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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문앙은 직접 지휘해서 싸우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7년 동안 아무도 제압하지 못해서 진나라로서는 골칫거리였던 [[독발수기능]]을 제압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문앙은 직접 지휘해서 싸우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7년 동안 아무도 제압하지 못해서 진나라로서는 골칫거리였던 [[독발수기능]]을 제압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문앙의 무예는 당대 최강으로 삼국지에서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손견]](孫堅), [[손책]](孫策), [[조운 (촉한)|조운]](趙雲), [[여포]](呂布) 등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고 .
문앙의 무예는 당대 최강으로 삼국지에서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손견]](孫堅), [[손책]](孫策), [[조운 (촉한)|조운]](趙雲), [[여포]](呂布) 등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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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앙의 친족관계==
==문앙의 친족관계==

2012년 12월 25일 (화) 00:36 판

문앙(文鴦, 238년~291년 3월 8일)은 중국 진나라의 장수이며, 자는 차건(次騫).관구검(毌丘儉), 제갈탄(諸葛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문흠(文欽)의 아들이자 문호(文虎)의 형이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의하면 본명이 문숙(文淑)이고, 어렸을 때의 이름은 (鴦)이라고 했으며, 《삼국지연의》에서도 문흠이 문앙을 관구검에게 이야기할 때 문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삼국지연의》 내용이나 《삼국지》, 《자치통감(資治通鑑)》등의 역사 기록에서는 모두 문숙이 아닌 문앙으로 기록하였다. 문앙의 무예는 제갈량(諸葛亮)의 사망 시점 이후 천하통일까지 당대 최강이었다고 한다.

생애

255년 봄에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나라에서는 우선 연주자사 등애(鄧艾)를 보내어 반란군을 막게 하였다. 등애는 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낙가성(樂嘉城)에 도착하여 부교를 놓고 사마사(司馬師)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는데, 이는 위군의 숫자를 적게 보이게 하고 반란군을 끌어들이려는 술책이었다. 문흠은 반란군에 비해 위군의 수가 적은 것을 보고 낙가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마사의 대군이 당도해 있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스러워 했다.

문앙은 이때 겨우 18세였는데, 문흠에게 사마사의 진압군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문흠은 전군을 둘로 나누고 문앙을 선봉으로 삼아 밤에 사마사의 진영을 공격했는데, 문앙이 닥치는데로 적을 사살하며 용맹을 떨치니 사마사의 진영이 혼란에 빠졌다. 사마사가 크게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병을 앓던 눈알이 튀어나오자, 다른 사람들이 알까 두려워서 이불을 악물고 참았다. 그러나 문흠이 제때 문앙을 도와주지 못하자 군사들을 이끌고 후퇴했다.

사마사가 좌장사(左長史) 사마반(司馬班)에게 기병 8천으로 쫓게 하자, 문앙은 혼자 적군 속에 뛰어들어 100여 명을 죽이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100여 명을 죽이고, 이와 같은 행동을 수차례 되풀이하자 위군 병사들이 두려워하여 더 쫓지 못하고 돌아왔다. 문앙은 이 때의 활약으로 인해 위나라에 "조운(趙雲)이 재림했다"는 소문이 나게 했다. 그러나 문흠의 군사는 끝내 사마사에게 패하고 말았다. 문흠이 마침 동흥(東興)에 나와 있던 오나라의 실권자 손준(孫峻)에게 항복하자, 아버지를 따라 오나라로 갔다.

257년 위나라의 정동장군 제갈탄(諸葛誕)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면서 구원을 청하자, 손침(孫綝)의 명령으로 아버지 문흠과 함께 제갈탄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문흠제갈탄과 사이가 벌어져 죽임을 당하자, 소성(小城)에 주둔하고 있던 문앙은 동생 문호(文虎)와 함께 성을 넘어와 사마소(司馬昭)에게 항복하였다. 사마소는 문앙이 형 사마사의 병을 악화시켜 죽게 만든 일을 기억하고 있었으나, 수춘 함락에 이용할 목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여 장군으로 삼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했다.

문앙은 문호와 함께 수춘성 주변을 돌며 항복을 권유하였다. 반란군 병사들은 사마소가 원한을 가졌던 문앙이 벼슬을 받은 것을 보고 크게 동요하여 항복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사마소가 수춘성에 가까이 와도 활을 쏘지 않았다. 반란군의 사기가 크게 꺾인 것을 본 사마소가 총공격을 가하자 수춘성은 금세 함락되었다.

천하통일 이후

270년 선비족의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 호열(胡烈)의 군사를 격파하여 호열이 전사하고, 271년 양주(凉州)의 이민족들과 호응하여 양주자사 견홍(牽弘)이 이끄는 군사를 청산(靑山)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켜 견홍 역시 죽었다. 이로 인해 양주 지역은 이민족과의 싸움으로 수년 동안 혼란스러워졌다.

277년 문앙은 평로호군(平虜護軍)이었는데, 양주와 옹주(雍州)의 군사들을 이끌고 독발수기능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이민족 20만 명이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후 양주 지역이 안정을 되찾았다. 7년동안 아무도 진압하지 못했던 독발수기능의 난을 문앙이 진압하자 문앙은 용맹으로서뿐만 아니라 병력지휘능력 역시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291년 3월 8일 문앙은 동안공(東安公) 사마요(司馬繇)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사마요는 낭야왕(琅邪王) 사마주(司馬伷)의 아들인데, 사마주의 아내가 제갈탄의 딸이므로 제갈탄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사마요는 문앙의 항복이 수춘성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려 성이 함락되고 제갈탄이 죽은 일과, 오나라에 인질로 갔던 제갈정이 오나라가 멸망한 후 초야에 묻혀 지내다 죽은 일로 문앙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최후

사마요는 황후 가남풍(賈南風)의 명령으로 3월 8일 정변을 일으켜 당시 진나라의 실권자였던 양준(楊駿)과 양준을 따르던 사람들을 죽였다. 이날 사마요의 판단에 의해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는데, 문앙은 사마요에 의해 양준 일파로 몰려 죽고 문앙의 삼족 역시 화를 당했다. 이때 문앙은 동이교위(東夷校尉)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인물평

문앙은 문흠의 차남으로 거의 항상 바로 아래동생인 동생 문호와 같이 행동했다. 문앙은 어렸을 때부터 주먹솜씨로 명성을 날렸으며 문흠이 사는 지역에서는 문앙의 싸움솜씨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문흠제갈탄과 손을 잡고 사마씨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제갈탄의 군세에서 선봉장은 다름아닌 문흠의 아들 문앙이었다. 문흠의 군대가 패주했을 때도 문앙은 혼자 사마사의 군대를 휘젓고 다니면서 사마사의 병력들을 닥치는 대로 사살했는데 아무도 문앙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문앙은 직접 지휘해서 싸우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7년 동안 아무도 제압하지 못해서 진나라로서는 골칫거리였던 독발수기능을 제압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문앙의 무예는 당대 최강으로 삼국지에서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손견(孫堅), 손책(孫策), 조운(趙雲), 여포(呂布) 등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문앙의 친족관계

관련 인물

문호 문흠

《삼국지연의》에서의 문앙

삼국지연의에서는 문앙을 8척 장신의 사내이며, 구리 채찍과 장창을 휘두르며 싸우는 소년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사마소에게 항복할 때 정사 삼국지를 비롯한 역사기록에서는 사마소가 문앙을 죽이라는 말을 물리치고 벼슬을 주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사마소가 문앙을 죽이려 하다가 종회(鍾會)의 권유로 항복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와 있다.

틀:삼국지 중요 등장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