자체에 기인하기 때문에 보시업이라 분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연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을 가리키고, 등기에 기인하기 때문이란 저것이 행(行)과 사(思)를 갖춘 것을 가리킨다. 처소(處所)란 보시되는 물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당하게 보시를 행하는 때의 신ㆍ구ㆍ의의 3행을 가리킨다.
시원만(施圓滿)이란 무엇입니까?
잦 은 보시에 기인하기 때문이고, 치우쳐서 보시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 바라는 바에 따라 만족스럽게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가 원만케 된다. 또 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하기 때문이고, 널리 청정하게 보시하기 때문이고, 지극한 마음에서 보시하기 때문이고, 되풀이해서 보시하기 때문이고, 전답과 기물을 보시하기 때문이고, 신참과 구참비구를 잘 안배해서 보시하기 때문에 그 보시가 원만하게 된다.
대승아비달마집론 > 대승아비달마집론 제4권 > 2. 결택분(決擇分) ② > 93 - 102쪽
K.572(16-157), T.1605(3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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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물의 원만함은 어떠한 것으로 인지하게 됩니까?
보 시된 재물이 거짓말이나 허위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남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진구(塵垢)를 여읜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보시한 재물을 여법하게 추렴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 보시한 재물의 원만함을 숙지해야 한다. 마치 계경에서 “시라를 성취하여 별해탈율의를 잘 방호(防護)하고 궤범(軌範)에 따라 그 행하는 바를 모두 원만케 해서, 미세한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익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시라를 성취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청정한 시라를 받아서 보호하는 것이다.
‘별해탈율의를 잘 방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출리(出離)의 시라를 잘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의궤(儀軌)에 따라 모두 원만케 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시라를 청정하게 갖추어 훼손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소소한 죄를 목격하더라도 크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용맹심을 내어 시라를 공경스럽게 익히기 때문이다.
‘모든 학처를 잘 받아 지켜서 익히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배워 익혀야 하는 시라를 배우고 익혀서 지금 이후로는 시라에 의지하는 것이다. 경전을 풀이해 보면 신근(身根) 따위를 방호한다는 이치가 드러난다.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의 방호’라고 이름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의 바른 견해에 연유해서 거두어 지키는 바이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원만한 구족’이란 무엇입니까?
끝까지 계율의 소범(所犯)을 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의 청정한 현행(現行)’이란 무엇입니까?
무회(無悔) 등에 연유해서 점차 행을 닦아 나가되 정을 얻을 때까지 의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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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업과 어업이 지극히 어질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염오의 심사(尋思)에 섞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죄가 되지 않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삿된 것을 멀리 여의어서 범행 닦기를 발원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해롭지 않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쉽게 함께 머루르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순종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열반법에 순종하는 것에 기인해서 성취하게 되는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감추거나 드러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선법은 감추고 악업은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사이좋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범행을 닦는 이들과 함께 시라로 포섭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절도 있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는 것이다.
‘신업과 어업이 공경스럽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거룩한 가르침을 공경스럽게 받들어 따르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무열(無熱)하게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고행의 치열한 고뇌와 저급한 깨우침을 멀리하기 때문이다.
‘신업과 어업이 고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재산과 직업을 포기하여 후회와 고뇌가 없는 것이다.
‘신업과 어업이 후회 없이 현행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비 록 성취가 약간 있더라도 이를 기뻐하지 않기에 그에 따른 후회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세존께서 “이와 같이 유정들은 그 자신의 업에 기인해서 업이 어긋나고 바로 인해 다투게 되고 업에 따라 생겨나고 업에 의해 출리하고 업에 기인해서 유정의 높고 낮음과 우수하고 열등함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유정이 모두 자신의 업에 기인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스스로 짓는 업에 연유해서 그 이숙과를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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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이 어긋나는 바에 따라 다투게 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업에서 얻게 된 이숙을 받는 때에 선업과 불선업이 서로 어긋나서 다투기 때문이다.
‘업을 따라 생겨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모든 유정은 무인(無因)이나 악인(惡因)을 멀리하고 오직 업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업에 의해 출리한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대치하는 업에 의지해서 업박(業縛)을 풀기 때문이다.
‘업에 기인해서 유정의 높고 낮음’이란 무엇입니까?
업에 기인하는 까닭에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서 자체적인 차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수하고 열등하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유정의 성취에는 그 공덕과 과실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유정의 업이 이숙하는 바는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다.
업의 이숙이 가사의(可思議)하다는 것이란 무엇이고, 업의 이숙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여 러 선업이 인취와 천취에서 좋게[可愛] 이숙되는 것이 가사의이다. 삼악취에 떨어지는 여러 불선업이 좋지 못한 이숙을 얻는 것이 가사의이다. 이 같은 업감(業感)에 기인하여 모든 유정과 자신을 이숙하는 등의 갖가지 차별이 불가사의이다. 또 선업과 불선업의 처차별(處差別)ㆍ사차별(事差別)ㆍ인차별(因差別)ㆍ이숙차별(異熟差別)ㆍ품류차별(品類差別) 등이 모두 불가사의이다. 또 갖가지 외사차별(外事差別)이 있으니, 이것에 능히 감득(感得)하는 것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또 말니주(末尼呪)ㆍ약초ㆍ주술이 상응하는 것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또 모든 관(觀)을 닦는 자의 위덕(威德)도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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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든 보살이 자재한 것도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른바 명(命)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마음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재물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태어남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승해(勝解)가 자재하기 때문이고, 원력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신통이 자재하기 때문이고,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고, 겁(劫)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보살이 이러한 자재한 힘에 연유하는 까닭에 그 지어지는 업의 쓰임새도 불가사의하다. 또 일체의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것과 모든 부처님께서 지으시는 사업도 그 업의 쓰임새가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같이 집제에는 총괄해서 네 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있으니, 인상(因相)ㆍ집상(集相)ㆍ생상(生相)ㆍ연상(緣相)을 가리킨다.
인상이란 무엇입니까?
남아 있는 습기를 능히 인발(引發)시키는 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인상이라 한다.
집상이란 무엇입니까?
그 유정 내에 모여든 습기를 가리키는 것이니, 그들에 있어서 유정이라는 무리로 함께 일어나는 인을 가리키는 것을 집상이라 이름한다.
생상이란 무엇입니까?
그 내신(內身)이 제각각 한량없는 품류가 차별되는 생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이름하여 생인이라 한다.
연상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유정이 제각각 버리는 인을 성취하는 것을 이름하여 연상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