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Lee999 (토론 | 기여)
퍼틴 (토론 | 기여)
→‎논란: 한 섹션 정리
267번째 줄: 267번째 줄:


* 박원순 서울대 법대 학력위조 논란
* 박원순 서울대 법대 학력위조 논란
박원순은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진학하였으나, 2학년으로 올라가 과를 정하기 전에 제적당하였고, 그 후에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박원순은 자신이 펴낸 《야만시대의 기록》에서 '1975년 서울대 법대 시절 제적당하고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고 밝혔다. 언론에서도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제적당한 것으로 보도된 적이 있으나, 하지만 정정한 경우는 없었다.{{출처}} 또한 여러 방송 인터뷰에서도 서울대 법대에 다니지 않았다고 정정하지 않았다.<ref>[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0/14/6063383.html?cloc=olink|article|default 백지연"서울대 법대?" 박원순 "예"]</ref>
박원순은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단국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학생이었지만 2학년으로 올라가 과를 정하기 전에 제적당했다. 그러므로 박원순은 서울대 법대 중퇴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박원순은 자신이 펴낸 '야만시대의 기록'에서 '1975년 서울대 법대 시절 제적당하고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고 밝혔다. 언론에서도 법대를 다녔다고 했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제적당한 것으로 보도된 적이 있다. 작년에는 곽노현 교육감이 박원순의 희망작업소에 카렌스를 지원했는데 기사에서는 두 사람이 서울대 법대 선후배 사이인 것으로 나와있다. 안철수와 단일화를 하는 과정에서도 여러차례 서울대 법대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정정한 경우는 없었다. 2006년 방송 인터뷰에도 출연한 바 있는데 소설가 공지영씨가 "서울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김상진 열사 추도식' 사건으로 바로 제적당하셨는데요?" 라고 물어보았을 때에도 서울대 법대에 다니지 않았다고 정정하지 않았다.

박원순은 2011년 2월 한 케이블TV와 인터뷰를 하면서 진행자 백지연씨가 “서울대 법대(나오셨죠)?”라고 하자 “예”라고 답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다. 박 후보는 동영상에서 “서울대 법대 들어가실 때 또 재수(하셨죠)”란 물음에는 “재수”라고 답했다. <ref>[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0/14/6063383.html?cloc=olink|article|default 백지연"서울대 법대?" 박원순 "예"]</ref>

한편,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제적생들은 1980년 이후 복학해 원하는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며 그의 학력위조 의혹에 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 <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40875&CMPT_CD=P0000 박원순 '학력', 내가 아는 진실] 오마이뉴스</ref>

박원순 변호사 측 송호창 대변인은 "당시 사회 계열에 다닌 학생들은 통상 법대에 들어가려고 했기에 법대에 다닌다고 표현했다"며 "박 변호사가 직접 법대 1학년에 다닌다고 표현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송 대변인은 또한 "책에 법대 중퇴라고 나온 점은 박 변호사가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09/2011100901516.html?news_Head2 법대 다닌 적 없는 박원순 "법대 중퇴했다" 논란]</ref>

또한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을 하다가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된 박원순은 [[1980년]] 서울대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거부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926174257 박원순과 문재인, 조영래와 노무현…그리고 '운명'] 프레시안</ref>


한편,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제적생들은 1980년 이후 복학해 원하는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며 그의 학력위조 의혹에 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40875&CMPT_CD=P0000 박원순 '학력', 내가 아는 진실] 오마이뉴스</ref> 박원순 변호사 측 송호창 대변인은 "당시 사회 계열에 다닌 학생들은 통상 법대에 들어가려고 했기에 법대에 다닌다고 표현했다"며 "박 변호사가 직접 법대 1학년에 다닌다고 표현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송 대변인은 또한 "책에 법대 중퇴라고 나온 점은 박 변호사가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09/2011100901516.html?news_Head2 법대 다닌 적 없는 박원순 "법대 중퇴했다" 논란]</ref> 또한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을 하다가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된 박원순은 [[1980년]] 서울대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거부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10926174257 박원순과 문재인, 조영래와 노무현…그리고 '운명'] 프레시안</ref>


* 기타
* 기타

딸이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법대로 전과한 데 대한 의혹에 대해 서울대 교무처는“면접에 참가한 교수들의 명단은 밝힐 수 없지만 논술시험과 학업성적 등 학칙에 따라 전과가 이뤄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박 후보 딸이 전과하기 전까지 주로 교양과목 강의같은 비교적 학점이 후한 과목 위주로 '학점관리'를 한 것 같다고 밝혔다. 또한 스위스로 사치성 유학을 떠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스 빌스도르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395568&cloc=olink|article|default 한나라 “빚 4억 박원순 … 한 달 생활비 1500만원 어떻게 마련하나”] 중앙일보</ref>
딸이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법대로 전과한 데 대한 의혹에 대해 서울대 교무처는“면접에 참가한 교수들의 명단은 밝힐 수 없지만 논술시험과 학업성적 등 학칙에 따라 전과가 이뤄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박 후보 딸이 전과하기 전까지 주로 교양과목 강의같은 비교적 학점이 후한 과목 위주로 '학점관리'를 한 것 같다고 밝혔다. 또한 스위스로 사치성 유학을 떠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스 빌스도르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395568&cloc=olink|article|default 한나라 “빚 4억 박원순 … 한 달 생활비 1500만원 어떻게 마련하나”] 중앙일보</ref>


293번째 줄: 283번째 줄:


=== 네거티브에 대한 박원순의 입장 ===
=== 네거티브에 대한 박원순의 입장 ===

박원순은 야권 단일화 경선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희망의 시민 여러분, 낡은 시대는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하고 그들이 지시하는 그들만의 리그는 다시 복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시대를 거울삼아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저는 단 한 마디의 네거티브도 없이 경선에 승리했습니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까지 가세한 파상공세를 물리쳤습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라며 소감을 드러냈다.
박원순은 야권 단일화 경선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희망의 시민 여러분, 낡은 시대는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하고 그들이 지시하는 그들만의 리그는 다시 복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시대를 거울삼아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저는 단 한 마디의 네거티브도 없이 경선에 승리했습니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까지 가세한 파상공세를 물리쳤습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라며 소감을 드러냈다.



2011년 10월 31일 (월) 02:10 판

틀:인물

박원순
파일:Parkwonsoon.png
출생1956년 3월 26일(1956-03-26)(68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성별남성
학력단국대학교 사학과 학사
경력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참여연대 사무처장
포스코 사외이사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풀무원 사외이사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공동대표
서울특별시장
소속서울특별시장
희망제작소(상임이사)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공동운영위원장)
종교불교
상훈2006년 만해상 실천부분
2006년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
2003년 이웃돕기 유공자 포상식 국민포장
2002년 서울지방변호사회 공익봉사상
2002년 심산상
1998년 올해의 여성운동 상
웹사이트http://wonsoon.com

박원순(朴元淳, 1956년 3월 26일 ~ )은 대한민국변호사이자 사회 운동가이며 제35대 서울특별시장이다. 2011년 10월 26일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6년 3월 26일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나 197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유신체제 반대 학생 운동과 관련하여 제적당하고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1985년에 졸업하였다.[1]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제 12기를 수료하고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재직하면서 1991년, 영국 런던정경대에서 국제법 디플로마를 취득하고 하버드대학교 법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박원순은 그동안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참여연대 사무처장, 법무법인 산하 고문변호사를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시민활동가로 활동하면서 2006년, 만해상(일명 만해대상)과 아시아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저작권법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시민 운동가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변호사이자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2011년 9월 박원순은 서울특별시장 보궐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안철수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 낸 후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과도 단일화에 성공하여 범야권 단일 후보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나경원을 꺾고 당선하였다.

사회참여 경력

경상남도 창녕군 출신으로 197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학생운동 사건인 오둘둘 사건으로 인해 제적당한다. 그 뒤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대구지검에서 1년 동안 검사로 재직하다 1980년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망원동 수재민 사건, 박노해 사건 등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 처장으로 재위하면서 국민생활 최저선 운동(1994년), 사법 개혁 운동(1995년), 작은 권리 찾기 운동(1997년), 대기업 소액주주 운동(1998년), 예산감시 정보공개운동(1999년), 부적절한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공천 반대 및 낙선운동(2000년) 등을 주도하며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오며 한국 사회를 변화시켰다.[2]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으로 재학중이었던 박종철은 1987년 전두환 공안당국에 붙잡혀 취조실로 끌려가게 된다. 공안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철과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대한 성공회 서울교구,주임사제:이한우 바우로 신부)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박원순은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로 접어들었다.[3]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은 서울대학교 우 모 조교가 신 모 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이었다. 6년간의 법정투쟁이 이어졌고, 결국 신 교수가 우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판결이 나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도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우 조교의 변호는 박원순 변호사가 맡았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당시 부천경찰서(지금의 부천 소사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당시 22세이던 대학생 권인숙을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공권력이 추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권력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인한 사법부와 언론의 부도덕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 수단인 보도 지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해자 권인숙 씨의 변론은 인권변호사 조영래와 함께 박원순이 맡았다.

여성국제전범법정

2000년 12월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은 일본군의 전쟁범죄 특히 일본군 위안부 조직과 강제연행, 위안부 소내 강간·고문·상해·학대·살인 행위를 비판·검증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민간 법정이다. 개정 첫날 남북한 공동검사단은 일본 왕을 군위안부 강제 성노동 착취 전범으로 기소하였다. 남북 공동검사단은 일본의 범죄사실을 1944년 미얀마 국경에서 임신된 채 발견됐던 박영심 할머니의 당시 중국, 미얀마 등지로 끌려 다니며 겪었던 참혹한 성노예 체험을 증언이 담긴 녹화 비디오 등 각종 증언, 증거자료를 통해 입증해내었다. 또한 이러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일본의 공식사죄와 피해배상, 책임자 처벌, 피해자 명예회복, 생존자 귀환 및 유골 송환 그리고 역사교육 등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며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었다.

남한측 검사로 참여한 박원순은 "한반도는 10만 명 이상이 군대위안부로 동원된 최대 피해국이었고 식민지 지배가 그 배경이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면서 일본 왕의 처벌과 배상을 주장했다.[4][5]

여덟개 피해국과 일본, 각국에서 1000여명이 참석한 이 법정에는 단 한명의 일본 정부 인사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피고측 변호인으로 나온 이마무라 쓰구오 변호사는 “피고인들은 이미 오래 전 사망했기 때문에 재판이 성립될 수 없으며 이들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유죄판결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구단회관 앞에는 일본 우익 단체의 가두선전차가 몰려들어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동원되지 않았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국제법정을 비난하는 방송을 계속하기도 했다.[6][7]

공익활동

2001년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해 1% 나눔 운동, 동아일보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돈쓰기" 공동캠페인, 인터넷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따뜻한 세상 만들기" 온라인 캠페인, 작가들의 아름다운 나눔 인세 1% 기부운동 그리고 네이버와 기부포털사이트 해피빈 창립을 함께하여 기부문화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모인 기부금을 통해 한부모 여성 가장 창업을 지원하는 '희망가게 사업', 태평양제약과 함께 독거 노인들에게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노인지원 기금 사업', 미숙아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다솜이 작은 숨결 살리기 사업' 등의 사회적 사업을 실천하였다.[8] 2002년 아름다운가게를 설립, 헌 물건을 기증받아 수선하여 되파는 형태의 재사용 나눔가게, 제3세계 저개발국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문화 운동, 재활용 디자인 사업, 국제구호를 위한 모급사업을 하였다.[9] 2006년 희망제작소를 설립하여 지역사회 운동, 청년 벤처 운동, 소기업 지원 운동을 이어왔다.

2006년 그는 만해상,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을 수상하였다.[10]하기도 하였다.

박원순 소송 사건

대한민국 국가정보원명예훼손 혐의로 박원순에게 2억원을 소송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2009년 6월 ‘위클리경향’ 인터뷰 도중 국정원의 불법사찰 가능성을 언급했다. 희망제작소와 하나은행이 손잡고 작은 기업에 낮은 이율로 자금을 지원하는 재단 설립을 추진 중이었으나 국정원 개입으로 무산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국가는 “국정원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됐다”며 박원순을 상대로 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피고’ 박원순, ‘원고’ 대한민국인 이 소송에서 일부 국민들은 “원고 ‘대한민국’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고소취하를 요구하는 일부 네티즌들의 온라인 청원이 시작되었으며 대한변호사협회도 이날 “국정원이 개인을 상대로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제기한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변협 측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국가기관의 잘못을 비판할 자유가 헌법상 보장돼 있다”면서 “비판이 거짓이거나 악의라는 객관적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국정원 등 국가 권력기관이 개인을 상대로 거액의 손배소를 제기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11]

2010년 9월 15일 재판부는 박원순 상임이사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국가는 기본권의 보장 의무를 지는 존재이지, 누리는 주체가 아니다”라며 “국가가 국민의 비판에 소송으로 대응하려 할 경우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언로가 봉쇄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14부(김인겸 부장판사)는 15일 대한민국이 박 상임이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국가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으로 인한 피해자로서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국가나 국가기관이 업무를 정당하게 처리하고 있는지 여부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비판과 감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고 국가는 당연히 이를 수용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만약 아무런 제한 없이 피해자로서 국가의 자격을 폭넓게 인정할 경우 표현의 자유언론의 역할 및 기능이 극도로 위축되어 자칫 언로가 봉쇄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일정한 범위 내에서는 국가도 피해자로서 법적 보호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이를 허용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박 상임이사의 인터뷰에 대해선 “악의적이거나 상당성을 잃은 공격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정부가 국민에 대한 겁주기 소송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면서 “국가는 공공영역 참여를 봉쇄하는 각종 민·형사상 겁주기 소송들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했다.[12]

결식제로 운동

2010년 12월 8일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국회 본회의에서 2011년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며 급식 관련 예산 285억 원을 전액 삭감해 새해가 시작되는 일주일 뒤부터 당장 급식 지원이 끊기는 아이들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박원순은 즉각적으로 '결식제로' 운동을 시작했다. 2010년 당시 결식제로 운동을 선언하며 박원순 변호사는 “어떻게 밥 굶는 아이들의 급식비까지 깎아버린다는 말입니까”, “국가가 책임을 지지 못하면 국민이라도 나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밥 굶은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부터 하루에 한 끼를 굶어 12월 중으로 4만원(한 끼당 5000원×8끼)을 내놓으려 한다”,“대한민국 정부가 버린 아이들 우리가 먹입시다”라고 말했다. 국민 100만명이 참여해 400억원을 모으면 결식아동 겨울방학 급식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 ‘결식아동 0 캠페인’은 개시한 지 일주일만에 2000여 명 이상이 동참해 1억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다.[13][14]

2011년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출마와 당선

안철수의 불출마 및 박원순 지지 선언

안철수의 서울시장 선거 출마 여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던 9월 4일에 주요 언론사들은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모든 여론조사에서 안철수의 지지율은 50% 상회하는 압도적인 수치를 보였다. 공식적인 출마 선언을 하지 않고있던 안철수는 9월 6일 오후 4시에 '안철수와 관계 없이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박원순과 만나 불과 17분 동안의 대화 끝에 박원순으로 단일화했음을 발표하였다. '누가 출마하느냐', '단일화가 되느냐' 등이 모두 선거지형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안철수는 “오늘 존중하는 동료이신 박원순 변호사를 만나서 그 분의 포부와 의지를 충분히 들었다. 우리 사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시민사회 새로운 꽃을 피운 분으로서 서울시장을 누구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저에 대한 기대도 우리 사회 변화의 열망이 저를 통해 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소중한 우리 미래 세대들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라고 말했고 “지금까지 심정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이해해 준 박경철 원장님께도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단일화 조건이 있었느냐에 대해 안철수는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제가 출마 안 하겠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꼭 시장 되셔서 그 뜻 잘 펼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15]

박원순은 단일화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시장직 자리를 원한 게 아니다. 진정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결론이 나온 것”라고 말했다. 박원순은 또 안철수에 대해 “아무리 신뢰관계가 있다해도 저보다 10배나 더 되는 지지도를 갖고 있던 분이 정말 아무 조건 없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하는 (내 말) 한마디로 양보한다는 게 사실 또 믿기 어려운 그런 일”이라며 “안 교수가 개인의 이익보다 사회의 어떤 공공적인 이익을 위해서 해왔던 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태도였다고 본다”라고 말했다.[16] 이후 박원순, 한명숙, 문재인 등은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범시민 야권 단일후보를 통해 한나라당과 1:1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박원순-한명숙 두 사람은 범시민 야권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해 상호 협력하고, 이후엔 선거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인다”라며 결의를 다졌다.[17]

한나라당이 “안철수와 박원순 단일화는 정치쇼”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박원순은 “그런 쇼는 더 많이 하는 게 좋은 것 아니냐”라며 반박했다.[18] 안철수와 박원순은 단일화했으나, 이전까지 박원순의 서울시장 후보 지지율은 5%에 불과해 ‘안철수의 지지층을 박원순이 흡수하는지’, ‘민주당에 입당하는지’ 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19] 단일화 이후 실시된 차기 서울시장 후보 여론조사에서 박원순은 안철수와의 단일화에 힘입어 지지율이 대폭 상승하여 나경원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20] 집전화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에서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답변이 많았으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을 수 있는 휴대전화 여론조사에서는 박원순이 51.6%를 얻어 32.5%의 나경원을 압도했다.[21]

문재인은 박원순에 대해 "훌륭하기 짝이 없는 분이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를 위해 자기 몸을 다 던져 활동해오신 분이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신다는 것은 아주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평가했다.[22]

시사·문화 평론가 진중권은 "박원순씨가 누구냐구요? 그게 뭐 이를테면...안철수씨가 지지율 50%를 가지고도 양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그런 분이죠." (@unheim)라고 말하기도 했다.

9월 13일 차기 서울시장 민주당 후보로 꼽히는 한명숙이 불출마 선언을 했다.[23] 이로 인해 야권표의 대부분은 박원순으로 몰릴것으로 예상되어 민주당은 꾸준히 박원순 영입을 추진했으나 박원순은 "아직은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겠다"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24]

박원순 후보 지식인·교수 173명 지지 선언

박원순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돕기 위해 교수 및 지식인 173명이 지지 선언을 하였다.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장이이화(역사문제연구소) 등 사회 원로들과 강남훈(한신대강수돌(고려대김호기(연세대김동춘(성공회대박호성(서강대변창흠(세종대조국(서울대) 등의 교수들이 여기에 동참했다.

그들은 2011년 9월 30일 서울 안국동 희망캠프에서 "시민과 민중의 고통을 생각할 때 보수세력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야권연합후보를 선출해야 한다"며 박 예비후보를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당선'으로써 심판할 수 있는 후보"라고 자신했다. 아울러, "촛불집회에서 박원순 펀드에 이르는 이 나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21세기 정치의 세계사적 흐름의 일부이며 또한 그것은 선도하는 사례가 되고 있다"며 '시민후보' 박원순에 대한 기대도 드러냈다.

이들은 "박 예비후보가 '사회적 기업' 모델 창출에 앞장서고 지역 풀뿌리의 대안적 실험들에 대해 각별히 주목했던 점을 평가한다"며 "박 예비후보의 노력들이 기존의 진보·개혁적 세력들의 중요한 정책들과 결합되면서 '위기의 한국·위기의 서울'을 넘어서는 출구를 만들어가길 소망한다"고 밝혔다.[25]

박원순 펀드 38억 조기 마감

'박원순 펀드’가 모금 하루 만에 33억원을 넘기며 52시간만에 조기 마감되었다. 이 펀드는 선거자금이 넉넉지 못한 박원순이 지난해 6·2 지방선거 때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이 경기지사 후보로 나서면서 활용했던 ‘유시민 펀드’를 모방한 것이다. 모금된 펀드는 선거자금으로 쓰고, 12월 25일 이전에 원금과 이자(연리 3.58%)를 투자자들에게 돌려준다. [26] 박원순의 ‘희망캠프’는 “지난 26일 낮 12시부터 시작된 박원순 펀드 모금이 이날 오후 4시에 법정선거비용인 목표액에 도달해 오는 30일까지 예정됐던 모금을 일찍 마감했다”고 밝혔다. 최종 입금액은 38억 8500만원이며, 입금에 참여한 시민들은 모두 5778명이었다. 1인당 평균 67만원씩을 낸 셈이다. 목표액을 모으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총 52시간이었다. 펀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은 모두 7211명에 총 약정액은 45억2300만원이었으나, 이날 오후 4시 전까지 입금을 하지 못한 1433명은 펀드에 가입하지 못했다. 이날 오후 3시 기준으로 최소액인 10만원을 입금한 사람은 모두 2868명으로, 전체 펀드 가입자의 절반 이상이 10만원의 소액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27] 박원순은 이날 오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이같이 밝힌 뒤, "39억을 어떻게 마련할까 걱정스러웠는데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해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라며 펀드에 적극 가입해준 지지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너무 감격스러워 저 사실 울기도 했어요"라고 밝히기도 했다. [28]

단일화 후보 경선

2011년 10월 3일 민주당 박영선, 민주 노동당 최규엽, 시민 후보 박원순 세 후보는 단일화 후보 경선을 치렀다. 3만명의 선거인단 중 60%라는 초유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29] 이 날 시민들은 투표를 마치고도 현장을 뜨지 않고 근처에 머물며 박영선 민주당 후보, 박원순 시민후보, 최규엽 민주노동당 후보와 사진을 찍는 등 '투표소 인증샷 놀이'를 하며 축제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딴지일보 인터넷 라디오 나는 꼼수다의 진행자 김어준, 시사인주진우기자, 시사평론가 김용민, 작가 공지영, 조국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해 시민들과 사진을 찍고 싸인을 해주는 등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이날 오전 “수많은 당내 투표를 치러봤지만 이처럼 이른 시간에 이렇게 많은 젊은 사람들이 투표장에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며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출했던 때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30] 박원순은 이 날 경선에서는 박영선 후보와 접전 끝에 패하였으나 TV토론 배심원단 조사, 일반 시민여론조사를 포함해 이날 실시된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집계한 결과 박원순 후보가 52.15%를 차지해, 45.57%를 얻은 민주당 박영선 후보를 이겼다. 한편 민주노동당 최규엽 후보는 2.28%를 얻었다.

단일화 후보 선출

경선 결과 발표 직후 박원순 후보는 "아무것도 없는 제게 돈과 조직을 만들어 주신 시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면서 "박원순은 하나부터 열까지 보통 시민이 만든 후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열린 대한민국 최초의 야권통합경선에서 변화를 바라는 서울시민이 승리했다"며 "드디어 새로운 서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고 평했다. 또 박 후보는 "우리는 10월26일 옛 시대의 막차를 떠나보내고, 새 시대의 첫차를 타고 떠날 것"이라며 "낡은 시대는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있다. 그들이 정하고 그들이 지시하는 그들만의 리그는 다시는 복귀하지 못할 것"이라고 최종 승리를 자신하기도 했다. 이어 "통합과 변화는 2011년 서울의 시대정신"이라면서 "이제까지 서울시장의 일은 도시의 외관은 바꾸는 것이었지만, 제가 만난 시민들의 공통된 요구는 '내 삶을 바꿔 달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서울시정 10년은 '사람을 위해 도시를 바꾸는 10년'이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31]

또 '시민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전 시장의 서울 실정 10년을 끝낼 준비가 되셨습니까? 저는 이제 우리가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민주당원 여러분께도 말씀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이 써온 역사 위에 새로운 미래를 써 나갈 것입니다.'라며 反한나라당 노선과 민주당과의 통합을 강조하였다.

이에 민주당 천정배(트위터 @jb_1000) 의원은 '축하합니다! 박원순 야권단일후보. 민주당과 시민사회는 한뜻으로 정의와 인권의 길을 걸어왔고 또 걸어가야 합니다 박후보는 좋은 서울시장 깜입니다 그와 우리가 반드시 승리해 복지서울을 만듭시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축하를 전했고, 김부겸 의원(@hopekbk)은 먼저 박원순 후보에게는 축하를, 박영선 의원에게는 고마움을 전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위에서 아래까지 변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며 "저부터 나서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전병헌 의원(@BHJun)역시 "투표장 앞에서 어차피 하나가 될 거라는 (박원순 후보의) 말씀 잘 기억할께요"라며 박 후보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다. 이어 그는 "민주당도 변화와 혁신의 도약대로 만들어가야 된다는 시민들의 요구를 실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32]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역시 '박원순후보는 야권단일 후보인만큼 당연히 진보진영 후보입니다. 전 진보진영은 박원순후보의 당선을 위해 총력을 쏟아야할 것입니다.'(@KwonYoungGhil)라며 야권통합을 강조했다.

민주당 대표 손학규의 사퇴와 사퇴 철회

2011년 10월 4일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범야권 서울시장 후보단일화 패배를 책임지고 당 대표직을 사퇴하기로 결정했다. 손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국민과 당원에 대한 도리"라며 "민주당이라도 책임을 질 것은 책임지는 책임정치가 확립돼야 한다"면서 사퇴의사를 밝혔다고 이용섭 대변인이 전했다.

손 대표는 또 "축복 속에 박원순 후보가 단일후보로 당선됐지만 60년 전통의 제일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라며 사퇴의 이유를 밝혔다.[33] 그는 대표직에서 물러나더라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원순 후보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그는 "(지난 3일 치러진 범야권단일후보 선출 경선은) 야당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인 경선이었다, 남은 것은 야권단일후보 박원순을 당이 총력을 기울여 반드시 당선시키는 것"이라며 "나부터 재보선 선거 지원을 위해 온 몸으로 뛸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 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박원순 통합후보를 보다 떳떳하게 지원하는 길로 믿는다"고 강조했다.[34]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사의를 표명한 것에 대해 박영선 의원은 “마음은 힘들겠지만 승리를 바라는 시민과 민주당을 위해 괴롭고 외로운 십자가를 졌으면 좋겠다”고 했고 박 후보도 “손 대표가 대표로서 가줘야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 경선도 민주당이 진 게 아니라 윈윈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10월 5일 열린 민주당의 당 최고 결정 기구 의원총회에 참석한 민주당 의원 전원은 손학규 대표 사퇴 반대로 만장일치의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손학규는 사퇴 철회 의사를 밝히며 "책임지는 정치인으로서 뜻을 뒤집는 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가져온 신념과 어긋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손학규의 체면이나 신념이 아니라 서울시장 선거의 승리이며 민주진보진영의 통합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라며 "이는 손학규 개인을 위한 게 아니며 남은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당과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헌신을 명하는 것임에 무겁게 여겨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손 대표는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당이 서울시장 후보를 내지 못한 무거운 책임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 과오를 안고 가되, 서울시장 선거 승리와 민주진보진영 통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1/00이라도 잘못에 대한 책임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위한 그의 첫걸음은 "통합 단일후보가 된 박원순 후보는 우리 민주당의 후보"라고 못 박은 데서 시작했다. 손 대표는 "박원순 후보가 당원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며 "박원순 후보로 단일화된 것은 민주당의 패배가 아니라 더 큰 민주당의 승리로 깨달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박원순이 이기면 민주당이 이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35]

박원순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5일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사퇴 번복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는 이날 오후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방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만났다. 박원순 예비후보는 손 대표의 사퇴 번복에 대해 "너무 다행이라 생각한다. 손학규 대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대의를 위해 (사퇴 번복) 결정해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제 민주당과 다른 야당,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승리할 일만 남았다."라먀 "다행스럽다"를 연발했다. 또 그는 "손학규 대표가 민주당 대표로서 의지를 갖고 도와주시는 상황인 만큼 당연히 뵙고 공동선거대책위 구성 등을 충분히 상의할 것"이라며 "후보등록일 이전에 (손 대표를) 뵙고 후보 등록 이후 공동선대위를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36]

단일화 후보 선출 후 여론과 당론

박원순 변호사가 범야권단일후보로 확정된 직후 실시된 긴급여론조사에서 박 변호사가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9.1%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원순 47.1%, 나경원 38.0%으로 거주지역 별로는 한나라당 텃밭으로 여겨져온 강남을 포함한 서울 시내 전 지역에서 박 변호사가 고른 우세를 보였다. 박 변호사는 강남·서초·송파·강동 등 세칭 강남4구에서도 47.0%의 지지율로 40.7%에 그친 나경원 후보를 크게 앞질렀다. 직업별로는 화이트칼라층에서 박 변호사의 지지율(58.5%)이 나 후보(29.7%)를 크게 앞섰으며, 블루칼라, 학생층 등에서도 나 후보보다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나 후보는 자영업자와 주부에게서 박 후보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다.[37]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4일 “박원순 야권 단일 후보의 10·26 서울시장 보선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원순 후보를 위해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게 된 박영선 의원은 “(박 후보가) 절대 병기가 돼서 절대 승리해야 한다”며 “시간이 많지 않지만 우리는 박원순 후보를 반드시 당선시켜야 할 책무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원순 후보도 민주당원들의 열정을 함께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자리를 함께 한 민주당 이인영 최고위원은 “(박 후보는) 이제 민주당의 후보다. 함께 해주시면 더 큰 민주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박원순 후보도 “그럼요. 저 혼자서는 힘들고 (민주당의 지원은) 보완이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38]

박원순 범야권 단일화 후보의 민주당 입당 문제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사퇴 철회를 밝힘과 동시에 박원순 후보의 입당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박원순 후보가 (민주당 입당) 문제에 대해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위해 경선에 담긴 시민과 국민의 뜻이 존중돼야 한다"며 "더 큰 시야로 민주당이 민주진보진영 전체를 품어 진보진영의 용광로가 돼야 한다, 더 큰 민주당 안에서 서울시장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통합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열린 자세를 보인 그는 박원순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직을 맡는 것에 대해서도 "박원순 후보의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겠다"며 수용의 뜻을 밝혔다. "평당원으로서 백의종군의 자세로 박원순 후보의 승리를 위해 맨 앞에 서 몸바쳐 뛰고자 했던 것이 나의 결심"이라며 사퇴의 뜻을 밝힌 이유를 설명한 손 대표는 "사퇴 시점에 대해서는 특별히 생각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지난 3일 치러진 범야권 단일화 경선은 "한국 정치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으로 규정하며 "유모차를 밀고 투표장에 오는 시민들의 물결은 정치와 정당에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이었다, 민주당은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시대적 흐름에 적극 대응할 것"이라며 '쇄신'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39]

같은 2011년 10월 5일 박원순은 민주당 입당 문제에 대해 이희호 이사장과 만난 자리에서 "사실 민주당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며 "민주당이 앞으로 다른 정당과 정치세력을 받아들여 더 커지는 과정을 거친다면 저도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입당한 당원은 아니지만 민주당과 생각과 활동을 같이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40]

'새로운 서울을 위한 희망캠프' 선거대책위원회 출범

2011년 10월 11일 박원순은 선거대책위원회 '새로운 서울을 위한 희망캠프'를 공식 출범시켰다. 범야권 단일화의 결과 민주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야3당이 참여하고 있으며 시민사회, 문화계 인사, 언론계 등이 총 집결하였다.

상임선대위원장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맡았으며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노회찬, 심상정 전 진보신당의 지도 인사와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정동영, 이계안. 문성근 등이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선대위원장직을 맡았다.

범야권 통합후보 경선에서 경쟁한 민주노동당최규엽과 민주당의 박영선 역시 경선 당시의 약속을 지켜 선대위원장직을 맡았다.

고문에는 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 특보단에 최재천 전 의원. 선대본부장에 문용식 나우콤 이장, 정봉주, 천호선 전 의원 등이 참여했다.[41]

서울특별시장 당선

201110월 26일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최종 투표율은 48.6%로 박원순은 전체 투표수 가운데 53.40%인 215만8476표를 획득하여 서울특별시장에 당선되었다.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와의 득표율 차이는 7.19%포인트로 서울특별시 전체 25개 자치구 가운데 서초·강남·송파·용산구를 제외한 나머지 21개 구에서 모두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앞섰다.[42] 박원순은 이 날 새벽 시민들이 모여있는 서울광장에 나와 '깨끗한 축제 같은 선거를 통해서 시장이 되겠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흑색선전과 인신공격이 저를 향했습니다. 하지만 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진실이 거짓을 이겼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겼습니다'라며 당선소감을 밝혔다. 이어 그는 '용산참사와 같은 잔혹한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우리의 고귀한 땅과 주택을 투기의 대상이 아닌, 삶의 휴식이 될 수 있는 고귀한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저는 서울이라고 하는 이 땅에서 굶는 아이들, 어르신들, 가정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인간적 존엄성, 삶의 질과 인간으로 최소의 가치를 서울에서 실현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며 끝으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 시민들과 늘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할 수 있는 지속적 관계를 만들겠다'고 외쳤다. [43]박원순은 별도의 인수 기간 없이 10월 27일 초등학교 5·6학년 무상급식 예산 지원 결재를 첫 업무로 시작하며 서울특별시장 집무에 들어갔다.[44]

논란

  • 임태희 대통령실장 선거개입 논란

2011년 10월 2일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순수한 나눔의 차원이 아니면 굉장히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발언을 함에 따라 선거개입 논란이 일었다. 박 변호사는 이날 한겨레-오마이뉴스가 주최한 범야권후보 초청토론회에 참석해 임 실장의 발언에 대해 "참여연대 시대의 박원순은 재벌개혁의 선봉에 섰고, 아름다운재단 시절 박원순은 재벌과 대기업을 사회에 공헌하도록 유도하는 데 역할을 했다"며 "두 과제는 분리돼 있고 단계적으로 추진해 왔다"고 반박했다. 또 박원순 선대위의 송호창 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대통령실장의 발언이 대통령의 생각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임 실장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며 "청와대가 선거에 실제 개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케 만드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은 입만 열면 대기업의 사회적 나눔을 강조하는 마당에 대통령실장이 자선사업은 대기업의 본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 정권의 이중성을 보여줄 뿐"이라며 "수준낮은 정치공세를 중단하고 선거 과정과 결과를 통해 서울시민과 국민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겸허히 새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45] 이에 대해 임태희 실장은 "그 부분은 일반적인 얘기였다"고 해명하며 자신의 발언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개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나타냈다. [46]


무소속 강용석 의원은 "(박 후보가 만든) 아름다운재단이 대기업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것 외에도 포털사이트 네이버를 운영하는 NHN으로부터도 133억 원의 기부금을 받았다"며 "이 같은 기업 기부금 운영이 연차 사업보고서에선 불투명해 정확한 기업 기부내역을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중앙일보>는 강 의원의 주장을 근거로 "아름다운재단이 국세청에 제출한 공익법인 모금내역 신고자료에 따르면 재단 측이 2000~2010년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은 400여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강 의원이 추가로 공개한 NHN의 경우 국세청 신고자료와 NHN에 따르면 2008년 30억 원, 2009년 27억 원 등 2005년부터 아름다운재단과 공동포털 해피빈을 운영하면서 모두 133억 원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으나 이에 대해 NHN은 3일 직접 보도자료를 내고 강 의원의 주장의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다.

NHN은 "강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133억 원은 아니지만 2005년 7월부터 2009년 5월까지 NHN은 회계적인 의미에서 83억 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다"며 "아름다운재단은 이 돈을 받아서 임의로 쓴 게 아니라 NHN과 맺은 협약에 따라 해피빈에 기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피빈은 NHN이 일반인들의 기부체험과 기부문화 촉진을 위해 2005년 7월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온라인기부포털 사이트"라면서 "당시 사이트를 만들었지만 이용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을 수 있는 재단은 설립되지 않았고 다양한 사회및 복지 단체와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재단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름다운재단과 협약을 맺었고, NHN이 낸 기부금은 해피빈 사이트를 구축하고 일반 이용자들이 기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이용자들에게 '콩' 형태로 제공하는데 사용됐으며 이용자들은 '콩기부'라는 이름으로 본인들이 돕고 싶은 사회, 복지 단체에 기부해왔다"고 밝혔다. 기업인 NHN이 직접 기부를 받고 사업을 할 수 없는 만큼 '중간 매개자'로 아름다운재단과 협약을 맺고 사업을 운영해왔다는 것. NHN은 "기부현황은 해피빈 서비스([[6]])에 모두 공개돼 있다"며 "2009년 5월 '해피빈재단'이 설립되면서 아름다운재단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어, 아름다운재단과의 협약은 종료됐다"고 덧붙었다.[47]


박영선 의원이 범야권 후보 TV 토론 중 박원순 변호사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을 맞았을 때 ‘노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한 탓’이라고 말해 지지자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TV 토론 이후 당시 박원순 변호사의 인터뷰 기사와 본래 내용이 밝혀져 박영선 후보에 대한 질타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노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한 것이 아니라 국회가 권한을 남용했다고 한 요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박영선 의원은 스크립트 상의 오해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박 변호사는 “저는 당시 ‘탄핵무효국민행동의 공동대표’였다”고 말하며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박 의원은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시면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아무리 경선이라고 해도 지엽·말단적인 것을 갖고 이렇게 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반박했다.

또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당시 대통령 유가족 측의 장의위원이었으며 분향소를 찾아 "비통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오죽하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전 국민이 애도하며 노 전 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무척 다행이다. 노 전 대통령은 나와 함께 사법제도 개혁에 많은 노력을 했다. 또한 남북관계 개선과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들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은 인권 문제만이 아니라, 권위주의 혁파와 법치주의 확립에 많은 노력을 했다"면서 "오늘의 슬픔이 헛되지 않도록 국민들이 노력했으면 한다"고 말한 것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48]


  • 월세 250만원 방배동 아파트 거주

2011년 9월 언론들은 일제히 박원순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61평 아파트를 보증금 1억원, 월세 250만원에 거주하는 것을 보도하였다. 박원순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거주 이유에 대하여 “하버드 대학 등에서 유학을 할 때 가져온 자료가 1트럭 분량인데 자료를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 2008년 (넓은 평형으로) 이사를 했다”고 밝혔고[49] , 이로 인하여 논란이 일자 박원순은 자신의 홈페이지인 원순닷컴에 글을 올려 "보증금 1억원에 매달 250만원의 월세가 서민의 시각에서는 결코 '싼'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며 "1년 동안의 검사 생활 뒤 1983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는 서대문구에 140평의 집도 있고 여유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태원에 아파트도 사고 동교동 단독주택에 살기도 했지만 1993년 유학생활에서 돌아와 시민운동을 시작한 뒤 집을 보유한 적이 없다"며 "전세로 시작해 점차 '다운그레이드'된 것"이라고 해명했다.[50]


  •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 논란

2011년 9월 23일 중앙일보는 시민단체인 자유주의진보연합의 논평을 인용해서 박원순이 자신의 저서인 『국가보안법연구3』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보장해야 민주주의다”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51] 이런 자신의 저술에 대해 논란이 일자 박원순은 해당 기사 보도 언론에 대해 『국가보안법연구3』의 실제 문장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보장해야 민주주의다”가 아닌“민주주의는 결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이들 이념을 받아들여 그 사회 속에 하나의 가치체계로서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서구의 여러 선진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금방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정정을 요청했다.[52]


  • 후원금 논란

박원순이 재직했던 아름다운 재단에서 론스타로부터 7억 6천을 기부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풀무원에서 사외이사로 재직하면서 받은 기부금도 애초 알려진 2억9천880만원이 아닌 12억4천67만원으로 추가 확인됐다”“상법상 회사와 거래 관계 등 중요한 이해관계에 있는 법인의 이사. 감사는 사외이사로 둘 수 없게 돼 있다. 상법에서는 기업과 이사 간에 거래가 있을 경우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했을 경우 배임죄로 처벌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53]론스타는 2003년 12월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뒤 고액 배당 등을 통해 4조5000억 원을 번 뒤 2년여 만인 2006년 외환은행 재매각에 나서 ‘먹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박원순 측은“론스타코리아의 법정 분쟁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2009년 5월 남은 기금 9000여만 원을 해당 기업 통장으로 반환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풀무원 사외이사로 재직하며 받은 기부금의 액수에 대해선 해명하지 않았다. 민주당 박영선 후보 측은 “아름다운재단이 론스타에서 기부금을 받은 것은 론스타를 비판해 왔던 시민사회의 일반적 시각과는 다른 것”이라며 “공인 중의 공인인 서울시장에 대한 국민의 도덕적 잣대는 엄격하다”고 비판했다.[54]

송호창 대변인은 반박 보도자료를 통해 "강 의원의 주장은 재단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은 잘못된 주장"이라며 "2004년 론스타펀드로부터 기부금을 받을 당시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기금의 목적은 장학사업이었다. 2006년 론스타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제기된 이후 재협약을 하지 않고 남은 기금을 전액 반환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론스타펀드의 자회사인 허드슨어드바이저코리아(주)는 지난 2003년 12월 아름다운재단에 기금을 출연했고, 2004년 6월 ‘론스타푸른별기금’(소년소녀가장 학업보조비 지급 기금)을 정식 협약했다. 전체 모금액은 기업기부금 외에 다수의 개인 1% 기부자의 매칭기부금을 포함했으며, 2009년 9월까지 5년간 67명의 소년소녀가장에 약 2억2천만원을 지원했다"며 "아름다운재단 이사회는 론스타코리아의 법정분쟁과 기업윤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2008년 6월 협약 종료 후 재협약을 하지 않고 남은 기금을 반환하기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론스타 측에서 재단에 기부한 금액은 총 1억4천여만원이며 반환액은 집행잔액 9천여만원"이라며 "론스타 측에서 한 때 잔액수령을 거부해, 약 1년 뒤인 2009년 5월 25일 잔액을 해당기업 통장으로 반환했다"고 밝혔다.[55]

또 박원순 변호사는 이날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개탄한 뒤, "저는 그런 부적절한 후원을 받은 적이 없고요, 개인적으로도 개인적인 것은 물론이고요. 그 다음에 뭐 제가 아름다운재단이나 아름다운가게 같은 경우는 공익재단으로서 이런 후원을 받아서 늘 또 공정하게 공익을 위해서 썼고요. 또 그런 관련 내역들은 전부 공개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근거 자료가 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그것이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재단들은 원래 모금기관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일반 시민들로부터나 또는 그런 기업으로부터 그런 후원을 받아서 그 돈으로 좋은 일을 배분을 저는 제대로 해온 거라고 저는 생각한다"며 "그 점에서 저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간에 이런 문제는 사실 뭐 그렇다고 특별히 저는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서로 이런 문제제기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희망제작소가 삼성으로부터 7억원의 기부금을 받은 이후에는 삼성에 대한 비판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지적이 있다'는 진행자 질문에 대해선 "이건 그 당시에 이미 그렇게 논란이 됐었던 것"이라며 "미국 같은 경우는 한 700개 정도의 그런 지역재단들이 그 지역의 여러 가지 문제나 또 취약계층에 대한 그런 후원사업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느 자리에서 그런 지원 가능하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서 추진하다가 말씀하신 것 같이 그런 또 여러 가지 여론이 있어서 그렇게 이제 축소돼서 집행이 됐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어 "삼성에 대해선 물론 우리 사회에서 참 곱지 않은 시선들이 있고 특히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참여연대 있을 때는 뭐 삼성에 대한 사실 비판이 주를 이뤘죠. 그 당시에는"이라며 "그런데 아름다운재단 이후, 2002년 이후에는 제가 또 다른 형태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뭐 그 비판의 날이 갑자기 이렇게 둔해졌다, 저는 그렇게 생각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56]


  • 아름다운 재단과 가게, 130여개 중 10여곳 부인 회사가 인테리어 참여

박원순의 부인이 세운 인테리어 회사 'P&P디자인'에 박원순이 이끈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의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을 제기되었다. 현대모비스가 아름다운재단에 교통사고 유자녀의 학자금 지원 용도로 2003년부터 총 5억7000만원을 후원했다는 것인데 현대모비스 같은 대기업이 당시 설립 1년도 안 된 강씨 회사에 2000년부터 3년여간 일감 10여건을 준 데 대해 박 변호사의 입김이 작용했던 것이라는 의혹이다. 박원순 측은 이에 대해 "아름다운가게가 전국에 130여개 있는데 2000년대 초반 시작 단계에서만 10여개 정도 부인이 도와줬을 뿐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인테리어를 했다"고 해명했다.[57]

또한, 부인 회사가 실내건축공사업 등록을 하지 않은 무등록 업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나라당이 "손위동서를 통한 현대모비스 공사 특혜 의혹 등보다 더 죄질이 나쁜 명백한 범죄행위"라고 지적한데 대해 박원순측은 "세무서에 사업체 신고를 해 사업자 등록증을 갖고 있으며 시도지사에 등록하는 조항을 몰라 신고하지 않았지만 사업을 영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58]


  • 박원순 서울대 법대 학력위조 논란

박원순은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진학하였으나, 2학년으로 올라가 과를 정하기 전에 제적당하였고, 그 후에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박원순은 자신이 펴낸 《야만시대의 기록》에서 '1975년 서울대 법대 시절 제적당하고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고 밝혔다. 언론에서도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제적당한 것으로 보도된 적이 있으나, 하지만 정정한 경우는 없었다.[출처 필요] 또한 여러 방송 인터뷰에서도 서울대 법대에 다니지 않았다고 정정하지 않았다.[59]

한편,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제적생들은 1980년 이후 복학해 원하는 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며 그의 학력위조 의혹에 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60] 박원순 변호사 측 송호창 대변인은 "당시 사회 계열에 다닌 학생들은 통상 법대에 들어가려고 했기에 법대에 다닌다고 표현했다"며 "박 변호사가 직접 법대 1학년에 다닌다고 표현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송 대변인은 또한 "책에 법대 중퇴라고 나온 점은 박 변호사가 면밀히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61] 또한 박정희 유신체제 반대 학생운동을 하다가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된 박원순은 1980년 서울대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으나 스스로 거부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62]

  • 기타

딸이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법대로 전과한 데 대한 의혹에 대해 서울대 교무처는“면접에 참가한 교수들의 명단은 밝힐 수 없지만 논술시험과 학업성적 등 학칙에 따라 전과가 이뤄지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박 후보 딸이 전과하기 전까지 주로 교양과목 강의같은 비교적 학점이 후한 과목 위주로 '학점관리'를 한 것 같다고 밝혔다. 또한 스위스로 사치성 유학을 떠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스 빌스도르프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해명했다. [63]

아들이 공군훈련소에 입소했다가 사흘 만에 귀가조치된 데 대해서는 고교시절 축구 시합에서 부상 당한 후유증 때문으로 10월 말 재검후 다시 입대 예정이라 밝혔다. [64]

강남에 또 다른 전셋집이 있다는 주장엔 “배우자가 회사 법인(P&P 디자인) 설립등기를 하면서 등록된 예전 주소가 등기 이후 변경되지 않아 불거진 해프닝”이라고 해명했다. [65]

대기업 사외이사 경력도 논란이 되었다. 2004년 3월~2009년 2월 까지 포스코 사외이사를 맡으며 대략 7,000만원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 또한 한나라당은 박원순이 포스코와 풀무원 홀딩스의 사외이사를 지내면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참가한 표결 307회 가운데 단 1회를 빼고 모든 안건에서 찬성표를 던졌다"고 밝히며 외부 감시자로서의 역할은커녕 도리어 재벌이 시키는 대로 거수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 측은 '사외이사직을 통해 받은 보수는 희망제작소를 위해 사용했다"고 해명하고, 표결은 이사회에 앞서 열린 소위원회 등에서 소수 의견을 충분히 제시, 최종안에 반영해 반대표를 던질 필요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66]


네거티브에 대한 박원순의 입장

박원순은 야권 단일화 경선 직후의 기자회견에서 '희망의 시민 여러분, 낡은 시대는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하고 그들이 지시하는 그들만의 리그는 다시 복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시대를 거울삼아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습니다.', '저는 단 한 마디의 네거티브도 없이 경선에 승리했습니다. 한나라당과 청와대까지 가세한 파상공세를 물리쳤습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라며 소감을 드러냈다.

어록

  • 해방과 동시에 당연히 처단되었어야 할 친일부역자들이 새로운 해방조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 아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과 고난을 당해야 했다.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에서 독립운동가와 그 유족들은 마치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이 땅은 정의는 실종되고 힘에 의한 통치가 지속됐다. 민족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모리배들이 득세했다.[67]
  • 대부분 간첩단사건은 실재했다기보다는 당시 정치적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조작되었음이 밝혀졌다...중앙정보부는 간첩단사건과 조작사건을 자유자재로, 무소불위로 만들어냈으며 그 모든 사건에서 고문의 호소와 주장이 이어졌다. 이미 검찰과 사법부는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조작·송치하는 사건에 대해 무혐의 또는 무죄로서 대응할 힘과 의지를 잃은 지 오래였다.[68]
  •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는 사건이 ... 참혹한 고문이 따른다. 일반적으로 조작된다는 사실과 통하는 이야기...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국민생활 전반에 걸친 족쇄였으며 국가의 진취적 발전을 가로막는 쇠사슬이었다. [69]
  • 북한에 대해서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어서 워낙 폐쇄적인 국가이지만 통제된 국가에서는 고문이 있을 가능성이 많죠. 어떤 고문이나 권위주의적인 폭압적 통치는 분명히 저는 있을 것이라고 보고요, 그것은 국제사회가 개입을 해야죠.[70]
  •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시민운동의 길을 선택했다. 세상을 바꾸는 착한 일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사회적 기업을 설립했다 - 박원순 책 천개의 직업 중에서
  •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인생에서 반드시 이뤄야 할 자신만의 소명과 미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찾아내는 사람에게는 직업이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박원순「천개의 직업」중에서
  • 정의는 인터넷 클릭 한 번으로도 찾을 수 있다. 정의는 달력에 투표일을 동그라미 치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정의롭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표를 행사할 수 있다. <'박원순의 아름다운 가치 사전' 중에서>
  • 호기심을 일궈내려면 편견이 없어야 한다.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고정된 관념과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 호기심이 생기기 어렵다.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다. <'박원순의 아름다운 가치 사전' 중에서>
  • 가장자리란 이 세상에서 가장 허름하고 가장 낮은 자리를 뜻한다. 배고프고, 고생스럽고, 불편한 곳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귀한 곳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겸허, 감사, 인내, 희생을 가르쳐주는 산 교육장이기 때문이다. <'박원순의 아름다운 가치 사전' 중에서>

학력

  • 197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제적(학생운동관련)[71]
  • 1985년 단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 1991년 런던정경대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디플로머 취득 (International Law)
  • 1993년 미국 하버드대 법대 객원연구원(Visiting Fellow)

약력

  • 2011년 서울특별시 시장
  • 2009년 희망과 대안 공동대표
  • 2002년~ 2009년 아름다운가게 총괄상임이사
  • 2008년 람사총회 홍보대사
  • 2007년 현대기아차 그룹 사회공헌위원회 위원
  • 2007년 한국갱생보호공단 이사
  • 2006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2005년 STANFORD UNIVERSITY VISITING PROFESSOR
  • 2004년 포스코 사외이사
  • 2004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 2003년 한국방송공사 이사
  • 2003년 풀무원 사외이사
  • 2002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학대 사회과학부 NGO연계전공 강사
  • 2002년 법무법인산하 고문변호사
  • 2002년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
  • 2001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
  • 2000년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공동대표
  • 2000년 방송위원회 법률자문특별위원회 위원
  • 1999년 한국인권재단 이사
  • 1999년 - 2002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 1998년 청명문화재단 이사
  • 1996년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사무처장
  • 1995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공동대표
  • 198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학술간사
  • 1986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 1983년 - 2000년 법무법인나라종합법률사무소 변호사
  • 1982년 대구지검 검사
  • 1980년 사법시험 합격(22회)
  • 1979년 춘천지방법원 정선등기소장 및 즉결심판소장
  • 1978년 법원고등고시2회 합격

수상 경력

저서

  • 세상을 바꾸는 천 개의 직업 - 문학동네, 2011년
  • 올리버는 어떻게 세상을 요리할까? - 이매진, 2011년
  • 마을회사 - 검둥소, 2011년
  • 마을, 생태가 답이다 - 검둥소, 2011년
  • 열혈청춘 : 우리시대 멘토 5인이 전하는 2030 희망 프로젝트 / 도서출판 휴(休), 2011년
  • 행복한 진로학교 : 7인의 멘토가 제안하는 직업찾기 발상전환법 / 시사IN북, 2011년
  • 원순 씨를 빌려 드립니다 / 21세기북스, 2010년
  •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 - 한겨레신문사, 2010년
  • 마을이 학교다 - 검둥소, 2010년
  • 희망을 심다 - 알마, 2009년
  • 고속도로 통행권에 복권을 붙이면 좋겠네- 중앙M&B, 2007년
  • 야만시대의 기록 1.2.3권 /역사비평사, 2006년
  • 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다 /나남, 2004년
  •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한국 인권 변론사, 2003년
  •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나눔 /중앙M&B, 2002년
  • 한국의 시민운동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당대, 2002년
  • 박원순변호사의 일본시민사회 기행 /아르케, 2001년
  • 국가보안법 연구 1.2.3권 /역사비평사, 1989년-1991년
  • 내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세기의 재판이야기 /한겨레 신문사, 1999년
  • NGO-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예담, 1999
  • 한국의 과거청산연구 -역사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 한겨레신문사, 1996
  • 일본의 전쟁범죄연구 -아직도 심판은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사, 1995

논문

  • 일본 전쟁 범죄 처벌, 지금도 가능한가, 1993
  • 동경전범재판, 그 능욕과 망각의 역사. 1994
  • 세계 각국은 과거사를 어떻게 처벌했는가, 1995
  • 부패방지의 제도적 개혁방안, 1997
  • 한국시민사회의 제도적 개혁과제, 1998
  • 도쿄역사여성법정 참가기, 2000
  • 비영리단체의 재정 투명성, 2004

같이보기

주석

  1. 박원순과 문재인, 조영래와 노무현…그리고 '운명' 프레시안
  2. 박원순 변호사가 살아온 길 네이버블로그 지구친구
  3.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 박원순, 한국 시민운동사의 산 증인 박원순 변호사가 살아온 길 시사서울
  4. 나경원-박원순, 이렇게 크게 다를 줄이야 오마이뉴스
  5. [기자의 눈이영미/‘군위안부’와 소화] 동아일보
  6. 여성국제전범법정, 히로이토 전 일본천황 등 8명기소 동아일보
  7. 도쿄 여성국제점범재판 日우익 심장부서 '위안부 심판' 한국일보
  8. 아름다운 재단 연혁 아름다운 재단
  9. 아름다운 가게 사업소개 아름다운가게
  10. 김종우 기자.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부산일보. 2010년 4월 10일에 확인함. 
  11. ‘대한민국’서 내 이름 빼라… 국정원 ‘박원순 소송’ 취하 네티즌 청원 봇물 경향신문
  12. ‘피고’ 박원순, ‘원고’ 대한민국에 승소 경향신문
  13. “박원순 변호사 ‘결식 제로’ 운동… 나흘 만에 500명 호응”. 노컷뉴스. 
  14. '결식제로' 캠페인 일주일만에1억 모금”. 미디어오늘. 
  15. 아무 조건 없습니다” 안철수 깨끗한 양보 한겨레 2011년 9월
  16. 박원순 "안철수 결단에 놀라···주변사람 모실 것" 미디어오늘 2011년 9월
  17. 안철수-박원순 ‘아름다운 합의’ 17분 미디어오늘 2011년 9월
  18. 박원순 “단일화 정치쇼? 이런 쇼는 더 많은 게 좋은 거 아닌가?” 한겨레 2011년 9월
  19. 박원순, 안철수 지지율 흡수 여부가 변수 한국일보 2011년 9월
  20. 박원순 ‘안철수 지지’ 업고 나경원과 오차내 접전 경향신문 2011년 9월
  21. MBC 여론조사, 안철수 59%, 박근혜 33% 미디어오늘 2011년 9월
  22. 문재인 “안철수 독자길 걸으면 한나라 어부지리” 경향신문 2011년 9월
  23. 한명숙 "서울시장 보선 불출마 2011년 9월
  24. 박원순 "민주당 입당 적절치 않아"…한명숙 불출마 선언 mbn 2011년 9월
  25. "'박원순 흠집내기' 열중하는 보수, 의식수준 미달" 교수·지식인 173명 지지선언... "박원순, 보수세력에 맞설 최선의 연합후보"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30일
  26. ‘박원순 펀드’ 돌풍… 하루 만에 33억원 경향신문
  27. 박원순 펀드 ‘돌풍’…사흘만에 목표액 38억여원 넘겨 한겨레 20110928
  28. 박원순 "펀드 30억 돌파, 너무 감격해 울어" "펀드에 가입해준 5005명에게 너무 고마워" 뷰스앤뉴스 20110928
  29. 박원순, 서울시장 단일후보로 확정 "10월 26일 새 시대의 첫 차 타고 떠날 것" 국민참여경선 투표율 59.59% '흥행 대박' 오마이뉴스 11.10.03
  30. 많은 젊은사람이 투표장 온적 거의 없었다” 한겨레 11.10.03
  31. "변화 바라는 시민의 승리"…박원순, 野 서울시장 후보 확정 프레시안 2011-10-03
  32. “3일 오후 8시 나경원 지역구 한복판은 '박원순 도가니'. 프레시안. 
  33. 노컷뉴스
  34. 오마이뉴스
  35. '사퇴 철회' 손학규 "박원순은 민주당 후보" 오마이뉴스
  36. 박원순 "손학규 결단에 감사...전화위복 됐다" 오마이뉴스
  37. [1] 뷰스앤뉴스
  38. [2]
  39. '사퇴 철회' 손학규 "박원순은 민주당 후보" 오마이뉴스
  40. 박원순 "손학규 결단에 감사...전화위복 됐다" 오마이뉴스
  41. 박원순 선대위 명단 뉴시스
  42. 박원순, 7.2%p 차로 나경원 이겨 뷰스앤뉴스
  43. "오늘 선물 드리겠다...서울광장은 시민의 것" 오마이뉴스
  44. 박원순 시장, 초등 5·6학년 무상급식 결재로 업무 시작 한겨레
  45. “박원순 "임태희 발언, 선거 개입으로 심각한 문제". 뷰스앤뉴스. 
  46. “임태희 "박원순 후원 발언, 일반적 얘기". 조세일보. 
  47. “강용석, 박원순 도덕성 흠집내려다 계속 '헛발질'. 프레시안. 
  48. {{뉴스 인용 |제목="그 나라엔 바보 같은 노무현이 있다네" |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0704 |출판사=오마이뉴스 |작성일자=09.05.26}
  49. “´박원순, 강남 61평 거주´에 네티즌 "시민운동 괜찮은 직업". 데일리안. 
  50. “박원순, 고액 월세 해명…"의도적 곡해". 뉴시스. 
  51. ““박원순, 보증금 1억·월세 250만원 강남 61평 아파트 거주””. 중앙일보.  다음 글자 무시됨: ‘article’ (도움말); 다음 글자 무시됨: ‘default ’ (도움말);
  52. “[알려왔습니다] 중앙일보 9월 23일자 6면”. 중앙일보.  다음 글자 무시됨: ‘article’ (도움말); 다음 글자 무시됨: ‘default ’ (도움말);
  53. [3]
  54. [4]
  55. “박원순측 "강용석, 제대로 확인하고 공격하라". 뷰스앤뉴스. 
  56. [뷰스앤뉴스, 박원순 "대기업 보수 다 기부했고 스톡옵션도 포기했다"[5]
  57. 네티즌 제기 박원순, 사회재단 일감 부인 회사에 몰아줘 박원순 해명 부인이 아름다운가게 초기 10여곳 도운 것
  58. 박원순 부인 인테리어 업체 '무면허' 공사
  59. 백지연"서울대 법대?" 박원순 "예"
  60. 박원순 '학력', 내가 아는 진실 오마이뉴스
  61. 법대 다닌 적 없는 박원순 "법대 중퇴했다" 논란
  62. 박원순과 문재인, 조영래와 노무현…그리고 '운명' 프레시안
  63. 한나라 “빚 4억 박원순 … 한 달 생활비 1500만원 어떻게 마련하나” 중앙일보
  64. 박원순 '강남 고액월세-아들 군문제' 적극 해명 아이뉴스24
  65. 박원순, 강남아파트 등 신상 의혹 적극 부인 노컷뉴스
  66. 한나라 박원순에 파상공세 "사외이사로 대기업 거수기" 노컷뉴스
  67. <역사를 세워야 민족이 산다>, 박원순 저
  68. <야만시대의 기록>, 314p
  69. <국가보안법 연구>, 박원순 저
  70. 서울시장 출마 선언한 박원순은 누구?《빅뉴스》2011년 9월 6일
  71. 긴조 9호세대 비사, 《주간경향》, 2004년 2월 27일

바깥 고리

전임
권영규 (권한대행)
제35대 서울특별시장(민선)
2011년 10월 27일 ~
후임
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