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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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 스이코 조정(593 ~ 628년) ===
=== 긴메이 조정 (539년 ~ 571년) ===
[[성왕 (백제)|성왕]](재위 523 ~ 554년)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ref> {{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꺾쇠표= 예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 89-5645-088-9|쪽= 28 |인용문=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ref>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세계 종교사 입문 | 저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꺾쇠표 =예|연도= 2003 |출판사=청년사 |쪽= 229 |id=ISBN 89-7278-376-5 |인용문=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ref>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 <ref>{{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꺾쇠표= 예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 89-349-1654-0 |쪽= 74 |인용문 =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 </ref><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꺾쇠표= 예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32-9 |쪽= 92 |인용문 =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 </ref>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꺾쇠표 =예|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九|卷第十九 欽明天皇]] |인용문=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ref>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ref>{{서적 인용 | 저자 = 고유섭 |제목= 구수한 큰맛 | 꺾쇠표= 예 |출판사=다할미디어 |연도=2005 |쪽=160 |id = ISBN 89-89988-24-1 |인용문 =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 </ref>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ref> {{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꺾쇠표= 예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 89-5645-088-9|쪽= 28 |인용문=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 </ref>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cw}}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538년]]에 [[백제]]의 [[백제 성왕|성왕]]이 석가불상과 경전 등을 일본에 보내 [[불교]]가 공인되고,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소가노 우마코]]가 대립하게 된다. 후의 [[쇼토쿠 태자]]는 [[소가 씨]] 편에 서서, [[모노노베 씨]]를 멸망시켰다. <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꺾쇠표= 예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329 |쪽= 87 |인용문 =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 </ref>모노노베 씨를 멸망시킨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소가 씨는 대신(大臣)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588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아스카데라|호코지]](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한다. <ref>{{서적 인용 |저자=허인순 등 |제목=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꺾쇠표= 예 |연도= 2009 |출판사=어문학사 |위치=|id=ISBN 9788961840927 |쪽= 128 |인용문 =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다. }} </ref>[[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노 코마]]에게 [[스슌 천황]]을 [[암살]]하게 하고, 여제 [[스이코 천황]]을 옹립한다. 우마야도 황자(쇼토쿠 태자)는 황태자로 세워지고 [[섭정]]이 되었다. <ref>{{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꺾쇠표= 예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 8934916540 |쪽= 78~79 |인용문 = 스순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자 소가노 우마코는 심복 야먀토아야노아타이 고마(東漢直駒)를 시켜 천황을 암살하고 30대 비다쓰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炊屋姫)황후를 즉위시켰다. 그녀가 제33세 스이코(推古) 여제인데, 소가노 우마코는 2차 불교 전쟁에 적극 가담했던 우마야도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뻘이었던 우마야도황자가 그 유명한 쇼토쿠(聖德)태자였다. }} </ref> 스이코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39~40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6세기 말 조정에서는 소가씨(蘇我氏)가 대립하고 있던 모노노베씨(物部氏)를 타도하고 이윽고 스슌(崇峻) 천황마저 살해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즉위한 여제 스이코(推古)는 쇼토쿠(聖德) 태자를 섭정으로 하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 </ref> 스이코 천황은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그리고, [[관위12계]]를 제정(604년)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는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한 관(冠)을 수여한 것이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40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이어서 관위 12계를 제정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관(冠)을 수여하였다.<sup>12)</sup>... 12)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고 관(冠)의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했다. }} </ref> 쇼토쿠 태자가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불교의 번성에 힘을 쏟는 등, 천황중심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는 초석을 쌓았다.

=== 스이코 조정(593년 ~ 628년) ===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소가노 우마코]]가 대립하게 된다. 후의 [[쇼토쿠 태자]]는 [[소가 씨]] 편에 서서, [[모노노베 씨]]를 멸망시켰다. <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1957년)|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꺾쇠표= 예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329 |쪽= 87 |인용문 =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 </ref>모노노베 씨를 멸망시킨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소가 씨는 대신(大臣)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588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아스카데라|호코지]](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한다. <ref>{{서적 인용 |저자=허인순 등 |제목=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꺾쇠표= 예 |연도= 2009 |출판사=어문학사 |위치=|id=ISBN 9788961840927 |쪽= 128 |인용문 =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다. }} </ref>[[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노 코마]]에게 [[스슌 천황]]을 [[암살]]하게 하고, 여제 [[스이코 천황]]을 옹립한다. 우마야도 황자(쇼토쿠 태자)는 황태자로 세워지고 [[섭정]]이 되었다. <ref>{{서적 인용 |저자=[[이덕일]] |제목=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꺾쇠표= 예 |연도= 2004 |출판사=김영사 |위치=|id=ISBN 8934916540 |쪽= 78~79 |인용문 = 스순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자 소가노 우마코는 심복 야먀토아야노아타이 고마(東漢直駒)를 시켜 천황을 암살하고 30대 비다쓰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炊屋姫)황후를 즉위시켰다. 그녀가 제33세 스이코(推古) 여제인데, 소가노 우마코는 2차 불교 전쟁에 적극 가담했던 우마야도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뻘이었던 우마야도황자가 그 유명한 쇼토쿠(聖德)태자였다. }} </ref> 스이코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39~40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6세기 말 조정에서는 소가씨(蘇我氏)가 대립하고 있던 모노노베씨(物部氏)를 타도하고 이윽고 스슌(崇峻) 천황마저 살해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즉위한 여제 스이코(推古)는 쇼토쿠(聖德) 태자를 섭정으로 하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 </ref> 스이코 천황은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그리고, [[관위12계]]를 제정(604년)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는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한 관(冠)을 수여한 것이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40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이어서 관위 12계를 제정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관(冠)을 수여하였다.<sup>12)</sup>... 12)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고 관(冠)의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했다. }} </ref> 쇼토쿠 태자가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불교의 번성에 힘을 쏟는 등, 천황중심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는 초석을 쌓았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견수사]]로서 [[수나라|수]]를 방문하여, 수의 황제에게 국서를 전달한다. 유학생, 유학승을 수에 유학시켜서 수의 문화를 크게 받아들여, 국가의 정치・문화의 향상에 노력했다. [[620년]]에는, 쇼토쿠 태자가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덴노키]], [[고쿠키]] 등을 편찬했다.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소가노 우마코|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천황을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천황]]이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 천황]](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 저자= 다카시로 고이치 |꺾쇠표 =예|연도= 2006 |출판사= 살림 |쪽= 14 |id=ISBN 8952205030 |인용문= 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덴노를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덴토가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ref>
[[607년]], [[오노노 이모코]]가 [[견수사]]로서 [[수나라|수]]를 방문하여, 수의 황제에게 국서를 전달한다. 유학생, 유학승을 수에 유학시켜서 수의 문화를 크게 받아들여, 국가의 정치・문화의 향상에 노력했다. [[620년]]에는, 쇼토쿠 태자가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덴노키]], [[고쿠키]] 등을 편찬했다.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소가노 우마코|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천황을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천황]]이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 천황]](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 저자= 다카시로 고이치 |꺾쇠표 =예|연도= 2006 |출판사= 살림 |쪽= 14 |id=ISBN 8952205030 |인용문= 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덴노를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덴토가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ref>

2012년 7월 4일 (수) 00:47 판

아스카 시대(틀:Ja-y; 비조시대)는 고훈 시대의 종말기와 겹치기도 하지만, 6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반에 걸쳐 아스카에 궁전, 도시가 세워진 시대를 가리키는 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의 하나이다. 이전엔 고훈 시대와 합쳐서 야마토 시대로 부른 시대가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스카 문화(飛鳥文化)와 하쿠호 문화(白鳳文化)가 개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왜국(倭国)에서 일본으로 국호를 변경했다고 한다.

불교가 한반도로 전래된 후 일본으로 전래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보수세력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소가 씨가 승리를 하였다. 천황의 섭정인 쇼토쿠태자는 불교를 후원하였고 604년에 만든 십칠조헌법에 불교에 관련된 내용이 있다. 소가 씨가 실각된 후 아스카 시대는 끝나게 된다.

일본은 아스카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아스카 시대의 불교 예술은 사원에 건축할 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사원이 아스카사와 나라외곽에 쇼토쿠 태자가 만든 호류사가 있다(호류사는 아스카 시대 후에 만들어졌지만 초기 불교 작품임).

명칭

현재의 나라 현 다카이치 군 아스카 촌근방에 해당하는 「아스카」에 궁전,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아스카 시대라고 하는 시대 구분은 원래 미술사건축사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말이다. 1900년전후에 미술학자 세키노 다다스오카쿠라 덴신에 의해 제안되어, 세키노는 다이카 개신까지를, 오카쿠라는 헤이조쿄 천도까지를 아스카 시대라고 하였다. 일본사에서는 보통 오카쿠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현재에도 미술사나 건축사 같은 분야에서는 세키노의 제안이 사용되어, 다이카 개신 이후를 하쿠호 시대(白鳳時代)라고 구별하기도 한다.

개요

긴메이 조정 (539년 ~ 571년)

성왕(재위 523 ~ 554년)때,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538년).[1] 이 불교의 전파를 기점으로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구분짓는다. 성왕은 긴메이 천황(재위 539년 ~ 571년)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냈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 [2] 불교의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은 큰 소용돌이에 빠졌다. 긴메이 천황과 소가노 마치의 후손이자 호족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불교를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이에 반대하였으므로, 긴메이 천황은 둘 사이에서 시달리게 되었다. [3][4] 그리고, 백제는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딸려서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견(552년)하였다.[5] 이 번개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에 기록될 정도이므로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6]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7]이렇게 성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도록 하였으며 성왕은 또한 의박사 ·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스이코 조정(593년 ~ 628년)

587년 천황이 불교에 귀의하여 모노노베노 모리야소가노 우마코가 대립하게 된다. 후의 쇼토쿠 태자소가 씨 편에 서서, 모노노베 씨를 멸망시켰다. [8]모노노베 씨를 멸망시킨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소가 씨는 대신(大臣)이 되어 권력을 잡았다. 588년에는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호코지(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한다. [9]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야마토노아야노 코마에게 스슌 천황암살하게 하고, 여제 스이코 천황을 옹립한다. 우마야도 황자(쇼토쿠 태자)는 황태자로 세워지고 섭정이 되었다. [10] 스이코 천황은 소가노 우마코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11] 스이코 천황은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그리고, 관위12계를 제정(604년)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는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한 관(冠)을 수여한 것이다.[12] 쇼토쿠 태자가 십칠조헌법을 만들어 불교의 번성에 힘을 쏟는 등, 천황중심의 이상적인 국가체제를 세우는 초석을 쌓았다.

607년, 오노노 이모코견수사로서 를 방문하여, 수의 황제에게 국서를 전달한다. 유학생, 유학승을 수에 유학시켜서 수의 문화를 크게 받아들여, 국가의 정치・문화의 향상에 노력했다. 620년에는, 쇼토쿠 태자가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덴노키, 고쿠키 등을 편찬했다.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천황을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천황이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 천황(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13]

국조제(国造制)가 늦어도 스이코 조정 즈음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국조(国造)란 왕권에 복속한 각지의 유력호족에게 부여한 일종의 호칭으로, 야마토 정권의 지방관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죠메이・코교쿠 조정

코토쿠 조정

텐치 조정

텐무・지토 조정

문화

아스카 문화(飛鳥文化)는 7세기 전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시기에 아스카(飛鳥) 지역에서 발달한 문화이다.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인데, 백제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결과였다. 백제에서 보낸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의 손에 의해 일본의 사찰들이 창건되었다. [14] 유교도교 등 외래 학문과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 국제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백제 유학자 왕인은 아스카 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5] [16] 소가노 우마코의 주도하에,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은 사찰, 호코지를 지었다. [17]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호코지에 살면서 포교하였다. [18] 이들은 본국인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불러오는 한편, 많은 도서를 수입하여 일본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했다. [19]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진상하고 강독한 것은 혜자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등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혜총 대사이다. 그리고 호류지의 그 유명한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20]

주석

  1.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백제는... 538년에는 불교를 전파했다. 
  2.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03). 《세계 종교사 입문》. 청년사. 229쪽. ISBN 89-7278-376-5. 일본에 불교가 도입된 것은 538년 C.E(일설에는 552년 C.E.)이다. 당시의 일본 왕 긴메이(欽明) 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또는 聖明王)이 사신과 함께 보내온 불상 및 불경을 받은 것이 그 시초였다. 이때 백제에서 건너온 물품 속에는 불교의 교리는 탁월하나 난해하고, 그것을 믿으면 무한한 복이 있을 것이라는 편지도 있었다고 한다. 
  3.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4쪽. ISBN 89-349-1654-0. 백제에서 전해 준 불교는 그 수용을 둘러싸고 왜국 조정에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온다. 긴메이천황과 호족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하려 했으나 또다른 호족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나카토미노 가마소(中臣鎌子)가 반대했다. 
  4.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92쪽. ISBN 89-86361-32-9. 그 당시(538년)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아버지)는 성왕이 보내준 금동석가상을 자신의 저택에 모셔다 놓고, 자택을 코우겐지〔向原寺 〕로 삼았다. 이 무렵 국신파였던 모노노베노 오코시 〔物部尾輿,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아버지〕대련(大連)이 조정에서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백제인 킨메이 천황은 본국에서 성왕이 불교 신앙을 권유했기 때문에 몹시 곤혹스러워졌다. 즉 불교 신앙에 열성적인 최고대신 소가노 이나메와 국신파인 제2위의 장관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양 파 사이에 끼여 적잖게 시달리게 되었다. 
  5. 卷第十九 欽明天皇〉. 《일본서기》. 720. 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6. 고유섭 (2005). 《구수한 큰맛》. 다할미디어. 160쪽. ISBN 89-89988-24-1. 원래 백제의 공예는 고도로 발달되었나니, 성왕 3년에 일본에 전한 번개(幡蓋)는 그 장엄함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일본 정사에 특히 그 기록이 실려 있는 것만 보더라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알겠고, ... 
  7.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8쪽. ISBN 89-5645-088-9. 552년에는 사원 건설을 위해, 많은 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의사나 음악가까지 파견하였다. 
  8. 홍윤기 (2000).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효형출판. 87쪽. ISBN 8986361329.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오랜 세월 인내와 투쟁 속에서 배불파(排佛派)의 우두머리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일당을 섬멸시킨 것이다. 
  9. 허인순 등 (2009). 《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어문학사. 128쪽. ISBN 9788961840927.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다. 
  10. 이덕일 (2004).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 김영사. 78~79쪽. ISBN 8934916540. 스순천황이 소가노 우마코의 전횡에 불만을 느끼자 소가노 우마코는 심복 야먀토아야노아타이 고마(東漢直駒)를 시켜 천황을 암살하고 30대 비다쓰천황의 부인이자 자신의 질녀인 도요미케가시히야히메(炊屋姫)황후를 즉위시켰다. 그녀가 제33세 스이코(推古) 여제인데, 소가노 우마코는 2차 불교 전쟁에 적극 가담했던 우마야도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 소가노 우마코의 손자뻘이었던 우마야도황자가 그 유명한 쇼토쿠(聖德)태자였다. 
  11.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39~40쪽. ISBN 89-86142-81-3. 6세기 말 조정에서는 소가씨(蘇我氏)가 대립하고 있던 모노노베씨(物部氏)를 타도하고 이윽고 스슌(崇峻) 천황마저 살해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즉위한 여제 스이코(推古)는 쇼토쿠(聖德) 태자를 섭정으로 하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의 협력을 얻어 내외의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해서 국정을 이끌어 갔다. 
  12. 연민수 (1998). 《일본역사》. 보고사. 40쪽. ISBN 89-86142-81-3. 우선 불교에 의한 국내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불교흥륭의 조를 공포했다. 이어서 관위 12계를 제정하여 개인의 재능과 공적에 따라서 지위를 정하고 그 상징으로서 관(冠)을 수여하였다.12)... 12) 유교의 덕목인 덕(德)․인(仁)․예(禮)․의(義)․지(智)를 취하여 이를 대소로 나눠 12계로 하고 관(冠)의 색과 장식에 의해 등급을 표시했다. 
  13. 다카시로 고이치 (200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 14쪽. ISBN 8952205030. 소가 가문은 소가노 이나메(蘇我 稲目, ? ~570), 우마코(馬子), ? ~626), 에미시(蝦夷, ?~645), 이루카(入鹿, ?~645)의 4대에 걸쳐 번성하여 그 세력이 덴노를 능가하게 되었다. 622년에 쇼토쿠 태자, 628년에 스이코 덴토가 죽자, 소가노 에미시는 자신이 추대한 조메이(舒明) 덴노(재위 629~641)를 억지로 즉위시킨 후,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저택을 지키게 하고 자기의 묘를 만드는 데 전국의 백성을 사적으로 부리며 그것을 ‘미사사기(陵, 원래 덴노의 묘를 부르는 말)’로 부르게 하는 등 신하로서의 도를 넘는 파행이 눈에 띄었다. 
  14. 남천우 (1997). 《유물의 재발견》. 학고재. 374쪽. ISBN 8985846302. 일본의 소위 아스카 문화는 6세기 말엽에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이며 초기의 일본 사찰들이 백제에서 보낸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의 손에 의해 직접 창건되었다는 것...은 모두 기록에서도 보는 바이다. 
  15. 송신용. 백제가 꽃피운 또 하나의 대역사 ‘일본 아스카 문화’. 대전일보. 2007년 10월 12일.
  16. 조명재. 영암 왕인문화축제 6일 개막… 문화행사 풍성. 경향신문. 2012년 4월 4일.
  17. 허인순 등 (2009). 《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어문학사. 128쪽. ISBN 9788961840927.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다. 
  18. 혜자〉.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2004. 惠慈(?-622) 고구려 말기의 승려. ....백제의 승려 혜총과 함께 596년 호코사(법흥사)가 세워지자 그 곳에 살면서 포교하였다. 
  19. 이은직 (2005). 《조선명인전》. 정홍준 역. 일빛. 29쪽. ISBN 8956450889. 596년에 장대한 호코지가 낙성되자 혜자와 혜총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본국인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불러오는 한편, 많은 도서를 수입하여 일본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했다. 
  20. 김윤식 (2003). 《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서울대학교출판부. 378쪽. ISBN 8952104676.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진상하고 강독한 것은 고구려 승려 혜자 대사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불당 ― 역자) 등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백제 승려 혜총 대사이다. 그리고 호류지의 그 유명한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