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1896년)
박영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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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12월 28일 조선 충청남도 부여군 |
사망 | 1930년 (35세) 소련 연해주 프리모르스키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고루지게 촌에서 암살됨. |
성별 | 남성 |
직업 | 독립운동가, 군인 |
군복무 | 대한독립군 영관 장교 출신 |
정당 | 무소속 |
박영희(朴寧熙, 1896년 ~ 1930년)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검추(劍秋). 아명은 박두희, 박영섭이다. 일명은 박초변이다.
생애[편집]
항일투쟁[편집]
1915년 이시영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교관, 학도감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대한정의단이 무장독립투쟁 수행을 위해 대한군정부의 간부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에서 학도단장을 지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4년 1월에 대한독립군단, 5월에 북로군정서의 행정부장으로 지냈고 1925년 3월 베이젠다오의 닝안에서 신민부가 조직될 때 김좌진, 남성극, 유현 등과 같이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참가하였고, 신민부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활동에 주력하며 신민부가 목릉현, 소추풍에 설립한 성동사관학교에서 백종렬과 함께 교관으로서 독립군을 양성에 힘썼다.
최후[편집]
1930년 소련으로부터 항일운동 협조를 받기 위해 신민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되었다가 1927년 게빼우에 체포되어 1930년 고루지게에서 공산당에게 피살되었다.
사후[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 은산 박영희 가옥 - 부여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