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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후반부 ==
== 생의 후반부 ==
유표가 죽은 뒤, 조카 [[유종 (후한)|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도주하여 유비를 의탁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남 4군을 공략하는 것에 참여했다. 금선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며, 한현은 유반의 얼굴을 확인하고 항복했다. 유도와 조범은 유반의 추천으로 영릉 태수가 되었었으나 그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으며 유도는 그를 조롱하였으나 마음에 담지 않았다. 조범은 유반의 권유를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반을 두려워하다가 조조에게로 도주했다.
유표가 죽은 뒤, 조카 [[유종 (후한)|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도주하여 유비를 의탁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남 4군을 공략하는 것에 참여했다.<ref>촉기에는 장사 공략 이후에 황충이 천거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후한서에서는 이와 대치된다.</ref> 금선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며, 한현은 유반의 얼굴을 확인하고 항복했다. 유도와 조범은 유반의 추천으로 영릉 태수가 되었었으나 그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으며 유도는 그를 조롱하였으나 마음에 담지 않았다. 조범은 유반의 권유를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반을 두려워하다가 조조에게로 도주했다.


유반은 212년까지 살았으며, 211년, 한현이 죽은 뒤 장사태수를 지냈으나 오래지 않아 병이 들어 사임했다. 유반이 죽은 뒤에 오에서는 조문의 사자를 파견했으며, 자식으로는 아들 둘과 딸이 있었으나 장남은 요절했다. 관우가 죽은 뒤 형주에 그대로 남아있던 자식들은 오에 투항했으며, 차남은 리(李)로, 오에서의 관직은 후장군에까지 올랐다. 딸은 손권의 둘째 아들인 [[손려]](孫慮)의 처가 되었다.
유반은 212년까지 살았으며, 211년, 한현이 죽은 뒤 장사태수를 지냈으나 오래지 않아 병이 들어 사임했다. 유반이 죽은 뒤에 오에서는 조문의 사자를 파견했으며, 자식으로는 아들 둘과 딸이 있었으나 장남은 요절했다. 관우가 죽은 뒤 형주에 그대로 남아있던 자식들은 오에 투항했으며, 차남은 리(李)로, 오에서의 관직은 후장군에까지 올랐다. 딸은 손권의 둘째 아들인 [[손려]](孫慮)의 처가 되었다.

2012년 7월 23일 (월) 18:32 판

유반(劉磐, ? ~ 212년)는 후한 말기 형주자사 유표(劉表)의 조카이다.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 사람이다.

생애 전반부

젊을 무렵부터 용맹하고 의로워 명성이 높았다. 약관에 이르렀을 때, 현에 악명 높던 황건적들이 쳐들어오자 그 누구도 맞서 싸우려하지 않고 도망가려 하였으나 친우들의 도움을 받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거육마를 세워 공간을 좁히고 홀로 창을 들고 막아섰다. 마을의 입구에 도달한 황건적의 두목은 장건한 소년 혼자만이 입구를 막고 있자 무언가 꾸민 것이 있을까 두려워 쉬이 접근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두목을 향해 유반이 호통을 치자 그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친우들이 일제히 횃불을 들고 두목을 향해 활을 겨눴으므로 황건 두목은 유반에게 사죄하고 물러났다. 이를 눈여겨 본 유표의 식객이었던 경승(耿昇)이 그를 조정에 무재로 천거하여 교위의 직책에 임명되었다.[1]

황건의 난이 끝나고 유표가 공적에 따라 형주자사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형주로 갔다. 187년, 형남에서 구성(區星)이 장군을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켜 장사를 포위하자 이에 조정에서는 서주에 있던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이를 토벌케했다. 손견은 원술(袁術)의 휘하에 의탁하고 있었으므로 원술과 대립하던 유표는 그의 길을 막아 파면을 유도하는 한편, 군량도 일절 지급하지 않아 최소한의 군량으로 이동하던 손견은 난관을 겪었다. 이에 보다 못한 유반이 나서서 유표를 설득했다.

"손견은 조정의 명을 받아 적도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습니다. 숙부께서 비록 그의 주인인 원공과 대립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적인 일입니다. 그에 비해 손견은 칙령을 받아 공적인 일로 움직이니, 후에 화가 숙부께 돌아가게 될까 두렵습니다. 또한 손견은 무예와 지략으로 이름 높으니 그가 숙부께 원한을 가져 적이 된다면 근심거리가 될터이니,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잊지 못하게 하십시오."

유반의 말을 들은 유표는 크게 깨닫고 손견에게 길을 열어주게 하였으며 유반으로 하여금 손견에게 군량과 보급을 지원해주도록 했다. 손견은 이에 마음놓고 휴식을 취하고 이동하였으며 유반이 힘써준 것을 들은 손견은 남군까지 마중나온 유반에게 감사하며 그에게 자신의 준마를 내어주려 했으나 유반은 거절했다.

"지금 장군은 전장으로 가는 토벌군입니다. 제가 장군이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으나 이는 나라를 위함이지 장군 개인을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장군은 전장에 나가는 몸이므로 군마는 자신의 몸과 같은데 어찌 말을 내어주려 하십니까. 저는 받을 수 없으니 계속 권하신다면 이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유반의 말을 들은 손견은 자신이 과했음을 사과하고 군을 이끌어 구성을 토벌했다. 장사에 근거지를 마련한 손견은 다시 자신의 준마를 유반에게 선물했다. 손견이 완강했으므로 유반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반동탁 연합이 있은 후 손견이 귀환하려 하였을 때는 그가 손견과 친분이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유표가 그의 친분을 앞세워 손견을 사로잡게 하여 손견을 공격하는 대장으로써 참여했다. 길목에서 손견이 그를 원망하자 유반은 고개 숙여 그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장군에게 준마까지 선물 받았으나, 천하가 장군에게 향하는 의심은 거둬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의 숙부는 연합에 소속되어 있고, 연합의 의지는 숙부에게 장군의 결백을 밝히라 하니, 지금은 저는 공적인 입장입니다. 저의 입장으로는 장군께 이번에는 길을 내어드릴 수 없으니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손견은 그 말에 유반을 향한 원망을 거두고 양쪽이 모두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유반은 서전에서 패했으나 결국 손견을 격파했다. 손견은 탈출하여 장사로 돌아갔다.

생의 중반부

유반에 대한 원망은 거뒀으나 친분을 앞세워 공격하게 한 유표에 대한 원망은 계속해서 키우던 손견은 결국 192년, 유표를 공격했다. 유반은 상용을 제압하러 나가있었으므로[2], 손견과 상대하지 못했다. 상용을 제압하고 얼마 있지 않아 손견이 양양을 포위했다는 말에 귀환하던 유반은 손견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양으로 돌아와 칩거했다. 포로가 된 황조(黃祖)와 손견의 시신의 맞교환이 성사되자 손견의 시신을 운구하는 것에 자청하여 만난 손책에게 조의를 표했다. 후에 손책이 방랑하여 원술에게 의지하려 하였을 때 황조가 이를 공격하려는 것을 그가 죽은 손견과 교환되었음을 상기시켜 이를 만류했다.

197년, 손책이 유요(劉繇)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유요가 예장으로 밀려나자 유반은 황실의 종친끼리의 다툼은 옳지 못하므로, 유표가 예장 태수로 임명한 제갈현이 유요를 지원하는 주호와의 대립을 멈추고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무시당했다. 제갈현은 유요와 협력한 주호에게 격파당해 돌아왔다.[3][4] 후에 유반은 남군을 비롯한 형남 4군을 유표의 세력에 넣는데 채모(蔡瑁)와 함께 지대한 공을 세워 관직이 군사장군에 이르렀다.[5]

200년, 손책이 죽고 손가의 세력이 불안정해지자 유표의 지시에 따라 문빙(文聘)과 황충(黃忠)을 부장으로 시상과 예장, 단양을 공격했다. 예장에서 오경을 격파하고 단양에서 능조를 격파했으나 시상은 수개월간 제압하지 못했다. 결국 이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태사자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귀환했다.[6] 201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유표를 의탁해오자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유표를 설득했으며, 유비에게 나후(羅侯)의 구씨(寇氏)의 아들 유봉(劉封)을 양자로 권했다. 203년, 다시 황조와 연합하여 시상을 공격하여 태사자를 격파했으나 군세를 정비해 역공해온 태사자에게 격파당했다. 204년, 다시 군을 모아 장사의 한현, 강하의 황조와 연합해 단양을 공격했으나 한당과 태사자의 협공에 패했다. 205년, 채모의 협조를 받아 다시 문빙 등을 부장으로 삼아 손가를 공격하여 예장에서 동습마충을 격파하고 예장을 세력에 편입시켰다. 207년, 다시 손가를 공격하려 했으나 황조가 손권과의 싸움에서 패해 전사했으므로 단념하고 유기의 강하태수 부임 요청을 유표를 설득하여 허락하게 했다.

생의 후반부

유표가 죽은 뒤, 조카 유종(劉琮)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도주하여 유비를 의탁했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남 4군을 공략하는 것에 참여했다.[7] 금선을 설득하여 항복시켰으며, 한현은 유반의 얼굴을 확인하고 항복했다. 유도와 조범은 유반의 추천으로 영릉 태수가 되었었으나 그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으며 유도는 그를 조롱하였으나 마음에 담지 않았다. 조범은 유반의 권유를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해 유반을 두려워하다가 조조에게로 도주했다.

유반은 212년까지 살았으며, 211년, 한현이 죽은 뒤 장사태수를 지냈으나 오래지 않아 병이 들어 사임했다. 유반이 죽은 뒤에 오에서는 조문의 사자를 파견했으며, 자식으로는 아들 둘과 딸이 있었으나 장남은 요절했다. 관우가 죽은 뒤 형주에 그대로 남아있던 자식들은 오에 투항했으며, 차남은 리(李)로, 오에서의 관직은 후장군에까지 올랐다. 딸은 손권의 둘째 아들인 손려(孫慮)의 처가 되었다.

주석

  1. 유표의 자가 경승(景升)이었으므로, 이는 실제로는 유표가 천거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유반이 남군태수가 된 것은 196년 이후이다.
  3. 오서 4절 유요태사자사섭전
  4. 후한서 허소전
  5. 199년에 이르러서야 장사로 침탈해온 동습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유표가 형남 4군을 온전히 손에 넣은 것은 197년 ~ 199년 사이로 추측된다.
  6. http://www42.tok2.com/home/sonpoko/taisigi.html
  7. 촉기에는 장사 공략 이후에 황충이 천거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후한서에서는 이와 대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