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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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강세황, <자화상> 1782. 그림 위쪽의 글씨 즉 화제에 적힌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은 새하얀데, 머리엔 오사모 쓰고 몸에는 야복을 걸쳤구나!(중략) 가슴에는 천 권의 서책을 품었고
붓의 힘은 천하의 다섯 명산을 흔들만 하지만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후략)[1]
출생 1713년 5월 21일
한성부 남산 남소동
사망 1791년 1월 23일 (79세)
한성부 남산
국적 조선
별칭 자는 광지, 호는 표암.
학력 예조판서, 천추 부사
직업 학자, 문인
배우자 진주 유씨
부모 강현(부)

강세황(姜世晃, 음력 : 1713년 5월 21일 ~ 1791년 1월 23일)은 조선의 문신, 서화가이다.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생애[편집]

숙종 39년 윤5월 21일에 아버지 문안공 현이 64세 때, 그는 3남 6녀 중 막내로 출생하여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2] 1776년 기로정시에 갑과 1등으로 급제하고, 기로소[3]에서 뽑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정조 때에 천추 부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을 정도로 서화에 뛰어났다. 글씨는 전서·예서를 비롯한 각 체에 모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사군자 등에 뛰어났다. 그의 화풍은 정선을 계승한 것으로 담담하면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다. 그는 당시 화단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후원자 또는 추진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으며 그림으로 『난죽도』, 『산수도』, 『영통동구도』 등이 있다.

화가이자 평론가로서의 업적[편집]

18세기 영조정조의 통치 기간 동안 활동하면서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사람의 그림에 평을 썼다. 당시 화단에서 남종문인화, 진경산수화, 풍속화, 도석인물화가 유행한 것이나 서양화법의 수용이 이루어진 것에는, 강세황의 영향력이 작용하였다. 더욱이 그는 김홍도신위에게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였다.[4]

그림[편집]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강백년(姜栢年)
    • 아버지 : 강현(姜鋧)
      • 본처 : 진주유씨(晉州柳氏) - 유뢰(柳耒)의 딸
        • 장남 : 강인姜(姜[亻+寅])
        • 차남 : 강완(姜俒)
          • 손자 : 강진(姜晉)
        • 삼남 : 강관(姜[亻+官])
        • 사남 : 강빈(姜儐)
          • 손자 : 강이구(姜彛九)
            • 증손자 : 강로(姜㳣)
      • 후처 : 나주나씨(羅州羅氏)
        • 오남 : 강신(姜信)
          • 손자 : 강이오(姜彝五)

출처[편집]

  1. 오주석 (1998). 《단원 김홍도》. 열화당, 79 그림 26쪽
  2. 변영섭. 《1월의 문화인물 미술인 강세황》. 문화체육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 4쪽
  3. 강세황은 71세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게 된다. 기로사는 나이가 많고 지위도 있는 사대부만이 들어가는 곳으로, 강세황의 가문은 강세황의 할아버지, 아버지, 강세황을 포함하여 삼대가 기로사에 들어간 장수 집안이다. 변영섭. 《1월의 문화인물 미술인 강세황》. 문화체육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 10쪽
  4. 변영섭. 《1월의 문화인물 미술인 강세황》. 문화체육부·한국문화예술진흥원,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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