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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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金尙寯, 1561년~1635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수(汝秀), 호는 휴암(休庵), 본관은 (신)안동이다. 해주목사, 죽주부사, 형조참판 등을지냈다. 아버지는 군기시정 김원효(金元孝)이고,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전주이씨)로 태종의 서자 근령군(謹寧君)의 현손 충의위 이승열(李承說)의 딸이다. 우의정 선원김상용의 종제(從弟)이며, 장단부사김상관, 좌의정 청음김상헌, 경주부윤김상복의 종형(從兄)이다. 또한 조선말기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본명:김병연)의 9대조부이다
생애 [편집]
明宗(명종)16년(1561년 5월 11일생)에 태어나 어려서는 父祖(부조)의 가르침을 받아 글 읽기를 즐기고 儉約(검약)하며 精進(정진)하였다.
22세 약관의 나이에 향시 초시(初試)와 발해시(發解試)에 제2등(第二等)으로 선발되어 천거되었으며 그해(1582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585년 모친상을 당했을때 선상(善喪)으로 상(喪)을 잘 치렀다고 칭찬을 받기도하였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더욱 힘써 책을 읽었는데, 아침부터 깊은 밤중(丙夜)에 이르도록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함께 공부하던 여러 종제(從弟)들이 공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그들도 또한 능히 책을 보지 않고서도 글을 외웠다 한다.
159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괴원(槐院:承文院: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에 선임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25)에 체찰사 심수경(沈守慶)이 호서지방(湖西地方)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건의토왜(建議討倭:倭賊을討伐)할 때에 공을 벽소(辟召)하여 종사(從事)하는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막료(幕僚)의 군중(軍中) 계획들이 공(김상준)에게서 많이 나왔으므로 심수경공이 그를 심히 중하게 여겼다.
1593년(선조26년)에는 행재소(行在所:임금이 궁을떠나 나들이하거나 전시 변란등의 사유로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에 나아가서 승정원 주서(承政院 主書)에 제수됐고, 곧 예문관 검열을 거쳐 대교로 승진했다. 1594년 예문관봉교에 승임(陞任)되었고, 자리를 옮겨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다시 예조좌랑으로 옮겨갔다. 조정에서 삼로(三路)의 어사(御使)를 파견할때, 강직하다고 이름난 사람을 추천하여 골라 보냈는데, 공도 더불어 선임되어 영동(嶺東)지방을 안찰(按察)하면서 죄악을 저지른 관리를 염탐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그 후 영광군수, 군자감정(君子監正)을 거쳐 성균관 사예(司藝)에 옮겼다가 또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으며, 호남 지방의 조발사(調發使)에 충원되어, 명나라의 수군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1596년(선조29년) 9월 영광군수 재직시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만나 왜란극복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때에는 관찰사의 종사관으로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종사관 강항(姜沆)과 함께 전라도 영광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으며 군량비확보에도 힘썼다.
1599년 공주목사가 되어 공주군에 산성을 수축하였고,1602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신(大臣)이 또 공을 천거하여 사도 조도사(四道調度使)에 임명되었다. 관동(關東)과 영남(嶺南) 및 호남(湖南) 호서(湖西) 지방에 출입하면서 험준(險峻)한 수천리의 험로(險路)를 거쳐 속량(粟糧)을 수만석이나 얻었으므로, 군량이 충족하여 백성이 고생되지 않았다.
1604년 해주목사를 지내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죽주부사(竹州府使)에 발령되어 부임하였다. 1608년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이어 명나라에 파견될 천추사(千秋使)로 선발되어 명나라 북경에 입조(入朝)하고 귀국하였으며, 돌아와서 승정원 우승지, 좌승지를 지냈다.
명나라 만력제(萬曆帝,1563년~1620년 明의 제13대 황제) 신종(神宗)이 태감(太監) 염등(冉登)을 보내어 책봉하는 글을 내릴 때에 공이 예방승지를 맡아서 신종의 책봉서를 주선하는데 궐전(闕典)이 없었으므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진하여 승정원도승지로 기용되었다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 부총관(副總管)을 겸하였으며 그 이듬해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형조참판(刑曹參判) 겸(兼) 동지춘추관사의금부사(同知春秋館事義禁府事)가 되었다
1608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날 때 논의에 끝까지 참여하지 않아 광해군의 미움을 받고 쫓겨나, 그 후 11년 동안이나 벼슬에 기용되지 못했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무고로 체포된 뒤 광해군의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진술해 삭출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계축옥사 때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길주(吉州)에 유배되고, 1627년 아산에 이배되었다가 1633년에 사면을 받고 1635년에 풀려나왔다. 길주(吉州)에 귀양 가 있을 때에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잘 이끌러 선유(善誘)하였기 때문에 신발이 항상 첨(簷)들에 가득하여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점점 향학(向學)하는 이가 많았는데, 뒤에 공의 부음(1635년8월29일)을 듣고 모두 다 천리 밖에서 조부(弔賻)를 하였다 한다.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즐겨 읽었고, 손수 ≪강목≫ 20권의 목(目)을 초(抄)해서 ≪강감요략 綱鑑要略≫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요점을 담으면서도 자세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사후 의정부좌찬성이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
가족 관계 [편집]
- (고조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김영수(金永銖)
- (증조고)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 김번(金璠)
- (조고) 신천군수(信川郡守) 증좌찬성(贈左贊成) 김생해(金生海)
- (선고) 통훈대부 군기시정(通訓大夫 軍器寺正)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김원효(金元孝)
- (선비) 증정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전주이씨) - 태종의 4남 근령군(謹寧君)의 현손 이승열(李承說)의 딸
- (전처) 증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1557~1613년) 현령(縣令) 이천우(李天祐)의 딸
- (장남) 형조참판 한성판윤 관찰사 김광욱(金光煜),1녀
- (손녀) 한산이씨 사복시정 이단에게 출가
- (차남) 진위현령(振威縣令)증찬성 김광위(金光煒), 4남 3녀
- (손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의주부윤 병조참의 김수익(金壽翼)
- (손자) 김수기(金壽箕)
- (손자) 도정 김수일(金壽一), 백부 김광욱의 양자로 입양.
- (손녀) 전주이씨 풍래군 이번(豊萊君 李瀿)에게 출가
- (장녀) 해평윤씨 참판 윤이지(尹履之)와 결혼, 8남 1녀
- (외손) 군수 윤탄(尹坦)
- (외손) 현감 윤강(尹堈)
- (외손) 윤식(尹埴, 요절)
- (외손) 현감 윤우(尹堣)
- (외손) 사헌부감찰 윤점(尹坫)
- (외손) 판관 윤개(尹塏)
- (외손) 진사 윤성(尹城),
- (외손녀) 여산송씨 승지(承旨) 송시길(宋時吉)과 결혼
- (장남) 형조참판 한성판윤 관찰사 김광욱(金光煜),1녀
- (후처) 증정경부인 김해김씨(金海金氏,1571-1642)
- (아들) 돈녕부도정 증호조참판 김광소(金光炤)
- (아들) 동지중추부사 김광혼(金光焜)
- (아들) 오위司果 증공조참의 김광련(金光煉)
- (아들) 증병조참판 김광희(金光熺)
- (차녀) 선산김씨 무관 통정대부 김진휘(金晉輝)와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