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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려 태조|태조 왕건]] 때의 호족이자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된 원몽(元蒙)의 증손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된 원숙정(元淑貞)의 손자이다.
[[고려]] [[고려 태조|태조 왕건]] 때의 호족이자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된 원몽(元蒙)의 증손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된 원숙정(元淑貞)의 손자이다.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으나 그의 대에 이르러 원준량이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그의 형 원수량은 [[군자감]]부봉사를 역임하여 다시 일으켜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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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료 생활 ===
=== 관료 생활 ===

2011년 7월 22일 (금) 01:34 판

원준량
출생?
조선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 도일리
사망?
거주지조선
성별남성
국적대한제국 조선
별칭증 평원부원군
학력무과 급제
직업군인, 무신, 관료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아버지 원임
배우자남원양씨, 양성지의 후손
자녀원균, 원연, 원용, 원전
친척손자 원사웅, 손자 원사립
원준량(元俊良)
별명 증 평원부원군
출생지 조선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 도일리 (지금의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복무 조선
복무기간 ? ~ ?
기타 이력 추증 의정부영의정
추봉 평원부원군

원준량(元俊良, ? - ?)은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 군인, 정치인으로 임진왜란 때의 장군 원균, 원연, 원용의 아버지이자 원사웅의 조부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수경상좌병사(守慶尙左兵使)에 이르렀고, 사후 아들 원균임진왜란 당시 훈공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추증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원주이다. 경기도 평택군 출신.

생애

출생과 가계

원준량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된 원임(元任)의 둘째 아들이다.[1] 고려 태조 왕건 때의 호족이자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 병부령(兵部令)을 지낸 원극유(元克猷)의 후손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증직된 원몽(元蒙)의 증손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된 원숙정(元淑貞)의 손자이다.

그의 선조들은 원주 출신이었으나, 증조 할아버지 원몽이 처가가 있는 경기도 평택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으나 그의 대에 이르러 원준량이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그의 형 원수량은 군자감부봉사를 역임하였으며, 동생 원국량은 직장을 역임하여 다시 일으켜세운다.

관료 생활

무과에 급제하여 1544년(중종 39) 선전관이 되고, 이후 춘추관기사관,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절충장군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전라우수사 재직 중, 1552년(명종 6) 제주도에 침투한 왜군을 격퇴하지 않았다 하여 탄핵을 받고 그해 8월 파지도(波知島)로 유배되었다.

뒤에 석방되었다. 1555년(명종 10) 달량포에 침입한 왜군을 막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1557년(명종 12)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림파의 비판을 받고 사퇴, 낙향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1562년 6월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부임했으나 뒤에 사헌부의 반발로 체직당하였다. 이후 사림파와 갈등하다가 1563년(명종 18)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후 길주목사에 이르러 1566년 12월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생애 후반

1567년(선조 1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오위장(行龍驤衛副護軍兼五衛將)이 되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그뒤 1577년(선조 1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사퇴하고 고향인 평택 도일동으로 낙향하였다.

사망

사망연대는 미상이며 기일은 1월 27일이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군 평택읍 여좌동에 안장되었으며 쌍봉으로 안장되었다.

사후

후일 아들 원균의 선무훈공으로 1604년(선조 37)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관상감사에 추증되었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남원 양씨 양성지의 후손 양희증(梁希曾)의 딸 증 정경부인 남원양씨와의 사이에서 원균, 원연, 원용, 원전을 두었다.[1]

1788년(정조 24년) 신도비가 세워졌다.

가족 관계

기타

아들 원균, 원연, 손자 원사웅이 모두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그러나 원사웅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으므로 후사는 끊기지 않았다.

참고 문헌

관련 항목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