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
위정척사(衛正斥邪) 또는 척사위정(斥邪衛正)은 조선 말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위정),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서 배격하는(척사) 운동이다. 이 운동을 하는 정치 세력을 위정척사파 또는 척사위정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교 학파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했으므로 수구당이라고 불렸으며, 이는 1870년대 이후의 수구당이나 수구파와는 다르다.
개관[편집]
이는 조선 후기에 서학(西學)이 들어온 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는 실학 운동이 활발해지고 천주교가 전파되자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를 사도(邪道)로 보아 배척하고 국교로서의 유교를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보수 유생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개항, 곧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다가, 뒤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바뀌었다.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지나치게 전통 사회 체제를 고수하려고 하여 국제 관계의 흐름에서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내용[편집]
이것은 제1기에 천주교 배척과 실학자 탄압으로, 제2기에는 개화(開化) 반대와 천주교·동학의 거부로, 제3기에는 국권수호와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어 한말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주요 경과는 아래와 같다.
- 1785년 서학의 옥이 일어나자 유하원(柳河源) 등은 양서의 금단(禁斷)을 주장하였다.
- 1788년 이경명(李景溟)이 서학의 폐단을 상소하고 그해 8월에는 천주교책을 불사르게 하였다.
- 1791년부터 정부에 의한 천주교박해가 본격화되었는데 이것은 거의 모두 유교의 입장에 선 고관들의 상소에 의한 것이었다.
- 1839년 이지연(李止淵)이 천주교 토치(討治)를 논하고 기해사옥(己亥邪獄)이 일어나 천주교 다수를 처형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였으며 이해 11월에 '척사윤음 (斥邪綸音)'이 반포되었다.
- 1866년 기정진(奇正鎭)·이항로(李恒老) 등이 척화소(斥和疏)를 올렸다.
- 1876년에 강화도조약이 맺어지자 이만손(李晩孫) 등의 만인소(萬人疏)가 개화반대 여론을 일으켰고 이것은 김평묵(金平默)·최익현(崔益鉉) 등에 의하여 꾸준히 계속되었다.
- 갑오개혁 이후에는 항일의병운동이 일어나 국권수호, 매국역도(賣國逆徒) 격살, 항일 무장투쟁 등으로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