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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순(金福順),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1BUY_A9999_1_0008832&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의려(依慮)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 김복순(金福順),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1BUY_A9999_1_0008832&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의려(依慮)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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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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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 13:04 판
의려왕(依慮王, ? ~ 285년)은 부여(夫餘)의 왕으로 시호는 미상이다. 아버지인 마여왕의 뒤를 이어 6살의 어린 나이에 부여의 왕이 되었다. 서기 285년 선비족 모용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부여의 왕 "위구태(尉仇台)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위에 올랐다. 적자는 없고 서자 마여(麻余)만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여러 귀족들은 마여를 왕으로 세웠다."[1]라고 하였다. 또한 "마여가 죽으니 여섯 살 난 그의 아들 의려(依慮)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1]고 한다.
의려왕이 즉위한 후 곧 중국에서 위(魏)‧진(晉)이 교체되자, 진에 자주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며 친선을 꾀하였다. 서기 285년에 선비족(鮮卑族)의 모용외(慕容廆)가 부여에 쳐들어왔다. 의려왕은 모용외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여 자살하고, 그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망명하였다. 이때 부여는 모용외에 의하여 국토가 짓밟히고 1만여 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 노예로 팔렸다.
모용외가 돌아가자 옥저로 피신해 있던 의라(依羅)는 다음해인 서기 286년 남아 있는 부하들을 이끌고 부여로 돌아와 의려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의라왕은 중국 서진(西晉)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부여를 수복하였다.
가족관계
- 증조부: 위구태왕(尉仇台王)
- 증조모: 공손탁의 종녀인 공손씨(公孫氏)로 추정됨
- 조부: 간위거왕(簡位居王)
- 조모친: 미상, 간위거왕의 첩
- 부친: 마여왕(麻余王)
- 모친: 미상
- 자녀: 미상
바깥 고리
- 김복순(金福順), 〈의려(依慮)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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