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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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인들의 왕국
𐭠𐭩𐭥𐭠𐭭𐭱𐭲𐭥𐭩[a][2]
224년~651년
문장
시무르그
(제국의 상징)
호스로 2세 치하에서 최대 영토 범위에 도달한 사산 제국. AD 20년 무렵
호스로 2세 치하에서 최대 영토 범위에 도달한
사산 제국. AD 20년 무렵
수도
정치
정치체제봉건군주제[4]
샤한샤
224년 ~ 241년
632년 ~ 651년

아르다시르 1세
야즈데게르드 3세
왕조사산 왕조
역사적 시대고대 후기
지리
550년 어림 면적3,500,000km²[5][6]
인문
공용어중세 페르시아어 (공식)[7]
기타 언어
민족페르시아인
종교
종교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파르티아 제국
이베리아 왕국
쿠샨 제국
대아르메니아 왕국
파르스의 왕
라시둔 칼리파국
다부이드 왕조
바반드 왕조
자르미흐르 왕조
다마반드의 마스무간
카린반드 왕조
토카라 야브구

사산 제국(/səˈsɑːniən, səˈsniən/), 또는 에런샤흐르(Eranshahr, "이란인들의 왕국")[8][9]는 AD 7세기 초기 무슬림 정복 이전의 마지막 이란 제국이었다. 사산 가문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진 이 왕조는 서기 224년부터 651년까지 약 4세기 동안 존속함으로써, 이전의 아르사케스 가문파르티아 제국 다음으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이란계 제국이 되었다.[2][10]

사산 제국은 파르티아 제국을 계승하여, 페르시아를 이웃한 대립국인 로마 제국(395년 이후 동로마 제국)과 함께 고대 후기의 주요 강대국으로 재설립했다.[11][12][13] 제국은 아랍의 페르시아 정복으로 끝이 났다.

사산 제국은 파르티아 제국이 내부 분쟁과 로마와의 전쟁으로 쇠약해진 틈을 타서 권력을 잡은 이란 통치자 아르다시르 1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224년 호르모즈드간 전투에서 파르티아의 마지막 샤한샤인 아르타바누스 4세를 격파한 후 사산 왕조를 세웠고, '이란'이라는 영역 개념의 확장을 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유산을 회복하려 노력했다. 620년 당시, 가장 넓은 영토 범위에 도달한 사산 제국은 오늘날 이란이라크 전체를 포괄하고 레반트에서 인도 아대륙, 남아라비아에서 캅카스중앙아시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점유했다.

사산 왕조의 통치 기간은 복잡하고 중앙집권화된 정부 관료제를 특징으로 하는 이란 문명의 전성기였으며,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채택하여 그들의 통치를 합법화하고 통합하는 힘으로 활성화시켰다. 그들은 또한 웅장한 기념물, 공공사업, 후원받는 문화 및 교육 기관을 건설했다.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은 서유럽, 아프리카, 중국, 인도를 넘어 훨씬 더 확장되었으며,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중세 예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산 왕조의 예술·건축·음악·문학·철학은 이후 찬란하게 번영할 이슬람 문명의 확고한 문화적 기반이 되어주었으며, 나아가 이슬람권 전역에 페르시아의 선진적인 문화와 지식, 사상이 확산되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인류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명칭[편집]

공식적으로, 사산 제국은 '이란인들의 왕국(팔레비어: ērānšahr, 파르티아어: aryānšahr, 그리스어: ΑΡΙΑΝΩΝ ΕΘΝΟΥC, 한국어: 에런샤흐르)'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샤푸르 1세 시대에 제작된 페르시아어·파르티아어·그리스어의 삼중 언어로 새겨진 비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에런샤흐르의 통치자이며, (그리스 민족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페르시스팔라브후제스탄메샨아소레스탄노드아르닥쉬라간아두르바다간아라바이스탄아트로파테네아르메니아, 이베리아, 세간, 아란, 발라사간, 캅카스 산맥, 알바니아/알라니아의 입구까지,

그리고 파디슈와르가의 모든 산맥에서 구르간메르브하레이아바르샤르키르만사카스탄투르기스탄마크란파라데네힌드, 쿠샨사르, 파슈키부르, 이아, 소그디아, 차흐의 산부터 바다의 반대편인 마존샤르까지의 모든 지역이다.

— 샤푸르 1세의 비문 중 영토 부분을 열거한 구절

조금 더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제국을 통치한 지배층들이 그들의 시조인 사산에서 그 명칭을 차용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보편적으로 사산 제국(영어: Sassanid Empire) 또는 사산 왕조(영어: Sassanid Dynasty)라고 칭한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사산 제국을 신페르시아 제국이나 2차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산 제국이 아케메네스 제국과 함께 파르스를 기반으로 건국된 유일한 이란계 제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편집]

배경[편집]

파르티아 제국의 최대 영토. BC 1세기 경.

사산 왕조의 발흥은 당시 중동의 패권국이었던 파르티아 제국의 쇠퇴에서 기원한다. 파르티아는 우리가 흔히 제국하면 떠올리는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제 국가가 아니라, 지방 분권적인 여러 귀족들이 아르사케스 왕조를 중심으로 뭉친 봉건군주제 국가에 가까웠다.

이러한 특징은 파르티아가 셀레우코스 제국아르메니아 왕국 등의 주변 세력들과 맞서 싸우면서 팽창할 무렵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후 그들보다 훨씬 강력한 상대였던 로마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그 단점이 드러나게 된다.(로마-파르티아 전쟁)

중앙 정부와 반목하게 된 몇몇 봉건 귀족들은 중요한 전투에서 그들의 병력들을 제공하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족들간의 내분을 부추기거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내부가 혼란한 상황에서 파르티아는 로마 제국을 막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파르티아는 한 세기 동안 수도 크테시폰이 3차례나 약탈·파괴당하는 등 굴욕을 제대로 맛보았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곧 아르사케스 왕조의 권위와 실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렸고, 이는 다시 제국의 지방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일으켰다. AD 3세기 초, 이러한 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당시 파르티아 제국에서는 아르타바누스 4세볼로가세스 6세 간의 내전이 한창이었는데, 이것이 채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쳐들어온 것이다. 아르타바누스 4세가 니시비스 전투를 통해 겨우 로마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이미 제국의 국력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건국[편집]

아르사케스 왕조의 약화를 감지한 봉건 귀족들은 곧 각지에서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페르시스 부왕령의 통치자였던 바박도 그 중 하나였다. 바박은 본래 키르 지역의 총독이었으나, 서기 200년 즈음에 전임자를 살해하고 페르시스를 장악했다. 바박 사후, 페르시스 부왕 직위는 그의 장남 샤푸르를 거쳐 차남 아르다시르 1세에게로 넘어갔다.

왕위에 오르자, 그는 왕국의 수도를 파르스 더 남쪽으로 옮기고 그곳에 아르다시르-크와라(오늘날 피루자바드)란 이름의 새로운 수도를 조영했다. 이곳은 높은 산으로 잘 보호되어 있으며 험준하고 좁은 고개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워 방어에 용이했다.

페르시스 지역의 통치를 확립한 후, 아르다시르 1세는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여 페르시스 지방의 제후들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인근의 케르만, 이스파한, 수시아나, 메세네 지방을 장악했다. 그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파르티아 황제 아르타바누스 4세는 224년 후제스탄 총독을 보내 이를 막도록 했으나, 아르다시르는 진압군을 상대로 간단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아르타바누스 4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파르스를 침공했고 아르다시르 1세 역시 이에 맞서 출정했는데, 얼마 후 벌어진 호르모즈드간 전투(224)에서 아르타바누스 4세는 처참히 패배한 뒤 전사했다.

나크쉬 에 로스탐의 유명한 부조. 좌측에는 패배한 아르타바누스 4세를 짓밟고 있는 아르다시르 1세가 있으며, 우측에는 아흐리만을 짓밟고 있는 아후라 마즈다가 있다. 아르다시르가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받는 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반지이다.

이후 아르다시르 1세는 진공상태가 된 동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지역들을 차례로 장악했으며, 스스로를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통 후계자'로 자처하고 이란인의 왕중왕(Šâhan šâh-ī Ērān)라 칭하면서, 400년간 이어져 오던 파르티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사산 제국을 창건했다. 수도 또한 이때 이스타크르에서 크테시폰으로 이전되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생존해 있던 파르티아 황제 볼로가세스 6세셀레우키아 등 잔존 영토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하면서 사산 제국에게 저항했다. 그러나 아르다시르 1세는 228년까지 이를 모두 물리쳤으며, 신생 제국을 더욱 동쪽과 북서쪽으로 더욱 확장하여 사카스탄, 고르간, 호라산, 마르기아나, 발흐호라즘 지방을 정복했다. 그는 또한 바레인모술을 점령하기도 했다.

훗날의 사산조 비문은 쿠샨, 투란, 마크란의 왕들이 이때 아르다시르 1세에게 복종했다고 주장하지만, 발견된 증거 및 사료들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이들은 실제로는 아르다시르의 아들인 샤푸르 1세 시기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1차 전성기(240-272)[편집]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의 부조. 좌측의 인물들은 각각 발레리아누스와 필리부스 아라부스이고, 우측에 말을 타고 있는 인물은 샤푸르 1세이다.

아르다시르 1세가 240년에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샤푸르 1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 역시 부황의 팽창 정책을 이어받아 박트리아쿠샨 제국의 서부를 정복하고, 로마에 대항하는 여러 군사 원정들을 수행했다. 그는 우선 로마령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하여 그곳의 핵심 도시인 카르헤누사이빈을 점령했으며, 244년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이후 새로 즉위한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를 상대로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바로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에데사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은 일이다. 샤푸르는 페르세폴리스 인근의 나크쉬 에 로스탐에 페르시아어·그리스어로 인상적인 바위 부조를 조각함으로써 이 승리를 기념했다. 이후 260년에 그는 아나톨리아로 재차 진격했지만, 로마와 그 동맹국 팔미라에게 패배한 뒤에는 더이상 서부를 넘보지는 않았고, 대신 변방의 방어와 영토확장에 목적을 둔 몇몇 외교 정책을 추진했을 뿐이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내치에 더욱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그는 로마군 포로들과 레반트,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등지를 약탈하며 강제로 끌고 온 인구, 그리고 외부에서 온 이민자들을 후제스탄 지역에 정착시켜 도시와 요새, 교량과 댐 등을 건설하도록 했다. 후제스탄의 군디샤푸르, 파르스의 비샤푸르와 호라산의 니샤푸르가 그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도시들이다.

마니교의 확산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

샤푸르 1세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실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가 바로 이 무렵에 활동한 인물인데, 그와 그의 종교가 당시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던 이란 내에서 이단이라고 비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니교에게 포교의 자유 및 신앙 허용 등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아마 당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조로아스터교 대사제 카르티르와 성직자들(마기)을 견제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한편 로마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기독교 또한 박해받지 않았으며, 바빌로니아유대교 역시 사산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통치 하에서 사산 제국의 영토는 이전의 파르티아보다 훨씬 광대해졌고, 수많은 이민족들이 페르시아의 지배권 아래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샤푸르 1세는 이란인과 비(非)이란인의 왕중왕(šāhān šāh-ī Ērān ud Anērān)이란 칭호를 사용했는데, 이 칭호는 사산 왕조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1차 침체기(272-309)[편집]

아나히타로 추정되는 여신(우측)에게 왕권의 상징인 반지를 받는 나르세스 1세. 형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나르세스 1세는 나크쉬 에 로스탐에 대규모 마애상과 비문을 남겨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잘 보존되어 훗날 학자들이 초기 사산 왕조 역사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272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한 뒤 제위를 계승한 호르미즈드 1세는 재위 1년 만에 사망했고, 그의 동생이자 길란의 왕이었던 바흐람 1세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도였으며 대사제 카르티르의 지원을 받아 제위에 오를 수 있었으므로, 당시 조로아스터교와 갈등을 빚고 있던 마니교를 탄압하고 그 창시자 마니를 처형했다. 한편 바흐람 1세는 당시 독자 세력화를 꾀하고 있던 팔미라 제국제노비아에게 군대를 파견하는 등의 지원을 계속했지만, 그녀가 패배하고 사로잡히자 로마 측에 화평을 요청하며 저자세를 유지했다. 불과 몇 십년 전의 샤푸르 1세 시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태도 변화인데, 본래 영토 크기·국력의 측면에서 볼 때 로마 제국은 사산 제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대국이였던데다가, 로마는 마침 아우렐리아누스가 분열된 제국을 막 통합해 낸 상태였던 반면 페르시아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276년, 바흐람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바흐람 2세는 부황의 전례를 따라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타 종교에 대한 탄압 정책을 유지했으며, 카르티르는 제국 전체의 최고 심판관이자 원래 사산 가문의 지위였던 이스타크르의 아나히타 신전 수호자로 임명되는 등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280년대 초, 쿠샨-사산 왕국의 왕이었던 바흐람 2세의 동생 호르미즈드가 제국의 동방 영토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후제스탄사카스탄 지역에서도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다.

카루스 황제의 주화

바흐람 2세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친히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고, 얼마간의 격전 끝에 겨우 이를 어느정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페르시아 주력군이 동부 전선에 전부 쏠려있던 283년, 카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서쪽 변경에 도착한 뒤 사산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곧 로마군은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했고, 티그리스 강을 도하하여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했다. 그나마 카루스 황제가 벼락에 맞아 급사하여 로마군이 철수함으로써 도시는 다시 탈환될 수 있었다.

갈레리우스 황제의 흉상

294년 바흐람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3세가 뒤를 이었지만, 귀족들은 흔들리는 제국을 통치하기에 너무 유약해 보이는 그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바흐람 3세를 반대하는 몇몇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바흐람 3세를 퇴위시킨 뒤,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던 나르세를 나르세스 1세로 즉위시켰다. 나르세스 1세는 이전까지 유지되던 타 종교 탄압 정책을 중단시키는 한편, 연이은 로마와의 패전으로 약화된 샤한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로마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은 초반에만 잠깐 성공적이었으며, 나중에는 갈레리우스의 로마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갈레리우스는 298년 아르메니아 접경 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쳐들어왔다. 이에 나르세스 1세는 로마 군과 싸우기 위해 아르메니아로 후퇴했는데, 아르메니아의 험준한 산지는 로마 보병들에게는 유리했지만 사산 기병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갈레리우스는 야습을 감행하여 페르시아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갈레리우스는 메디아아디아베네로 진격하여 에르주룸 근처에서 재차 승리를 거두었고, 티그리스 강을 따라 남하하여 수도 크테시폰을 약탈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나르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어 메소포티미아 상류 지대가 로마의 영역으로 귀속되는 것에 동의하라고 압박했고, 결국 299년 양측 간에 평화 조약이 맺어졌다.

나르세스 1세의 패배 이후 서기 300년경 캅카스의 정치적 상황. 붉은 선이 평화협정을 맺는 조건으로 로마가 가져간 지역이다.

평화의 대가는 컸다. 사산 제국은 티그리스 강 서쪽의 5개 지방을 로마에게 양도했으며, 다시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맺어야 했다. 또한 이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르메니아, 이베리아 왕국, 알바니아 왕국 등을 비롯한 캅카스의 여러 왕국들이 로마에게 복속되었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사산 제국과 로마 제국 간의 영토 갈등은 종교적 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이후 동로마 제국 시기까지 이어졌다.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진 나르세스 1세는 302년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양위하고 얼마 안 가 죽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2세 역시 땅에 떨어진 샤한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귀족들의 발호는 날로 심해졌다. 결국 309년 그가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 아랍인들에게 죽자,[14] 귀족들은 호르미즈드 2세의 남은 아들들 대부분을 죽이거나 눈을 멀게 했다.

2차 전성기(309-379)[편집]

샤푸르 2세의 흉상. 현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페르시아 귀족들은 호르미즈드 2세의 장남 아두르 나르세를 살해하고, 차남의 눈을 멀게 했으며, 삼남은 감금해버렸다. 왕위는 곧 첩실에게서 태어난 샤푸르 2세에게로 돌아갔다. 일설에 따르면 귀족들이 모후의 임신한 배 위에 왕관을 올려놓아 태어나기 전부터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굉장히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재위 초기에는 어머니와 귀족들이 섭정 역할을 맡아 제국을 통치했다.

그가 16세가 되던 해, 샤푸르 2세는 친정을 선언했고, 비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제국 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가 우선한 문제는 남쪽의 아랍인이었다. 당시 아라비아 사막 북부의 아랍인들은 사산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서 서부 지역과 페르시아만 연안에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심지어는 사산 제국의 발흥지인 파르스 지역까지 습격했다.

이에 샤푸르 2세는 소규모 원정군을 조직한 뒤 아랍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이끌었는데, 주로 아소리스탄이야드 부족에 대항하여 개시되었으며, 그 후에는 페르시아 만을 건너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자르 산맥에 거주하던 아랍 부족인 바누 타밈을 공격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많은 아랍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우물을 모래로 메워버렸다고 한다.

동부 아라비아의 아랍인들을 상대한 이후에도 샤푸르 2세는 서부 아라비아와 시리아로 원정을 계속했고, 나중에는 메디나까지 갔다가 귀환했다. 이때 그가 아랍인 포로들의 어깨를 뚫고 줄로 꿰어 끌고 갔기 때문에, 그는 아랍인들에게 '어깨를 뚫는 자(Dhū'l-Aktāf)'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샤푸르 2세는 아랍인들이 그 뒤에도 계속 쳐들어올 것을 우려하여 알 히라 근처에 장벽을 건설했고, 이것은 훗날 왈 이-타즈간(war-i tāzigān, 아랍인들의 장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337년부터는 나르세스 1세 시대에 빼앗긴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아르메니아 등의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로마를 공격했는데, 페르시아군은 일련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했지만 변경의 핵심 도시인 니시비스는 3차례에 걸친 공성전을 감행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때 시온족키다라 등의 유목민들이 갑자기 나타나 동부 국경을 습격했는데, 이들로 인해 실크로드를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트란스옥시아나가 위협받았다. 이에 샤푸르 2세는 급히 로마 전선을 정리하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공격을 분쇄하고 그 지역을 오히려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그 외에도 샤푸르 2세는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쿠샨-사산 왕국을 복속시켰으며,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사이의 광대한 영토를 장악했다. 이 승리에 이어 문화적인 확장이 이루어졌고, 사산식 예술이 트란스옥시아나를 관통하여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로

359년 샤푸르 2세는 키다라의 왕 그룸바테스와 함께 두번째 로마 원정을 시작했고, 곧 싱가라아미다를 탈환했다. 그러나 361년, 계속된 페르시아의 도발에 분노한 율리아누스 황제가 친히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면서 사산 제국은 위기를 맞았다. 그는 250년 전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당시 건설했던 운하까지 이용하면서 물자를 수송했고, 몇 차례의 전투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수많은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크테시폰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아르메니아 방면으로 파견했던 분견대가 돌아오지 않아 퇴각을 결정했다. 이후 로마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율리아누스가 원인 불명의 죽음을 맞으면서[15] 샤푸르 2세는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며, 오히려 새로 즉위한 요비아누스 황제로부터 니시비스와 싱가라뿐만 아니라 289년 페르시아가 로마에게 할양한 영토를 양도받고, 향후 로마가 아르메니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유리한 강화 조약을 이끌어냈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다시 페르시아에게 넘어갔다.

알촌 훈족의 동전 및 탐가
사산식 동전의 디자인을 모방한 알촌 훈족의 초기 동전으로, 초상화는 사산 황제 샤푸르 2세(재위 309~379년)과 유사하다. 알촌인들은 다만 거기에다가 그들의 탐가 ()를 추가하고, 뒷면에 박트리아 문자 '알초노(αλχοννο)'를 새겼을 뿐이다. 400~440년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16][17][18]

샤푸르 2세의 치세 말기인 370년 무렵, 사산 제국은 북방에서 온 이민족들에게 박트리아의 지배권을 빼앗겼다. 처음 도착한 것은 키다라였고, 이후 에프탈알촌이 뒤를 이었다. 이 침략자들은 처음에 사산 양식을 바탕으로 그들의 동전을 발행했다. 사산 양식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동전들이 박트리아에서 발견되었는데, 종종 샤푸르 2세와 샤푸르 3세의 것을 모방한 초상화가 확인된다. 그들은 여기에다가 탐가박트리아 문자를 추가하여 자신들이 만든 것임을 나타냈다.

샤푸르 2세는 선대의 종교적 관용책을 뒤엎고 기독교 박해를 다시 시작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며,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는 로마와의 분쟁 지역이었던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가 반(反) 페르시아 감정 및 분열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치세에『아베스타』의 집전이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던 교리의 단순화 및 정리가 마무리되고 로마와 비슷한 교회 체계가 구축되는 등, 제국의 공식 종교인 조로아스터교가 한 층 더 발전하기도 했다. 379년에 그가 사망했을 당시, 사산 제국은 동쪽의 이민족 침략을 막아내고 요충지 아르메니아를 페르시아 지배 하에 편입시키는 등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2차 침체기(379-498)[편집]

바흐람 5세는 페르시아 문학가와 시인들이 매우 선호하는 인물이다. 위 작품의 제목은 《검은 파빌리온에 있는 바흐람과 인도 공주》로, 16세기 중반 사파비 제국 시대의 위대한 페르시아 시인 니자미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샤푸르 2세의 사망 직후부터 카바드 1세가 즉위할 때까지, 즉 379~498년까지의 약 120년에 이르는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가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단기적, 산발적인 충돌은 있었지만 적어도 이전과 같은 대규모 회전이나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평화가 유지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 아르다시르 1세~샤푸르 2세에 이르는 기나긴 기간 동안 페르시아의 국력이 두드러지게 신장되면서, 로마와 이란이 서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다.
  • 두 제국 모두 동방에서 침입해 오는 이민족(훈족, 에프탈)들을 상대하는 동시에 내부의 불만과 혼란을 통제해야 했으므로 서로 전면전을 치를 여유가 없었다.

특히 사산 제국에서는 샤푸르 2세의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에 억눌려 있던 귀족 및 성직자들의 발호가 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379년 샤푸르 2세가 사망한 이후, 제국은 그의 이복 형제인 아르다시르 2세와 그의 아들 샤푸르 3세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들은 둘 다 전임자와 같은 훌륭한 통치를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샤푸르 3세는 재위 5년만에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38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바흐람 4세는 좀 더 오래 재위하긴 했지만, 그 역시 399년에 암살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20년간의 혼란과 일련의 무능한 군주들의 즉위에도 불구하고, 샤푸르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확립된 행정 체계는 여전히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기능했으므로, 제국의 운영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

399년에 제위를 계승한 바흐람 4세의 동생 야즈데게르드 1세는 그나마 이전 황제들보다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42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는 가끔씩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두 인물 모두 개인적인 무력이나 외교적인 감각이 뛰어났고, 기회주의적이었으며, 종교적 소수자들을 위한 자유를 제공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재위 초기에는 기독교도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견제한 반면, 말년에는 기독교도가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박해를 용인했다.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의 반발을 샀지만, 대체로 그의 치세 대부분은 종교의 자유가 용인되었다. 한편 야즈데게르드 1세는 로마의 어린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다.

바흐람 5세가 야생 나귀들을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한 페르시아 세밀화. 1430년 티무르 제국 시대의 작품이다.

421년 야즈데게르드 1세가 변방에 체류하던 중 의문사하자 그의 큰 아들 샤푸르와 작은 아들 바흐람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샤푸르는 귀족들의 농간에 의해 암살되었다. 귀족들은 바흐람의 즉위 역시 막으려고 했지만, 바흐람은 이란의 속국이던 아랍계 라흠 왕조의 군대를 빌려 귀족들을 물리치고 바흐람 5세로 즉위했다.

그는 재위 초반에 벌어진 로마와의 전쟁을 422년에 평화롭게 마무리했고, 427년 에프탈의 동부 침공을 몸소 분쇄했으며, 428년에는 아르메니아를 합병하고 제국의 속주로 편입하는 등 일련의 대외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바흐람 5세는 귀족과 성직자 세력을 적절하게 제어하며, 재위 대부분의 기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바흐람 5세의 치세에는 사냥, 스포츠, 연회, 시와 음악 등의 페르시아 궁정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는데, 그는 세금과 공공 부채를 취소하고 음악가들을 고용하여 연회를 즐기는 등 이러한 문화 발전을 장려했다. 바흐람은 사냥 중에서도 특히 야생 당나귀 사냥을 즐겼는데, 때문에 그에게는 "야생 당나귀"라는 의미가 담긴 '구르(gur)'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르메니아가 속주로 편입된 이후인 430년경 캅카스 남부의 상황.

바흐람 5세는 422년 로마측과의 평화 협정에 따라 기독교 박해를 중지했고, 43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야즈데게르드 2세 역시 재위 초기에는 부황의 관용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가 점점 커지면서 국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그는 446년부터 강경한 정책으로 선회하고는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기독교 박해는 점차 확대되어, 나중에는 기독교의 세가 크던 이베리아와 아르메니아에까지 실시되었다. 이러한 종교 정책은 바르단 마미코니안이 이끄는 대규모 반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에 비해 훨씬 관대한 대우를 받던 유대인과 그 종교인 유대교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공개적으로 안식일을 금지하는 법령이 발표되었으며 여러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 한편으로 야즈데게르드 2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 키다라, 에프탈, 베두인 등 사막과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과의 전쟁으로 보냈으며, 캅카스호라산에서 각각 승리를 거두어 유목민 침입을 일시적으로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5세기 중반 사산 제국의 영역

457년 야즈데게르드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3세가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들의 지원을 받은 동생 페로즈 1세에 의해 암살되었다. 페로즈 1세는 캅카스로 쳐들어온 훈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466년 키다라를 정벌한 뒤 토하리스탄을 잠시 장악했으며, 7년 동안의 기근에 침착하게 대처하는 등 준수한 통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한편 5세기 초부터 이어진 에프탈의 공격은 그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이에 페로즈 1세는 474년부터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2차례나 패배하고 사로잡혔으며, 그들에게 막대한 공물과 아들 카바드를 인질로 잡힌 후에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484년 다시 군대를 모아 출전해 에프탈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를 알아챈 에프탈의 기습으로 전군이 궤멸당하고 본인도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후 에프탈의 군대가 제국의 동부를 휩쓸었고, 니샤푸르헤라트, 메르브 등 주요 도시가 그들에게 넘어갔다. 결국 그들은 에프탈 왕의 봉신이 되고, 그들에게 매년 막대한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 아르메니아도 에프탈 침입 직전에 바한 마미코니안을 중심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카렌 가문수크라를 중심으로 동부에 남은 에프탈을 몰아낸 귀족들은, 페로즈 1세의 동생이자 행정 수반이었던 발라시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발라시는 선량한 인물이었지만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난국을 헤쳐나갈 만한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에프탈에 바치는 막대한 연공 때문에 국고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곧 발라시는 군대와 귀족들의 지지 모두를 잃어버렸고, 재위 4년 만에 조카 카바드에게 찬탈당한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488년 즉위한 카바드 1세는 정력적이고 개혁적인 통치자로서, 귀족들의 막강한 힘을 제어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교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니교와 흡사한 교리를 가진 마즈다크교는 귀족과 부자들이 모든 재산, 심지어 부인들까지 가난한 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쳐 하층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급진적인 정책에 반발한 귀족과 성직자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496년 카바드 1세를 폐위시켜 후제스탄의 '망각의 성'이라는 감옥에 가둔 뒤에 그의 동생 자마습을 대신 황제로 추대했다.

자마습은 친절하고 선량한 황제였으며, 농민을 비롯한 하층민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세금을 내렸다. 한편으로는 마즈다크교를 탄압하고 제국의 주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카바드 1세가 에프탈 군대와 함께 수도로 돌아오면서 곧 끝이 났다. 자마습은 별다른 저항 없이 그의 형에게 왕위를 돌려주었고, 비록 실명형에 쳐해졌지만 궁정에서 호의적인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3차 전성기(498-622)[편집]

카바드 1세 시기에 제작된 숫양 사냥 접시

498년 제위를 되찾은 카바드 1세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물론 귀족들의 막강한 권력을 일시적으로 억누르기는 했지만, 이미 황권이 추락했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특히 오랜 기근과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제국의 재정도 고갈된 지 오래였다. 이외에도 페르시아에 복속되어 있던 여러 민족들, 특히 이베리아아르메니아 등이 독립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방에 할거한 귀족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에프탈을 이길만한 힘은 여전히 없다보니 매년 막대한 연공까지 가져다 바쳐야 했다.

그가 원하는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자금이 필요했는데, 달리 재정을 마련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 카바드 1세는 이웃한 동로마 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과거 캅카스 지역을 분할한 뒤,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로마가 이란에 분담금을 지불해 왔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는 분담금 지불을 거부했고, 카바드 1세는 에프탈을 끌어들인 정면 침공으로 이에 화답했다.

502년에 시작된 이 전쟁은 몇 년 뒤 캅카스 지역에 훈족이 대거 쳐들어오면서 평화 협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카바드 1세는 약탈로 얻은 전리품과 점령한 도시를 돌려주는 대가로 받은 자금을 투입하여 당장 재정의 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뒤 526년에 전쟁이 재발하여 532년까지 이어졌는데, 그 결과 뚜렷한 영토 변화는 없었던 대신 동로마가 페르시아에 방어 분담금을 계속 지급하는 방향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카바드 1세는 외치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황폐해진 국내 상황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재정·군사 분야의 개혁과 함께 중앙집권화 또한 같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귀족 세력들의 힘은 매우 약화된 반면 황제의 권력은 매우 강해졌다. 520년대부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마즈다크교를 정통 교리를 내세워 탄압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황제에게로 가져오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다.

카바드 1세가 531년에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 호스로 1세가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부황이 시작한 개혁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여 이어갔는데, 그 결과 봉건 귀족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계층인 데흐칸이 등장했으며, 행정·군사·재정 분야에서 일련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위한 댐과 다리, 도로, 운하의 재건 및 확대, 새로운 도시 조영 등 각종 건설 사업도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개혁 정책 덕분에 제국의 재정은 풍족해졌고, 군사력은 이전보다 한 층 더 강화되었으며, 황제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은 거의 없어졌다. 이러한 내치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호스로 1세는 외부로 눈을 돌렸다.

팔라비 왕조 시기인 20세기 초 테헤란에 조성된 호스로 1세 기념물. 호스로 1세는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정의롭고 위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557년 중앙아시아의 돌궐(튀르크) 제국과 연합해 에프탈을 협공, 궤멸시켰으며 571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을 점령, 속국으로 삼았다. 에프탈 멸망 후에는 돌궐이 새로운 위협이 되었으나, 적어도 호스로 1세 치세에는 대규모 침공은 없었다.

에프탈, 예멘과 달리 대 로마 전쟁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명백한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채 수십년을 끌었다. 로마와 이란은 532년 휴전 협정을 맺은 상태였는데, 540년 이란측이 조약을 파기하고 로마를 공격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서부 전선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이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고, 호스로 1세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이후 호스로 1세가 캅카스의 속국 라지카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돌린 사이 벨리사리우스의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뒤늦게 남하한 호스로 1세 역시 에데사를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543년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로마군은 이란 측의 매복에 걸려 격퇴되었고, 545년 로마와 이란은 로마가 연공을 보내는 조건으로 5년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547년 라지카가 이란 대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함에 따라 로마군이 파견되고, 로마와 이란은 물론 역내 친로마 세력과 친이란 세력끼리도 충돌하는 혼전이 벌어졌다. 결국 549년 로마와 이란의 전면전이 재개되었고, 10여 년을 끌다가 562년 라지카가 로마 측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571년 아르메니아의 반란으로 양측의 전쟁이 재개되었으며, 로마와 이란은 변경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고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쟁을 지속했다

문화[편집]

종교[편집]

조로아스터교의 절대신 아후라 마즈다와 이란의 전통적인 신들의 결합이 파르티아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사산 왕조 때는 불과 빛의 숭배의식과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경배의식이 강조되었다. 조로아스터교는 사산 왕조시대에 체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다. 최고사제는 종교관할권뿐만 아니라 후대에 왕위계승자의 선정과 국사(國事)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선과 악, 즉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의 대결에서 선한 신령과 천사는 모두 전지전능한 아후라 마즈다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에 사산 왕조의 근거지인 파르스 지역의 관행도 종교의례 속에 상당히 스며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신 미트라조로아스터교와 결합된 것이다.

샤푸르 1세 치하에서 마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나타났다. 창시자 마니(216년? ~ 274년?)는 바빌로니아에 살던 파르티아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이란어를 사용했고 그의 교리는 그노시스교의 사상과 철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마니는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의 사상을 함께 결합하려 애썼다. 이러한 마니의 가르침은 샤푸르 1세의 지원을 받아 이란과 외부지역까지 널리 전파되었으나 그의 아들 바흐람 1세의 탄압정책으로 마니는 처형되었고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 후 마니교는 호라산 지역과 사산 왕조의 동부 및 중앙 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신학도 발전되어 아후라 마즈다, 즉 오르미즈드와 아리만을 무한한 시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종래의 이원적(二元的) 개념을 수정하려는 주르반 종파가 나타났으나, 호스로 1세(재위: 531년 ~ 579년)가 이를 이단으로 선언함으로써 사산 왕조의 조로아스터교는 의례와 순수한 교리를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기독교는 3세기 중반 이후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변의 아람어 사용공동체에 전파되었다. 로마 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사산 왕조는 기독교를 관용했으나, 마니교나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적대적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로마가 점차 기독교화된 339년 이후 기독교인들은 샤푸르 2세와 그의 후계자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기독교는 사산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건축[편집]

사산 왕조 예술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석회석 절벽위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물이다.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있는 나크시에 로스탐과 나크시에 라자브 등이 현존하는 유적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부조물들의 모습을 통해 사산 왕조 통치자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호스로 2세(591년 ~ 628년)가 크테시폰에 세운 거대한 궁전이다. 일부가 남아 있는 이 궁전은 구운 벽돌로 돔 형식의 천장을 반드는 사산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편집]

사산 왕조시대에는 문학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왕조가 문학보다 종교 우선정책을 추진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외국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외국문학도 들어와 중세 팔라비어로 번역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번역작품은 호스로 1세 때 완성된 〈칼릴라와 딤네 Kalilag and Dimnag〉인데 인도의 전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외에도 헬레니즘의 낭만주의 문학도 소개되었다.

사산 제국 연표[편집]

224–241: 아르다시르 1세의 치세:

241–271: 샤푸르 1세의 치세:

271–301: 왕조의 내전 기간.

309–379: 샤푸르 2세의 치세:

  • 337–350: 로마와의 1차전쟁 : 별 성과없음.
  • 358–363: 로마와의 2차전쟁. 대승을 거두고 동방과 서방의 국경을 확장하다.

399–420: 야즈데게르드 1세의 치세:

  • 409: 기독교도, 공개적 예배와 교회 건설 허락되다.
  • 416–420: 야즈데게르드 초기의 명령을 뒤엎고 기독교 박해하다.

420–438: 바흐람 5세의 치세:

  • 420–422: 로마와 전쟁.
  • 424: 다드이수 종교회의, 동방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

438–457: 야즈데게르드 2세:

483: 기독교 관용 포고령 발표.

491: 아르메니아 교회, 칼케돈 신조를 부정하다.:

531–579: 전륜성황, 호스로 1세의 치세:

  • 532: 로마 제국과 "영구 평화조약" 체결
  • 540–562: 로마 제국과 전쟁.

590–628: 호스로 2세의 치세:

628–632: 황제의 난립으로 인한 혼란기

632–642: 야즈데게르드 3세의 치세.:

  • 636: 이슬람의 정복기간에 사산조 군대가 알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 무슬림군에게 대패하다.
  • 642: 최종적으로 아랍군이 니네베에서 승리하다.

651: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 3세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살해당하고 제국이 막을 내리다. 그의 아들과 다른 많은 유민들은 중국으로 망명하다.

사산 왕조의 황제 목록[편집]

사산 왕조의 가계도
사산왕조의 지배자
지배자 연도
아르다시르 1세 224년 - 241년
샤푸르 1세 241년 - 272년
호르미즈드 1세 272년 - 273년
바흐람 1세 273년 - 276년
바흐람 2세 276년 - 293년
바흐람 3세 293년
나르세스 1세 293년 - 302년
호르미즈드 2세 302년 - 310년
샤푸르 2세 310년 - 379년
아르다시르 2세 379년 - 383년
샤푸르 3세 383년 - 388년
바흐람 4세 388년 - 399년
야즈데게르드 1세 399년 - 420년
바흐람 5세 420년 - 438년
야즈데게르드 2세 438년 - 457년
호르미즈드 3세 457년 - 459년
페로즈 1세 457년 - 484년
발라시 484년 - 488년
카바드 1세 488년 - 531년
쟈마습 496년 - 498년
호스로 1세 531년 - 579년
호르미즈드 4세 579년 - 590년
바흐람 코빈 590년 - 591년
비스탐 591년 - 595년
호스로 2세 591년 - 628년
카바드 2세 628년
아르다시르 3세 628년 - 630년
샤흐르바라즈 630년
푸란도흐트 (여제) 630년 - 631년
페로즈 2세 631년
아자르미도흐트 (여제) 631년
호르미즈드 6세 631년 -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 632년 - 651년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MacKenzie, D. N. (2005), 《A Concise Pahlavi Dictionary》, London & New York: Routledge Curzon, 120쪽, ISBN 978-0-19-713559-4 
  2. (Wiesehöfer 1996)
  3. “Ctesiphon – Encyclopaedia Iranica”. Iranicaonline.org. 2013년 12월 16일에 확인함. 
  4. First Encyclopaedia of Islam: 1913–1936. Brill. 1993. p. 179.
  5. Turchin, Peter; Adams, Jonathan M.; Hall, Thomas D (December 2006). “East-West Orientation of Historical Empires”. 《Journal of World-Systems Research》 12 (2): 223. ISSN 1076-156X. 2016년 9월 11일에 확인함. 
  6. Taagepera, Rein (1979).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600 B.C. to 600 A.D.”. 《Social Science History》 3 (3/4). p. 122. doi:10.2307/1170959. JSTOR 1170959. 
  7. Daryaee 2008, 99–100쪽.
  8. Canepa 2018, 9쪽.
  9. Daryaee 2018, 1쪽.
  10. “A Brief History”. 《Culture of Iran》. 2001년 11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9월 11일에 확인함. 
  11. (Shahbazi 2005)
  12. Norman A. Stillman The Jews of Arab Lands p. 22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79 ISBN 0827611552
  13. International Congress of Byzantine Studies Proceedings of the 21st International Congress of Byzantine Studies, London, 21–26 August 2006, Volumes 1–3 p. 29. Ashgate Pub Co, 2006 ISBN 075465740X
  14. 또 다른 가설은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 사로잡혀 외진 곳에서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15. 암살이라는 주장도 있다.
  16. Braarvig, Jens (2000). 《Buddhist Manuscripts》 (영어) Vol.3판. Hermes Pub. 257쪽. ISBN 9788280340061. 
  17. Tandon, Pankaj (2013). “Notes on the Evolution of Alchon Coins” (PDF). 《Journal of the Oriental Numismatic Society》 (216): 24–34. 2018년 7월 8일에 확인함. 
  18. “CNG: Feature Auction CNG 69. [Medieval] HUNNIC TRIBES, Alchon Huns. Anonymous. Circa 400-440 AD. AR Drachm (3.43 gm, 3h). Imitating Sasanian king Shahpur II. Kabul or Gandhara mint.”. 《www.cngcoins.com》. 2023년 4월 2일에 확인함. 
  1. Book Pahlavi spelling: (ʾylʾnštr'); Inscriptional Pahlavi spelling: 𐭠𐭩𐭥𐭠𐭭𐭱𐭲𐭥𐭩 (ʾyrʾnštry), 𐭠𐭩𐭫𐭠𐭭𐭱𐭲𐭥𐭩 (ʾylʾnštry); Modern Persian: ایرانشهر whence the New Persian terms Iranshahr and Iran[1]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