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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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렌]]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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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렌은 훅을 도와 [[Micrographia]]의 도판을 만들었다.<ref name="J과학사"> 과학의 역사 근대편, J.D.버날.</ref>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은 로버트 훅과 건축학 부분에 있어 관련성이 있다. 또한 앞의 마이크로그라피아에 관한 부분에서도 언급되었듯, 그는 훅을 도와 [[Micrographia]]의 도판을 만들었다.<ref name="J과학사"> 과학의 역사 근대편, J.D.버날.</ref>

== 주석 ==
== 주석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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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3일 (월) 09:23 판

로버트 훅
(Robert Hooke)
로버트 훅
로버트 훅
출생 그레고리력 1635년 7월 18일
영국, 프레쉬워터
사망 그레고리력1703년 3월 3일
영국, 런던
국적 영국
주요 업적 훅의 법칙 (훅의 탄성의 법칙)정립
마이크로그라피아 출간
보일의 법칙 발견에 기여
중력의 역제곱 법칙 지지 등
분야 현미경학 광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화석학 심리학
소속 왕립학회
로버트 보일의 조교였음
아이작 뉴턴과 적대적 관계

로버트 훅(Robert Hooke, FRS, 1635년 7월 18일~1703년 3월 3일)은 영국의 자연 철학자이며, 과학 혁명기에 이론과 실험 양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자 박물학자, 그리고 자연철학자이다.

로버트 훅은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 중에 한 명으로, 현대 현미경학의 기본 본질이 되는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를 출판하였으며 세포(cell) 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다. 그리고 용수철과 같은 탄성체의 복원력과 변형력의 관계를 나타내는 훅의 법칙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는 현미경을 사용하여 화석을 관찰하고 초기 진화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화학에 있어서는 로버트 보일의 진공펌프 제작에 관여하여 보일의 법칙 발견에 일조하는 한편 그레고리안 망원경을 제작하여 화성과 금성을 관찰하기도 하였다. 런던 대화재 이후 도시 재건을 위한 설계사의 수장을 지냈다. 굴절 현상을 관찰하여 빛의 파동성 이론을 지지하였고, 뉴턴의 고리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기가 다른 물질에 비해 구성 요소 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의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또한 로버트 훅은 중력의 작용이 역제곱법칙을 따를 것이라 추론하였는데, 이는 후에 아이작 뉴턴에 의해 중력의 법칙으로 증명되었다.

훅은 1662년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회원이 되었으며 그의 다재 다능한 능력은 많은 왕립 학회 회원들의 실험에 도움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왕립학회를 신사들의 잡담장소에서 과학자 사회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한 사교적인 과학자였다.

생애

출생 및 유년기

훅의 생애는 1696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을 통하여 알려져 있으나 기록이 정확하지는 않다.
로버트 훅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죽기 7년 전인 1635년 7월 18일에 영국의 프레시워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존 훅은 와이트 섬의 프레시워터에 있는 올세인트 교회의 목사보였다. 목사보였던 아버지를 중심으로 그의 가정은 부유함과는 거리가 있는 집안이었다. 로버트 훅의 형제는 둘이 있었으며 그들은 바로 1628년에 태어난 캐서린과 1630년에 태어난 존이었다. 로버트의 형 존은 뉴포트에서 식료품 상인이 되었으나 46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그의 딸이자 로버트 훅의 조카인 그레이스는 로버트 훅의 나중 삶에 지대한 역할을 끼치기도 한다.
로버트 훅은 살아나기 힘들 정도로 병약하였고 태어나 7년동안 우유와 유제품들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점점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자 그의 아버지는 훅이 직업을 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초적인 지식을 가르쳤다. 그러나 로버트 훅의 만성적인 건강 악화로 교육은 별 효과가 없었으며, 훅은 줄곧 연장 곁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형을 만드는 일과 그림을 그리는 일에 재능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프레시워터에 어떤 직업화가가 찾아왔고 그 화가를 보던 로버트 훅은 자신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처음 그림을 그려보고 닥치는 대로 배끼기 시작하였으며 직업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기도 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 존 훅이 숨을 거두게 되고 로버트 훅은 유산을 가지고 도제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심한 물감 냄새 때문이었는지, 그는 화가를 포기하게 되고 남은 돈을 웨스트민스터 공립학교의 수업료로 내게 된다. 이 학교에서 그는 그보다 세 살 많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을 만나게 된다. [1]

성인

훅은 가난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유한 학부생의 고용인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비를 제작하고 실험을 하는데 능숙했던 로버트 훅은 옥스포드 대학의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기있는 조수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훅은 로버트 보일의 조교가 된다. 또한 훅은 옥스포드의 천문학 교수인 세스 워드(Seth Ward. 개량된 망원경 가늠자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짐)의 천문학 연구를 거들도 있었으며 1650년대 중반에는 천문학적 시간 측정용 시계의 정확성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또한 균형잡힌 스프링으로 조정되는 회중시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기도 하였다. 훅은 1662년 왕립학회에 마련된 자리를 위해 옥스포드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보일 등의 여러 사람의 조교로 근무한 것을 인정받아 1663년 석사학위가 수여되게 된다. 또한 1664년 5월 그래샴 대학의 기학학 교수후보로 선정되기도 하며 실제로 1665년 그 자리를 꿰차기도 하였다. [1]

왕립학회

1660년대 초에 왕립학회가 설립되었으며 그것의 관리를 맡을 서기와 실험 담당자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보일의 추천으로 헨리 올덴부르크(Henry Oldenburg)가 서기를 맡았으며 1661년 11월 5일, Robert Moray경은 학회의 실험에 대한 관리인을 뽑자고 제안하였는데, 로버트 훅이 만장일치로 임명되었다. 로버트 훅이 정식으로 실험 관리인의 일을 시작한 것은 11월 12일이다. 1664년 존 커틀러John Cutler경은 역학 강의를 위해 왕립학회에 연간 50파운드의 자금을 기부하였다. 그리고 학회의 회원들은 로버트 훅을 이 강의에 적임자로 지명하였다. 1665년 1월 11일에 마침내 Culter경의 지원금에 30파운드를 더해서 도합 연간 80파운드의 급여를 받으며 관리인으로서의 사무실을 받게 되었다. 왕립학회 내에서의 훅의 역할은 자신 나름의 방법으로 실험을 선보이거나, 다른 회원들의 실험에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다. 훅은 왕립 학회에서 실험 관리인으로 활동하며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들을 설계하고,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공기의 성질을 탐구한 실험이 있다. 그는 또한 개의 기도를 절개한 후에 폐에 직접 공기를 주입해 넣음으로서 그 생명을 지속시킬 수 있음도 보였다. 이것을 통해 당시에 동맥류과 정맥류의 차이도 알 수 있었다. 훅은 61m짜리 진자를 통한 실험을 통해 중력을 측정하였는가 하면, 각기 다른 높이에서 기압계(Barometer)를 통해 기압, 풍력, 습도 등을 측정하였다고 한다. 태양을 비롯한 다른 별들의 미세한 각변위를 측정하기 위해 여러 기구들이 고안되었는가 하면, 화약의 폭발력을 측정하였다. 윤형 기압계등을 비롯해 그가 발명해낸 도구들은 과거 사람이 직접 손으로 수행하던 측정에 비해 실험의 정확성 및 효율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따라서 그의 발명품들은 훅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쓰여졌다. 이처럼 활발한 연구와 활동을 하던 로버트 훅은 1678년 왕립학회의 회장이 된다. [1] [2] [3] [4]

훅에 대한 묘사

훅에 대한 묘사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과학사 책들은 타고난 실험 과학자였고, 하루에 3,4시간 밖에는 자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실험 장치들을 주물럭거리고 수많은 실험을 수행하여 매우 폭이 넓고 다양한 이론들을 만들며 일생을 보낸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창의적인 과학자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약간 조급한 성격이어서 자기의 창의적 생각들을 깊이 있게 완성시키지 못했고 남들의 비난을 참지 못햇으며 논쟁도 잘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3] 하지만 이와 다르게, 훅과 함께했던 존 오브리는 1680년에 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고 한다.

  • “중간 정도의 키에 약간 구부정하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얼굴 아래쪽은 작았지만 머리는 컸다. 눈은 부리부리하며 앞으로 튀어나왔고, 원기가 없었다. 그리고 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가늘었으며 촉촉했고, 고수머리였다. 그는 한결같이 온화했으며, 과식을 하지 않고 항상 적절한 양으로 식사를 했다. 비범한 창조적 두뇌의 소유자였던 만큼, 그는 높은 미덕과 친절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1]

과학에 대한 기여

현미경학

로버트 훅과 현미경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많은 사람들이 로버트 훅을 일컫는 말로 현미경을 최초로 사용하고, 발명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로버트 훅 이전에도 현미경과 유사한 도구를 사용하여 관찰을 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버트 훅 이전에 마르첼로 말피기(Marcello Malpighi)는 피의 순환과 관련하여 현미경과 비슷한 새로운 장치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의 포목상이었던 안톤 판 레이우엔훅도 현미경을 사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많은 관찰을 하곤 하였다. 그의 장비는 길고 가느다란 금속대에 끼운 매우 작고 볼록한 렌즈들로 이루어져있었고 눈을 고정시킬 수도 있었다.
물론 이렇게 예전부터 이루어져왔던 현미경을 이용한 관찰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훅이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로버트 훅이 현미경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레이우엔훅이 비전통적인 기법과 장비를 사용한 것에 반해 로버트 훅은 현미경학의 발전의 흐름을 주도하였고 물체를 확대하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수의 렌즈를 이용하여 복합현미경을 발명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나온 관찰의 결과물은 모두 하나의 책으로 엮어 내게 되며 그것이 바로 마이크로그라피아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은 예전 웨스터민스터 공립학교에서 만났던 친구인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그렸다고 한다. [1]

광학

로버트 훅은 아이러니하게도 흔히 뉴턴의 고리라고 불리는 것을 발견해 낸 사람이다. 훅은 얇은 물질막이 만들어내는 색의 패턴들의 성질을 연구하였고, 그런 현상은 두 개의 층에서 반사된 빛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섭 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훅은 두 장의 유리판을 약간의 각도를 유지하여 접근시키면서 빛이 색을 띤 둥근 고리모양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현상은 '“뉴턴의 고리”'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뉴턴이 역사 다시 쓰기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빛에 대한 훅의 관점은 호이헨스의 압축파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하로 진동하는 파동이라고 주장했다.[1] 하지만, 훅은 데카르트, 호이겐스와 같이 물체 내 입자들의 연속적인 진동을 통해 빛이 전달된다는 개념을 기초로 빛의 굴절을 해석하고,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다.[5]

천문학

망원경이 정확한 관측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 확고한 지위를 굳히자 마자, 훅과 플램스티드, 카시니 등의 과학자들은 좀 더 먼 항성들을 배경으로 가까운 항성들의 겉보기 편이를 검출하기 취한 측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5]

목성의 대적점 발견

로버트 훅이 관측을 통해 목성의 대적점을 발견하였다.

[3]

지질학

화석학

로버트 훅은 화석과 지질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다. 몇몇 화석들은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과 닮았었는데 비해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동물들이 이미 멸종해 있었거나 확인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화석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가설들이 등장했다. 그중 널리 알려졌던 한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 때의 이야기 인데, 화석은 지구 내부에서 생겨나고 자라난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모형을 만드는 힘 또는 “Extrordinary Plastick Virtue” 라고도 불리는 것이 살아있는 것처럼 모양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였다. [2] 그렇지만 훅은 1665년 화석이 지구자체에 있는 일부 특별한 조형적 잠재력에 의해 형성된 돌이라는 개념을 과감히 부정하였으며 나무의 화석을 기술하고 석화된 물체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친 자연적 과정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5] 또한 “대홍수, 대범람, 지진에 의해서든, 아니면 다른 수단들에 의해서든 어떤 조개껍질이 그 자리에 내던져져 그곳에서 점토, 흙이나 암석 알갱이가 침전되어 있는 물, 또는 여타 물질로 채워진 뒤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뒤엉켜 굳어졌다”고 말하였다. 그 당시 그레샴 대학에서 행한 훅의 강연에서 그는 화석은 지구 표면에서 주요한 변화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책은 그가 죽은 뒤 2년 뒤 출판되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한때 바다였던 부분들이 현재는 땅이고, 산맥들은 평야로 변했고, 평야는 산맥으로 변했다.” [1]

물리학

훅의 법칙

훅의 법칙은 고체에 힘을 가해 변형시킬 때, 힘이 어떤 크기를 넘지 않는 변형의 양은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법칙으로 고체역학의 기본 법칙 중의 하나이다. 이 법칙이 성립하는 한계를 넘어서면 탄성한계를 넘게 되는 것이고 물체는 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법칙은 1678년 로버트 훅이 늘어나는 용수철을 가지고 실험적으로 연구해 발견했다. [3]

열에 대한 관점

열 그 자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과학자들이 그 답을 구하려고 애썼던 의문이었다. 로버트 훅은 열이 문질의 일부 진동에 기인한다는 진동론(vibration theory)를 선호하였다.[5]

행성의 궤도를 유지시키는 힘의 원천

보렐리는 행성들이 여러 힘을 받지만, 그 힘들이 서로 평형을 이루기 때문에 행성들이 안정된 궤도상을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 문제에 대해 훅은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훅은 태양이 행성들에게 강력한 인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힘의 정확한 수학적 표 현(훅은 그것이 자력일 것이라고 믿었다)은 얻지 못했다.[5]

기상학

로버트 훅의 장비를 제작하는데 능숙하였던 능력은 기상학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지금은 친숙해진 시계 문자판 형태의 압력계, 풍속계, 개량된 온도계, 습도계 등을 발명하여 최초의 기상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기압의 변화와 기후의 변화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유추해 내기도 하였다. [1]

화학

보일의 법칙 정립

보일의 법칙

로버트 훅은 로버트 보일의 조교였으며 로버트 보일보일의 법칙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는 앞에서도 언급되었듯, 장비를 제작하는 데에 능숙함을 보였으며 그를 통해 만들어진 공기펌프로 인해 보일의 법칙이 탄생할 수 있게 된다. [1] 오른쪽에 보이는 그림은 일정 온도에서 부피와 압력은 반비례관계라는 보일의 법칙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연소에 관하여

로버트 훅은 연소실험을 통하여 연소와 호흡은 공기에서 ‘흡수’되는 무엇인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훅이 얼마나 ‘산소’의 발견에 매우 가까이 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실제로 산소는 1세기 정도 후에 프리스틀리, 그리고 라부아지에에 의하여 발견되게 된다. 또한 훅은 몸의 운동으로 생기는 열과 두 사물의 결합과 관련된 연소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훅의 독특한 실험정신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귀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펌프질을 해서 밖으로 공기를 빼낸 방 안에 앉아있는 등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1]

건축학

심리학

주요 저서

마이크로그라피아 (Micrographia)

이 그림은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속표지의 그림이다.

로버트 훅의 대표적인 저서에는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가 있다. 이 책을 통해 로버트 훅은 생물학 분야에서 이름있는 사람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현미경학이 하나의 과학분과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현미경과 조명시스템을 개발하였으며 관찰에 적용하였다.
"미세기하"라고 직역할 수 있는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로버트 훅의 현미경을 통한 관찰을 총 정리해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665년 9월 출간된 책으로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주요한 출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영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또한 매우 분명하게 서술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쉽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버트 훅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도 하였다. 한편, 로버트 훅의 관찰에 따르는 많은 그림들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책을 본 Geoffrey Keynes는 “과학역사에서 이제까지 출판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평했으며, 새뮤얼 피프스는 "내가 이제까지 본 책 중에 가장 독창적인 책”이라고 말하였다.
이 책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인 별들의 소식과 종종 함께 언급되기도 하는데 별들의 소식이 거대 우주본성에 대한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면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미시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시야를 열어주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책은 현미경을 이용하여 쓴 최초의 책이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가 깊다. 이 책에서 훅은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없던 생물(파리, 진드기 등)뿐만 아니라 무생물(눈이나 유리막대)에 대해서도 다루었으며, 책 제목은 “미시세계”와 관련되어있지만 그는 달에 대한 관찰을 하기도 하였다. [1] [3] [2]
오른쪽 그림은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속표지이다.

수록 내용

마이크로그라피아는 총 60개의 관찰로 나뉘어져 있으며 곤충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달 등을 비롯하여 많은 무생물에 관한 관찰을 담았다. 그가 이 책에 포함시킨 관찰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바늘의 끝, 비단, 유리막대, 눈(얼음), 석탄과 불에 탄 식물, 코르크(여기서 cell이라는 용어가 비롯된다.), 여러 식물들의 씨앗, 해초, 파리의 눈, 날개 등의 각 부분, 벌침, 달팽이의 이빨, 개미, 벼룩, 이, 거미, 그리고 달에 관한 관찰이 정리되어있다. 그리고 각각의 관찰은 글로 서술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몇몇은 관찰에 대한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 이해를 돕는다. 특히 이중에서 코르크의 구조에 기반을 하여 cell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그 책에서 화석과 관련된 관찰을 하기도 하였다. [6]
다음 그림들은 마이크로그라피아에 나오는 여러 그림들로, 큰 분류로 나눌 때 생물과 무생물에 대한 관찰로 나눌 수 있다.

로버트 훅의 관찰

로버트 훅이 사용했던 현미경이다.

마이크로그라피아에는 로버트 훅의 관찰에 담긴 철학이 묻어있다. 로버트 훅의 관찰은 그의 관찰에 있어서의 자세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심하고 정교한 그의 관찰로 ‘실천적 개입’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관찰을 할 때 여러 곳에서 오는 빛에 의해 생기는 잔상을 경험했고 빛의 방향이나 다른 요소에 의해 관찰의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빛을 일정한 방향에서 쏘아줌으로 이러한 잔상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객관적이고 공적인 관찰 형태의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즉, 그의 실천적 개입을 위한 노력을 통해 단순한 관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객관성을 띄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검사되고 비판되는, 그리고 첨부될 수 있는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7]
또한 여기서 중요한 것이 로버트 훅의 현미경 개량에 관한 것이다. 그는 현재의 광학 현미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현미경을 잘 만들었다. 그는 눈과 접안렌즈의 일정한 거리 유지를 위해 눈을 갖다댈 수 있는 부분을 만들었다. 또한 경통을 분리하고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경통에 중간렌즈를 넣었는데 이는 색과 모양이 일그러지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가 개발한 시스템이 바로 빛을 조절하는 조리개로 그것을 통해 빛을 조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이 담긴 플라스크를 이용하여 램프에 빛을 모았다고 한다. [3]

로버트 훅이 생각하는 과학적 방법

로버트 훅의 과학철학적 사상

다른 과학자들과의 관계

로버트 훅은 많은 과학자들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뉴턴 혁명’ 대의 사람이며, 그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과 연관성이 있다. 우선, 훅이 태어난 해에서부터 우리는 유명한 사람 한 명을 찾을 수 있는데 1635년, 훅이 태어나고 7년 뒤에 죽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1] 그는 또한 수많은 과학자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하기도 하였는데, 잘 알려진 바로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n Huygens), 안토니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 크리스토퍼 렌(Christoper Wren) 등이 있다.[2] 훅은 보일의 조교였고 뉴턴과는 많은 면에서 충돌을 하였던 사람이다. 이제 다음의 이야기들은 로버트 훅이 위의 5명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로버트 보일과의 관계

로버트 보일

신교 목사의 병약한 아들로 태어난 훅은 1653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기독교교회에 성가대로 뽑혀가게 되었다. 그 대학에서 훅은 과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훗날 왕립협회의 설립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보일이었다. 보일의 부친은 코크(아일랜드 남서부의 주) 최초의 백작이었고, 그는 학부생이었던 훅을 실험실 조수로 고용했다. 로버트 훅은 그의 장비를 잘 만들고 실험에 능숙하기로 유명하였으며 곧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조수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 보일과 함께 할 때는 공기펌프를 발명하여 로버트 보일이 보일의 법칙(사진)을 발견해 내는데 큰 일조를 하기도 한다.[1] [2]

로버트 보일과의 공동연구

  • 보일과 함께, 그리고 그가 개량한 진공펌프를 이용해서 훅은 오늘날 ‘보일의 법칙’이라 불리는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에 대한 법칙을 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5]
  • 보일-훅의 공동연구가 가져온 또 하나의 결과는 1661년에 보일이 출간한 회의적인 화학자(The sceptical chymist)와 생리학 에세이(Certain Physiological Essays) 였다. 이 저서들은 물질이‘원자와 유사한’것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이론에 대한 보일과 훅의 지지가 나타나있다.[5]
  • 보일과 훅은 헬몬트가 보여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기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체에 대한 연구에 뛰어들었고, 화약 속에 들어있는 초석(질산칼륨)이 물 속에서도 타오르기 때문에 그 속에 공기가 하는 어떤 작용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이 개념을 모든 연소체에까지 확장시켰고, 공기는 연소를 일으키는 용매(solvent)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5]

아이작 뉴턴과의 관계

아이작 뉴턴

로버트 훅과 아이작 뉴턴은 그 당대의 많은 과학자(ex. 애드먼드 핼리)와 비교하였을 때 탁월한 업적을 세웠다고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훅이 세상을 떠난 후에 뉴턴의 스스로 역사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편향되지 않은 역사학자라면 둘의 업적의 양을 비교하고 누가 더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1] 로버트 훅은 생애의 대부분을 건강문제로 시달렸지만 그가 발견한 것들은 정말 많았다. 그는 완성도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뉴턴보다 먼저 만유인력에 있어 역제곱법칙을 주장하였으며 천체의 운동이 역학적 문제임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는 그의 조급한 성격 탓에 많은 창의적인 생각을 깊이 있게 완성시키지는 못하였으며 남들과의 논쟁에서도 잘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또한 불행히도, 뉴턴과 의견이 달랐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빛을 보지 못했다. 만약 뉴턴이 없었다면 훅은 뉴턴만큼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로버트 훅은 자신보다 7년이나 후배인 뉴턴에게 늘 비판적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는지, 훅은 뉴턴의 학회활동을 철저히 방해했다. 그는 일기장에 뉴턴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적나라하게 쓸 만큼 적개심을 가졌다. 그리고 뉴턴도 자신에게 적개심을 가지는 훅을 싫어하였다. 훅과 뉴턴은 많은 논쟁을 하였다. 훅은 달과 같이 물체가 어떠한 궤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안으로 당기는 힘과 밖으로 작용하는 힘 사이의 평형이 이루어져야한다는 생각을 폐기하였다. 그리고, 궤도 운동이 달이 직선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성과, 달을 지구 쪽으로 잡아당기려는 힘의 합임을 깨달았다. 또한, ‘원거리 작용’이라 불리는 달이나 행성들을 잡아당기기 위해 빈 공간을 가로질러 닿는 중력의 개념을 가져왔다. 이 개념에 대한 의견을 뉴턴에게 물었지만, 뉴턴은 훅과의 관계를 맺는 것을 주저하면서 지구의 회전을 시험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뉴턴은 물체를 떨어트렸을 때, 지구의 회전으로 인해 물체를 떨어트린 곳보다 지표면이 더 멀리 있지만 각속도는 동일하기 때문에, 물체가 뒤로 떨어질 것을 예측하였다. 뉴턴은 편지 내용에서 훅과 관계를 맺는 것을 멀리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을 쓰지 못하고 철학에 대해 글을 쓰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하며 훅을 비꼬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둘은 어쩔 수 없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뉴턴과 훅은 자연철학적인 토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오류를 비판하였다. 훅은 낙하 물체가 고체 지구를 저항 없이 뚫고 지나갈 수 있다고 가정하면, 낙하 물체의 올바른 궤적이 길다란 타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뉴턴은 지구 내부를 돌고 있는 물체는 어떤 궤적을 따르면서 점차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궤적을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훅은 뉴턴이 중심에서 모든 거리에 대해 동일한 힘에 기반하였다고 하였고, 훅은 역제곱법칙을 뉴턴에게 소개해주었다. 이 편지는 1680년 뉴턴이 중력의 역제곱법칙을 따라서 행성들이 궤도를 이루고 있고, 혜성들이 따르는 궤도를 가지는 지를 증명하게 하는 방아쇠 역할도 하였다. 뉴턴과 훅의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많이 나타나있었다.
뉴턴은 1666년에 광학 실험을 시작했다는 문장에서, 그가 빛에 대한 관심을 마이크로그라피아를 통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뉴턴은 훅의 연구성과를 본격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훅 씨가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어딘가에서 두 개의 쐐기 같은 투명한 용기를 만들었다고 보고했던 예기치 않은 실험"이라는 식으로 참고 사실만 표현하고, 그 저작의 가치를 평가철하했다. 훅은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뉴턴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친구들에게 항상 그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1703년 3월, 훅이 숨을 거두었다. 훅이 Royal society 에 있는 동안은 학회를 멀리했던 뉴턴이 왕립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뉴턴은 그때까지 쌓였던 원한을 풀기라고 하듯, 로버트 훅의 과학적 업적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가 쓴 논문, 직접 쓴 원고를 모두 소각시키기도 하였다. 또, 뉴턴이 왕립학회장으로 있을 때, 왕립학회를 크레인코트Crane Court로 이주를하게 하였다. 그 당시 왕립학회 모임이 이루어졌던 방에는 초상화들이 걸려있었다. 그 때문에 그레샴 대학에서 크레인코트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옮겨야 하는 초상화들이 많았다. 그 일은 세세하게 일을 진행하던 뉴턴에 의해 감독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일하게 볼 수 없게된 초상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훅의 초상화였다.훅의 업적은 뉴턴에 의해 많은 부분이 가려졌다. [1]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와의 관계

안톤 판 레이우엔훅와의 관계

1678년, 레이우엔훅가 “작은 동물들(little animals)”에 대한 관찰을 하고 결과를 작성하였을 때, 왕립학회는 로버트 훅에게 그것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2]

크리스토퍼 렌과의 관계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은 로버트 훅과 건축학 부분에 있어 관련성이 있다. 또한 앞의 마이크로그라피아에 관한 부분에서도 언급되었듯, 그는 훅을 도와 Micrographia의 도판을 만들었다.[8]

주석

  1.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과학 p198 - p250, John Gribbin
  2. http://www.ucmp.berkeley.edu/history/hooke.html
  3. 청소년을 위한 서양 과학사 p117 - p124, 손영운
  4. http://en.wikipedia.org/wiki/Robert_Hooke
  5. 세계과학문명사 2권, 콜린 A. 로넌
  6. http://digicoll.library.wisc.edu/cgi-bin/HistSciTech/HistSciTech-idx?id=HistSciTech.HookeMicro, Micrographia.
  7. 과학이란 무엇인가, Alan Chalmers.
  8. 과학의 역사 근대편, J.D.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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