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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문으로 들어가면 능원의 정원과 함께 능은전이 있다. 이곳은 제왕의 위패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궁전으로 황릉의 중심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능은전 옆에는 비정(碑亭)이 있는데, 사격형의 정자로 비정의 네 모서리에는 화표라는 돌기둥이 있다. 내부에는 석비가 있다. 장릉 내의 석비는 크기가 6m에 달한다. 능은전 뒤로는 영성문이 있는데, 패루문이라 칭하기도 한다.
능은문으로 들어가면 능원의 정원과 함께 능은전이 있다. 이곳은 제왕의 위패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궁전으로 황릉의 중심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능은전 옆에는 비정(碑亭)이 있는데, 사격형의 정자로 비정의 네 모서리에는 화표라는 돌기둥이 있다. 내부에는 석비가 있다. 장릉 내의 석비는 크기가 6m에 달한다. 능은전 뒤로는 영성문이 있는데, 패루문이라 칭하기도 한다.


====명루와 보성===
===명루와 보성===
명루는 능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명루 내에는 거대한 석비가 있다. 명루 앞에는 석오공(石五供)이라는 석물이 있는데, 석오공은 상징적 재물이었다. 성조의 장릉에는 돌로 만든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릉의 명루는 겹처마로 산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은 황릉의 봉분을 벽돌로 둘러 싼 원형 담장이다. 보성과 명루는 하나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보성 내에는 지하궁전이 있어 그곳에 황제와 황후의 시신을 매장했다. 발굴된 정릉의 지하궁전은 정·중·후 및 좌우의 5개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에 있지만, 기둥이 없는 아치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하궁전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옷과 장신구, 각종 진귀한 문물이 보관되어 있었다.<ref>웨난, 《황릉의 비밀》, 일빛, 2000, 280~304p</ref>
명루는 능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명루 내에는 거대한 석비가 있다. 명루 앞에는 석오공(石五供)이라는 석물이 있는데, 석오공은 상징적 재물이었다. 성조의 장릉에는 돌로 만든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릉의 명루는 겹처마로 산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은 황릉의 봉분을 벽돌로 둘러 싼 원형 담장이다. 보성과 명루는 하나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보성 내에는 지하궁전이 있어 그곳에 황제와 황후의 시신을 매장했다. 발굴된 정릉의 지하궁전은 정·중·후 및 좌우의 5개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에 있지만, 기둥이 없는 아치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하궁전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옷과 장신구, 각종 진귀한 문물이 보관되어 있었다.<ref>웨난, 《황릉의 비밀》, 일빛, 2000, 280~304p</ref>



2012년 11월 6일 (화) 20:10 판

명십삼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신도

명십삼릉(明十三陵)은 중국 베이징 창평구 천수산에 있다 명대 황제, 황후의 능묘군이다. 성조 영락제 이후의 황제 13대의 능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통칭되고 있다.

이 중 정릉은 발굴되어 내부 지하 궁전도 공개되고 있다.명십삼릉은 난징의 명효릉과 함께 2003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개요

명나라에는 총 16명의 황제가 있으나, 베이징의 명십삼릉에는 13개의 능묘만 있다. 몇 개의 능묘이 존재하지 않은 이유는 각기 다르다. 명조 개국 황제 주원장은 도읍을 난징에 건설했는데, 그의 사후에 난징의 종산에 있는 명효릉에 장사를 치렀다. 주원장의 장손자인 건문제 주윤문은 연왕 주체에게 정난지변을 통해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에 능묘가 없다. 대종 경태제 주기옥도 황제였으나 폐위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고 경태릉(景泰陵)으로 불렸으며 현재 베이징 근처에 묻혀 있다.

명 황릉의 구조

명나라의 황제릉은 황제가 죽고난 뒤 살아가는 지하궁전을 형상화한 것으로 자금성과 유사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능으로 들어가는 신로의 길이만 해도 3km에 이를 정도이고, 조선왕릉의 정자각과 같이 능침에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하는 능은전은 자금정의 정전인 태화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그 규모가 웅장하다.

능외 공간

신로

첫번째 능문 앞로 들어가는 길로 정릉의 신로는 칠공교(七孔橋)와 삼공교(三孔橋), 금수교(金水橋)를 건너 능원 앞에 있는 무자비(無字碑)까지 연결된다. 신로는 수 km의 거리에 폭은 약 7m 정도 되고, 도로면에는 청석판이 깔여 있으며, 양 옆으로 돌을 쌓아 경계를 삼았다. 다만, 발굴된 정릉의 신로는 현대에 와서 삼공교와 같이 소실되었고, 교량 흔적만이 남아 있다. 신로 양 편에는 '석상생(石象生)'이라 하는 18쌍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황제릉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홍유릉은 명나라 황릉의 이러한 부분을 참고하여 조성하였다.

대홍문 앞

무자비(無字碑)는 말 그대로 글자가 새겨져있지 않는 비석으로 첫 번째 능문 앞에 위치해 있으며, 이무기 머리에 거북이 다리를 가진 대형 석비이다. 명13릉의 여느 능 앞에도 대형 석비가 있는데, 성조의 신공성성덕비(神功聖德碑)가 적힌 대형 석비를 제외하고서는 그 어떠한 비에도 글자가 없다. 이는 , 시대와 현대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사료에 따르면 본래 장릉, 헌릉, 경릉, 유릉, 무릉, 태릉, 강릉 등 일곱 능문 앞에는 비석이 없었으며, 가정제 때 와서야 비로소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예부상서 엄숭은 황제에게 7개의 비문을 적을 것을 청한 바가 있었으나, 가정제는 이를 거절했다. 가정제가 비를 쓰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흥헌왕을 추숭하는 것과 주색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13릉 앞의 비문이 텅 비었다는 것이다.[1]

능내 공간

능 외곽을 눌러싼 성벽은 본래

대홍문(大紅門)과 능은문

능원의 첫 번째 문인 대홍문은 대궁문(大宮門)이라고도 하는데, 능원의 정문의 역할을 한다. 문 양쪽에는 두 개의 각문이 설치돼 있다. 두 번째 문은 능은문이 있다. 능은문의 두 언덕은 궁의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능은문 양 쪽으로 곁문이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능은전과 영성문

능은문으로 들어가면 능원의 정원과 함께 능은전이 있다. 이곳은 제왕의 위패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궁전으로 황릉의 중심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능은전 옆에는 비정(碑亭)이 있는데, 사격형의 정자로 비정의 네 모서리에는 화표라는 돌기둥이 있다. 내부에는 석비가 있다. 장릉 내의 석비는 크기가 6m에 달한다. 능은전 뒤로는 영성문이 있는데, 패루문이라 칭하기도 한다.

명루와 보성

명루는 능내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명루 내에는 거대한 석비가 있다. 명루 앞에는 석오공(石五供)이라는 석물이 있는데, 석오공은 상징적 재물이었다. 성조의 장릉에는 돌로 만든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릉의 명루는 겹처마로 산정에 세워져 있다. 보성은 황릉의 봉분을 벽돌로 둘러 싼 원형 담장이다. 보성과 명루는 하나의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보성 내에는 지하궁전이 있어 그곳에 황제와 황후의 시신을 매장했다. 발굴된 정릉의 지하궁전은 정·중·후 및 좌우의 5개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하에 있지만, 기둥이 없는 아치식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하궁전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옷과 장신구, 각종 진귀한 문물이 보관되어 있었다.[2]

피장자

  1. 성조 영락제 - 장릉(長陵) - 공개
  2. 인종 홍희제 - 헌릉(獻陵)
  3. 선종 선덕제 - 경릉(景陵)
  4. 영종 정통제 - 유릉(裕陵)
  5. 헌종 성화제 - 무릉(茂陵)
  6. 효종 홍치제 - 태릉(泰陵)
  7. 무종 정덕제 - 강릉(康陵)
  8. 세종 가정제 - 영릉(永陵)
  9. 목종 융경제 - 소릉(昭陵) - 공개
  10. 신종 만력제 - 정릉(定陵) - 공개
  11. 광종 태창제 - 경릉(慶陵)
  12. 희종 천계제 - 덕릉(德陵)
  13. 의종 숭정제 - 사릉(思陵)

주석

  1. 웨난, 《황릉의 비밀》, 일빛, 2000, 274~279p
  2. 웨난, 《황릉의 비밀》, 일빛, 2000, 280~3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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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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