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범: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Ryuch (토론 | 기여)
Kenia12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4번째 줄: 4번째 줄:
|그림 = 徐光範.png|thumb|right|180px|
|그림 = 徐光範.png|thumb|right|180px|
|그림설명 =
|그림설명 =
|출생일 = [[1859년]]
|출생일 = 1859년
|출생지 = [[조선]]
|출생지 = [[조선]]
|사망일 = [[1897년]] (38세)
|사망일 = 1897년 (38세)
|사망지 = {{국기나라|미국}}
|사망지 = {{국기나라|미국}}
|국적 = {{국기나라|조선}} → {{국기나라|미국}}
|국적 = {{국기나라|조선}} → {{국기나라|미국}}
19번째 줄: 19번째 줄:
|소속 =
|소속 =
}}
}}
'''서광범'''(徐光範, [[1859년]] ~ [[1897년]])은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이며 [[개화파]] 사상가이다. 자는 서구(敍九), 아호는 위산(緯山)이며, 본관은 [[달성 서씨|달성]](達城)이다. 사후에 추서된 사시(私諡)는 익헌(翼獻)이다. 미국식 이름은 Kenneth Suh이다. 증조부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서광범'''(徐光範, [[1859년]] ~ [[1897년]])은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이며 [[개화파]] 사상가이다. 자는 서구(敍九), 아호는 위산(緯山)이며, 본관은 [[달성 서씨|달성]](達城)이다. 사후에 추서된 사시(私諡)는 익헌(翼獻)이다. 미국식 이름은 '''Kenneth Suh'''이다. 증조부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 생애 ==
== 생애 ==

2012년 9월 29일 (토) 15:10 판

서광범
徐光範
출생1859년
조선
사망1897년 (38세)
미국의 기 미국
사인폐병
성별남성
국적조선의 기 조선미국의 기 미국
별칭미국식 이름은 Kenneth Suh
자는 서구(敍九)
아호는 위산(緯山)
시호는 익헌공(翼獻公)
직업문신, 정치가.
부모서상익(부)
친척서재필(족질), 서재창(족질)

서광범(徐光範, 1859년 ~ 1897년)은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가이며 개화파 사상가이다. 자는 서구(敍九), 아호는 위산(緯山)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사후에 추서된 사시(私諡)는 익헌(翼獻)이다. 미국식 이름은 Kenneth Suh이다. 증조부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서용보(徐龍輔)이다.

생애

배경과 초기 생애

서광범은 1859년 조선 고급 관료의 양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서용보이며,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이다.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규장각 대교·검교, 홍문관 부수찬·부응교, 세자시강원 사서·필선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조선 말기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 오경석(吳慶錫), 유홍기(劉鴻基,) 등의 영향을 받아 개화사상이 강하였고, 1879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등과 개화당을 조직하였다. 1882년 4월 김옥균과 함께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였고, 9월에는 또다시 박영효의 종사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신진 문물을 견학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일본 체류중 촬영한 사진
(뒷줄 왼쪽이 서광범, 맨 왼쪽은 박영효, 그 뒤는 서광범, 우측 두번째가 서재필, 우측 앞이 윤치호
(1883년)

1883년 6월에는 보빙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시찰하였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후 1년 만에 귀국하였다(1884. 6). 그 영향을 받아 서양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았고, 개화사상 역시 남달리 강하였다.

갑신 정변과 망명

1884년 12월에는 당시 고급 양반 자제 출신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등 젊은 개화파들과 합세하여 보수정권을 타도하고 근대식 개혁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거사하였다. 갑신정변은 이른바 ‘우정국사건’이라고도 하는데, 우정국(郵政局) 개국식을 하는 행사 시간을 이용하여 궁중에 불을 지르고 소란스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고급 관료들을 현장에서 살해하는 거사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혁신정부의 조직을 발표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서광범은 ‘좌우영사겸우포장’,‘대리외무독판’(代理外務督辦)직을 맡았다. 그러나 거사 계획의 부실과 외세와의 연계가 견고하지 못하여 청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천하’의 실패로 끝나자, 일본 세력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있는 동안 본국정부의 소환령과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위태로움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1885. 5).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은 비교적 안전하였다. 미국 동부지역에서 거주하면서 1892년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미연방정부의 교육국에서 번역관으로 일하였다. 미국 정부기관지와 일반 잡지에 조선교육론 과 조선민담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갑오 개혁과 실각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외무성의 도움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894년 12월에 제2차 김홍집 친일내각이 서자 법부대신으로 기용되었다. 1895년 1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조선 국적을 회복하였다. 그 후 내부대신인 박영효와 제2차 갑오개혁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때 사법제도의 근대화에 노력하여, 재판소 구성법, 법관양성소 규정 등을 제정하고, 당시 극형제도이던 참형이 비인도적임을 지적하여 교수형(絞首刑 목을 메어 사형시키는 것)제도로 대체하였다. 제4차 김홍집내각(1895. 10)에서는 학부대신에 기용되었다가, 12월에는 주미특명전권공사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 2)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서자 곧 현지에서 해임되었다.

해임된 후, 당시에는 천역으로 알려진 폐병이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1897년 미국에서 일생을 마쳤다. [1]

참고 주석

  1. 緯山 徐光範 硏究(위산 서광범 연구)박재우 지음

관련 항목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