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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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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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을 가는 현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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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카를룩 | 연나라 | ||||||
지휘관 | |||||||
당 현종 |
안록산†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 | ||||||
병력 | |||||||
약 60만 명 ~ 70만 명 | 약 20만 명 ~ 30만 명 | ||||||
피해 규모 | |||||||
불명 | 불명 | ||||||
당나라의 지방통제력 약화 및 중앙아시아 주도권 상실. |
안사의 난(安史之亂, 영어: An Lushan Rebellion)은 755년 12월 16일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록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 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명이나 줄었다.[1] 위구르족에 의해 진압되지만,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진다.
원인[편집]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은 양귀비에 빠졌다. 무혜비를 잃고 왕자들을 억울하게 죽게 해 가슴 아파하던 현종은 전국에 화조사(花鳥使)를 파송하여 미녀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 무혜비의 소생인 수왕의 비 양옥환에게 반했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왕과 양옥환을 이혼시킨다. 그리고 양옥환을 도교 사원에 가 있게 한 후 그녀를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로 삼았다. 그는 밤낮으로 양귀비와 놀고 먹으며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의 생활에 빠졌다.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조차 넘겨주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 현종은 여산(驪山)의 온천에 있는 별궁을 수리하여 화청궁(華淸宮)이라 하고, 사시사철 그곳에서 지냈다. 현종은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있었고 그로 인해 현종이 넘겨준 정치권력을 손에 넣은 재상 이임보는 양귀비를 조종하여 독재정치를 하였다. 현종은 명신 장구령의 충언은 무시하고 이임보만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는데 그로 인해 746년 과거 응시자를 전원 탈락시키는 사건을 내는데 그는 그보다 우수한 관리가 나오면 그의 정치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임보가 죽고 난 후에 양귀비의 사촌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는데 현종은 양국충뿐 아니라 양귀비의 언니들 세 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하고, 그 친척들을 고관으로 임명하는 등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2]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과정[편집]
-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 756년 1월 안녹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한다.
- 756년 6월 장안(長安)을 점령한다.
- 756년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한다.
- 757년 위구르족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한다. 1월 안녹산은 그의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사형당한다.
- 759년 안경서가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사형당한다.
- 761년 사사명이 맏아들 사조의에게 사형당한다.
- 762년 당 현종이 사망한다.
- 763년 사조의의 자살로 난이 평정된다.
영향[편집]
인구 감소로 인한 당나라의 쇠퇴[편집]
안사의 난으로 8년 간의 전란에 시달려 많은 농민들이 죽고, 나라의 정치 제도는 무너지게 되며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된다. 또한 위구르족 등 이민족에 의해 수도 장안이 함락되면서 당나라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황폐해진다.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 호로 13년 전의 890만 호에 비해 70%의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753년 52,880,488명의 인구가 764년에는 16,900,000명으로 기록되었다.
상업과 국가 재무회계의 발달[편집]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난 이후로 경제가 발달하여 재정이 복잡해 지자, 탁지낭중의 지위가 향상하여 탁지사(度支使)라 하게 되고, 재무관청인 탁지(度支)가 호부(戶部), 염철(鹽鐵)과 함께 재정을 취급하는 3개의 중요 기관이 된다.[3]
절도사 세력의 성장[편집]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당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제도와 지배력등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황소의 난으로 인해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4]
각주[편집]
- ↑ Sorokin, Pitirim: The Sociology of Revolution, New York, H. Fertig, 1967, OCLC 325197 - cited by White
- ↑ 네이버 지식백과
- ↑ “재정법제연구(I) 의회·행정부 관계와 예산권한 배분에 관한 연구”. 연구보고서. 한국법제연구원. 2018년 10월 31일. ISBN 9788966848898.
-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