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공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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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9년]](충혜왕 복위 원년) [[고려 충숙왕|충숙왕]]이 사망한 후 [[고려 충혜왕|충혜왕]]은 그녀를 위해 [[음력 5월]]과 [[음력 7월]]에 각각 영안궁(永安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ref>戊寅 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 《고려사》권36〈세가〉권36</ref><ref>甲子 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 《고려사》권36〈세가〉권36</ref>. 이러한 왕의 잔치에 대해 그녀도 같은 해 [[음력 8월]]에 왕에게 답례를 베풀었는데, 이 날 충혜왕은 연회가 파한 후에도 술에 취한 척 하고 나가지 않고 있다가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ref>甲午 慶華公主邀王宴, 及酒罷, 王佯醉不出, 暮入公主臥內, 蒸焉. 《고려사》권36〈세가〉권36</ref>. 당시 충혜왕은 경화공주가 저항을 하자 [[송명리]](宋明理) 등을 시켜 공주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또 충혜왕은 경화공주 외에도 부왕 충숙왕의 제4비인 [[수비 권씨]](壽妃 權氏), 외숙 [[홍융]](洪戎)의 처 황씨(黃氏) 등을 강간하는 등 그 패륜이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c007&gunchaId=av026&muncheId=&finId=023&NodeId=&setid=2676244&Pos=4&TotalCount=6&searchUrl=ok 《동사강목》제13하 1339년]</ref>.
[[1339년]](충혜왕 복위 원년) [[고려 충숙왕|충숙왕]]이 사망한 후 [[고려 충혜왕|충혜왕]]은 그녀를 위해 [[음력 5월]]과 [[음력 7월]]에 각각 영안궁(永安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ref>戊寅 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 《고려사》권36〈세가〉권36</ref><ref>甲子 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 《고려사》권36〈세가〉권36</ref>. 이러한 왕의 잔치에 대해 그녀도 같은 해 [[음력 8월]]에 왕에게 답례를 베풀었는데, 이 날 충혜왕은 연회가 파한 후에도 술에 취한 척 하고 나가지 않고 있다가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ref>甲午 慶華公主邀王宴, 及酒罷, 王佯醉不出, 暮入公主臥內, 蒸焉. 《고려사》권36〈세가〉권36</ref>. 당시 충혜왕은 경화공주가 저항을 하자 [[송명리]](宋明理) 등을 시켜 공주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또 충혜왕은 경화공주 외에도 부왕 충숙왕의 제4비인 [[수비 권씨]](壽妃 權氏), 외숙 [[홍융]](洪戎)의 처 황씨(黃氏) 등을 강간하는 등 그 패륜이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c007&gunchaId=av026&muncheId=&finId=023&NodeId=&setid=2676244&Pos=4&TotalCount=6&searchUrl=ok 《동사강목》제13하 1339년]</ref>.


바로 다음날 경화공주는 이 일을 치욕스럽게 느끼고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사들이려 했으나, 충혜왕이 [[이엄 (고려의 문신)|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희비 윤씨]]의 아버지) 등에게 명하여 마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여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화공주는 원나라에가지 못하게 되자 심왕파이던 [[조적]]에게 자신이 강간당한 일을 고자질하였고, 충혜왕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조적은 군사를 모아 연경궁(충혜왕)과 영안궁(경화공주)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적은 이때 충혜왕에게 살해되었다<ref>[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2096806&dencrt=j7IliFccu%252BtwzDRZhz5sUZnlFVtz40UoYptS6NXQbHc%253D&query=%EA%B2%BD%ED%99%94%EA%B3%B5%EC%A3%BC 네이버 책 - 《신돈과 그의 시대》, 김창현]</ref>.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원나라가 사신 두린(頭麟) 등을 고려에 파견하여 경화공주에게 황제가 하사한 술을 올리고 충혜왕의 옥새를 빼앗아 공주에게 넘겼으며<ref>{{뉴스 인용
바로 다음날 경화공주는 이 일을 치욕스럽게 느끼고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사들이려 했으나, 충혜왕이 [[이엄 (고려의 문신)|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희비 윤씨]]의 아버지) 등에게 명하여 마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여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화공주는 원나라에가지 못하게 되자 심왕파이던 [[조적 (고려)|조적]](曺頔)에게 자신이 강간당한 일을 고자질하였고, 충혜왕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조적은 군사를 모아 연경궁(충혜왕)과 영안궁(경화공주)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적은 이때 충혜왕에게 살해되었다<ref>[http://book.naver.com/bookdb/text_view.nhn?bid=2096806&dencrt=j7IliFccu%252BtwzDRZhz5sUZnlFVtz40UoYptS6NXQbHc%253D&query=%EA%B2%BD%ED%99%94%EA%B3%B5%EC%A3%BC 네이버 책 - 《신돈과 그의 시대》, 김창현]</ref>.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원나라가 사신 두린(頭麟) 등을 고려에 파견하여 경화공주에게 황제가 하사한 술을 올리고 충혜왕의 옥새를 빼앗아 공주에게 넘겼으며<ref>{{뉴스 인용
| 제목 = 아들에게 겁탈당한 몽골 출신 고려왕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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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2일 (화) 19:57 판

경화공주
공주
이름
백안홀도 (伯顔忽都)
별호 숙공휘령공주 (肅恭徽寧公主)
백안홀도 (伯顔忽都)
시호 숙공휘령공주 (肅恭徽寧公主)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44년 음력 6월
국적 원나라, 고려
왕조 고려 왕조
부친 미상
모친 미상
배우자 충숙왕
자녀 없음
능묘 미상

경화공주(慶華公主, ? ~ 1344년 음력 6월)은 고려의 제27대 충숙왕의 제3비이다. 숙공휘령공주(肅恭徽寧公主)라고도 한다.

생애

가계와 왕비 책봉

원나라 출신으로, 이름은 백안홀도(伯顔忽都)이다. 그러나 고려로 시집 온 다른 원나라 황족들과는 달리 이렇다 할 가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332년(충숙왕 복위 원년) 당시 원나라에 체류중이던 충숙왕과 결혼하여[1]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음력 3월에 고려로 들어왔다[2]. 충숙왕에게는 고려인 명덕태후 홍씨 등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도 몽고 출신이라는 이유로 명덕태후 등을 밀어내고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에 이어 제3비로 기록되었다.

충숙왕 사망 후

1339년(충혜왕 복위 원년) 충숙왕이 사망한 후 충혜왕은 그녀를 위해 음력 5월음력 7월에 각각 영안궁(永安宮)에서 잔치를 베풀었다[3][4]. 이러한 왕의 잔치에 대해 그녀도 같은 해 음력 8월에 왕에게 답례를 베풀었는데, 이 날 충혜왕은 연회가 파한 후에도 술에 취한 척 하고 나가지 않고 있다가 경화공주를 강간하였다[5]. 당시 충혜왕은 경화공주가 저항을 하자 송명리(宋明理) 등을 시켜 공주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또 충혜왕은 경화공주 외에도 부왕 충숙왕의 제4비인 수비 권씨(壽妃 權氏), 외숙 홍융(洪戎)의 처 황씨(黃氏) 등을 강간하는 등 그 패륜이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6].

바로 다음날 경화공주는 이 일을 치욕스럽게 느끼고 원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사들이려 했으나, 충혜왕이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희비 윤씨의 아버지) 등에게 명하여 마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여 원나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화공주는 원나라에가지 못하게 되자 심왕파이던 조적(曺頔)에게 자신이 강간당한 일을 고자질하였고, 충혜왕을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조적은 군사를 모아 연경궁(충혜왕)과 영안궁(경화공주)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조적은 이때 충혜왕에게 살해되었다[7]. 그러나 이 일을 알게 된 원나라가 사신 두린(頭麟) 등을 고려에 파견하여 경화공주에게 황제가 하사한 술을 올리고 충혜왕의 옥새를 빼앗아 공주에게 넘겼으며[8],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하였다. 이후 경화공주는 정사를 처결하면서 충혜왕의 총신이었던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정동성(征東省)에 가두고, 김지겸(金之謙)을 권정동성(權征東省)에, 김자(金資)를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使司)에 임명하기도 하였다[9].

사망과 후손

경화공주는 1344년(충목왕 즉위년) 음력 6월에 사망했다[10]. 같은 해 음력 9월 18일 장례를 치렀으며[11], 경화공주(慶華公主)이다. 1367년(공민왕 16년) 음력 1월 10일 원나라에서 숙공휘령공주(肅恭徽寧公主)의 시호를 내렸다[12].

남편 충숙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능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가족 관계

출처 및 주석

  1. 《동사강목》권13하 1332년
  2. 閏月 丁酉 王與公主, 發京, 是爲慶華公主. 皇太子遣院使 阿也赤, 餞之, 千官出餞者頗多. 《고려사》권35〈세가〉권35
  3. 戊寅 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 《고려사》권36〈세가〉권36
  4. 甲子 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 《고려사》권36〈세가〉권36
  5. 甲午 慶華公主邀王宴, 及酒罷, 王佯醉不出, 暮入公主臥內, 蒸焉. 《고려사》권36〈세가〉권36
  6. 《동사강목》제13하 1339년
  7. 네이버 책 - 《신돈과 그의 시대》, 김창현
  8. 조정진 (2007년 6월 29일). “아들에게 겁탈당한 몽골 출신 고려왕비는?”. 세계일보. 2012년 6월 12일에 확인함. 
  9. 《고려사》권89〈열전〉권2- 충숙왕 후비 경화공주
  10. 慶華公主薨. 《고려사》권37〈세가〉권37
  11. 甲辰 葬慶華公主. 《고려사》권37〈세가〉권37
  12. 忠肅王妃 伯顔忽都公主曰肅恭徽寧公主, 王妃寶塔實里公主曰魯國徽翼大長公主, 封永陵妃 亦憐眞班公主爲貞順淑儀公主. 《고려사》권41〈세가〉권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