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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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1일 (수) 21:05 판

동래성 전투
임진왜란의 일부
날짜1592년 음력 4월 15일
장소
결과 일본의 승리, 동래성 함락
교전국
조선 일본
지휘관
송상현
이각
박홍
조영규
이언성
홍윤관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2500~3000명
군민 포함 2만 명
병력 3만 명
피해 규모
송상현 장군 및 군민 3000명 전사, 500명 포로 100명 전사, 400명 부상

동래성 전투1592년 음력 4월 15일 부산진 전투에 이어 일어난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로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왜군을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전투 과정

1592년 음력 4월 15일 일본군은 부산 동래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경상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이 지원을 왔으나 왜군의 수를 보고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도망쳐 버렸다. 양산군수 조영규 역시 성 남쪽 4km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피하기 위해 조선군과 협상을 위해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우게 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어 송상현부산진 전투 상황을 보고 받았는지 두꺼운 통나무로 방어책을 만들었으나, 방패가 얇아 조총을 막아주지 못하였다. 조선군이 통나무를 이용한 방어물을 준비했듯이 일본군 역시 성의 공략을 위해 허수아비를 장수처럼 변장시켜 장대 끝에 꽂아 수비군을 유인하였다. 이것은 조선군의 주무기인 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송상현의 부하 조방장 홍윤관김희수, 대송백도 전사하고 그리고 왜군을 보고 도망갔던 양산군수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이 응원차에 달려와 싸웠으나 조영규는 전사하고 이언성은 포로가 되어 훗날 이덕형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일본의 지휘관은 송상현의 용감함에 감탄하고, 그의 사체를 정성스럽게 메워, 그 무덤에는 "충신(忠臣)" 이라고 쓴 목제의 비석을 세웠다.

결과 및 영향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부산진성동래성 함락 후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경상도충청도로 진격해 각지의 성들을 함락시키고 충주까지 진격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조선군을 궤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