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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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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9일 (일) 19:35 판

이완용
출생1857년 6월 7일
조선 전라북도 익산군(현재의 익산시) 망성면
사망1926년 2월 12일(1926-02-12) (향년 68세)
일본제국 한국 경성 옥인동 자택
사인폐렴과 해소 등의 합병증
거주지전라북도 익산군->경기도 광주군 낙생면(현재의 성남시)->조선 한성부->대한제국 경성부->일본 제국 경성부
성별남성
국적조선의 기 조선,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학력한학 수학
직업문신, 관료, 외교관, 정치인
종교유교 (성리학)
부모친아버지 이석준(李奭俊), 양아버지 이호준(李鎬俊), 양어머니 여흥 민씨
배우자조씨
자녀(손자)이병길(李丙吉), 이병희(李丙喜), 이병주(李丙周), 이병철[1]
친척이복형 이윤용, 조카 이명구, 사돈 이준용, 사돈 흥선대원군, 흥친왕, 고종, 이준용

이완용(李完用, 1857년 음력 6월 7일 ~ 1926년 양력 2월 12일)은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파 출신 관료이자, 독립협회 위원장이었으며, 후에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중 한 사람이며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시킨 장본인으로 오늘날 친일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고 있다.[2] 그러나 친일파의 수괴로 지탄받는 점을 놓고는 다른 친일파들이 책임회피를 목적으로 그에게 책임전가를 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출처 필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그리고 1910년 대한제국총리대신을 역임했다.

총리대신 재직 중 일본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자 그는 고종 대신 순종이 사무를 대리하는 것으로 협의를 보려 하였으나, 고종은 퇴위하였고 이후 고종 퇴위의 주범으로 비난받으면서 매국노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에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후작으로 승급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등을 지냈다.

이석준(李奭俊)의 아들로 일가 아저씨뻘 되는 이호준(李鎬俊)의 양자가 되었다.[3] 흥선대원군과 인척관계이기도 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세자시절의 순종을 가르쳤다. 자(字)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본관은 우봉(牛峰)이다. 전라북도 익산(益山) 출신[4].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배경

이완용은1858년 6월 7일 경상북도 대구시[4] 망성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우봉 이씨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어머니)는 신씨였다. 경기도 광주군 출생 설이 있었으나 1984년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경상북도 대구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4] 뒤에 그의 아버지 이석준이 가솔들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이었다. 이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5]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이순(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간(李人+間)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으로 가난하였다.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5] 따라서 그의 생부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5] 이완용은 자신의 생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완용의 생가의 집안 형편이나 내력, 가족 관계 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5] 이완용이 태어날 무렵 어머니 신씨는 태몽을 꾸었고, 아버지 이석준의 첩은 뇌성벽력에 가까운 천둥 번개소리를 들었다 한다.

그의 생모 신씨가 산기로 신음하다가 갑자기 고통이 가시면서 스르르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말을 탄 수백명의 병사가 집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꼬리는 모두 집안으로, 머리는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꿈에서 깨어나자 곧 순산했다.[6] 이완용의 서모[6]가 부엌에 들어가 산모에게 줄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변해 비바람과 뇌성병력이 그치지 않았다. 너무도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다가 하늘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다시 부엌에 들어가 보니 그릇들이 부서지고 날아가서 온전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직 쌀을 담은 그릇만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6]

유년기

이완용은 6살 때 아버지 이호석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워낙에 총명해서 몇 달만에 다 마치고 이어 동몽선습을 배웠다.[6] 7살에 효경, 8살에 소학 등을 끝내 주위에서 모두 놀랍게 여겼다. 총명한데다 배우기를 좋아해서 밤에 곤하게 잠을 자다가도 소년 이완용은 아버지가 일으켜 세워 어느 구절을 외워보라고 하면 입에서 줄줄 흘러나왔다고 한다.[6]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가난한 생활을 했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으나 12살이 되던 무렵, 일가 아저씨뻘인 중추부판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형편이 달라졌다. 이호준(李鎬俊)은 이조참의, 승정원 동승부지,한성부판윤등 여러 고위직을 지닌 관료이자 흥선대원군과 친한 친구 관계였으며, 그의 사위 조성하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호준의 서자 이윤용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결혼하여 인척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양아버지 이호준은 생부 이석준과 족보상 촌수로는 32촌이었다.

이완용의 16대 방조 전의 이주(李周)의 후손이었던 이호준은 이주-이길배를 거쳐 길배의 아들 이기의 아들 성균관대사성 이승녕의 후손이었다. 이승녕은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지만 손자 참봉 이영준(李英俊)이 후사를 잇지 못해 양자를 들이면서 8번 양자를 들이게 된다. 이호준만 해도 이완용의 양할아버지 이식(李埴)의 양자였다.[7]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의 가난한 시골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이완용은 1867년 4월 20일 같은 집안의 먼 친척인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8] 한편 생부 이호석도 기회가 되어 관직에 올라 선공감감역을 지내게 된다.

소년기

양자 입양

이날 이완용은 한성부에서도 양반 벼슬아치 동네로 소문난 안국방의 이호준의 집에 들어가 양부모에게 인사를 하였다. 상견례가 끝나고 양어머니 민씨가 밥상을 잘 차려서 들어왔다.[8] 이완용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민씨가 "고기가 질기면 뱉어라"고 말하자 그는 "한번 입에 넣은 것을 어떻게 뱉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고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웃었고 이호준 역시 내심 기특하게 생각했다고 한다.[8]

이호준에게는 서자(庶子) 이윤용과 딸만 있었을 뿐, 정실 부인 소생 적자(嫡子)는 없었고, 이완용이 그의 양자로 출계하게 된 것이다. 당시 후계자를 위해 가문에서 총명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 것은 출세에 필요에 의하여 부자관계를 맺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기에 이호준의 양자로 입적한 이완용 역시 명문가의 집안으로 입적되면서 자신에게 권력의 핵심부로 진출할 수 있는 출세의 길을 보장하는 발판을 마련받아 학문을 익히면서 성장해 나갔다.

이완용이 양자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를 데리고 어느 세도가의 잔치에 갔다 집에 돌아온 양모 민씨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완용을 꾸짖었다.[9]

"전에 어느 잔치 석상에서 보니 아무개 집 아이는 벌써 어린 티를 벗어나 자태가 의젓해서 사람들이 모두 대신감이라고 칭찬하더라. 그런데 오늘 너에 대해서는 미천한 인물이라고 손가락질을 하며서 어린 티가 줄줄 흐른다고 험담을 했다. 너도 눈과 귀가 있으니 이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너는 이런 말을 듣고도 분하지도 않느냐.[9]"

이완용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숙이고 "어머니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며 빌었다. 이후부터 그의 행동과 말이 전과 완전히 달라져 차츰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임양 직후 시골 출신이 그가 한성의 명문대가 자제들에 비해 얼마나 촌스럽게 굴었으며 또한 멸시를 받았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9]

효성 지극한 효자

이완용은 양아버지 이호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집안 조상들도 지성으로 섬겼다. 이호준은 말년에 삼청동 별장에서 거주했는데, 이완용은 당시 삼청동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지금의 남대문 밖 중림동에 분가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공무로 바쁜 중에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양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10] 한편 이완용은 동리 어른들을 보면 공손히 인사를 하는 예의바른 청년이었고, 한번도 양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으며, 양아버지 이호준의 서자인 이윤용을 서자(庶子)라 하여 무시하지 않고 깎듯하게 형님으로 받들었다.

이호준은 양자를 들였지만 살아 생전에 자신의 친핏줄인 서자 이윤용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고관대작인 아버지가 그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 조차 그는 개의치 않고 서운한 기색 하나 나타내지 않았다. 이완용은 "나는 다른 사람의 양자다. 나를 양자로 삼은 것은 오로지 조상의 제사를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양자로 들어온 이후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없다 하였더라도 어찌 나의[10] 책임을 소홀히 하여 나를 양자로 데려온 본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9]" 라고 말하면서 일년에 열두 번씩 돌아오는 제사와 네 번의 절사, 한달에 두 번씩 치르는 차례상을 지성으로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도 출근하지 않고 사람도 접촉하지 않으면서 하루 종일 의관을 갖추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9]

처세술

이완용은 처세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양아버지 이호준의 7대조인 이상은 호가 타우이며 경종 때 이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내다. 이상은 유명한 유학자 신재 김집에게 학문을 배웠고, 노론의 태두인 우암 송시열의 천거로 대간직에 올랐으나 당쟁에 휘말려 옥사했다.[11] 또 이상의 바로 아래 즉 이호준의 6대조이나 귀락당 이만성 역시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만성은 우의정을 지낸 이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상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부자가 모두 송시열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노론으로서 소론이 주도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11] 받던 중 옥사했다. 타우와 귀락당 부자 2대가 연달아 당쟁에 휘말려 옥사를 한 것이다.

고종 재위기간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민비시해, 아관파천 과 같은 정치적 사변이 끊이지 않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정객이 참살당하거나 외국에 망명하고 아니면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갔다.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은 부침을 거듭해서 계속해서 온전하게 자리를 지킨 자를 찾기가 힘들었다.[12] 그런데 이런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이호준만은 이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 단 한번도 휘말리지 않고 무려 30년 이상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다. 이것은 조선 말기의 정치사에서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로 미루어 그는 처세의 달인 중에서도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12]

이호준의 이러한 처신은 이완용에게는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이호준의 이와 같은 처세술을 이어받은 탓일까. 이완용 역시 한일합방 때까지 20여 년 동안 조선왕조에서 벼슬살이를 했지만 단 한 차례도 감옥에 가거나 귀양살이를 한 적이 없다. 음모와 중상 모략이 끊이지 않고 그로 인한 피바람이 가실 날이 없던[13] 조선왕조 5백년의 정치사를 통해 부자 2대가 50년 가까이 함께 조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귀양 한번 가지 않은 경우는 손을 꼽을 정도로 드문일이다. 이것은 이호준의 7대조 이상과 6대조 이만성이 연달아 당쟁에 휘말려 옥사한 것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조상들의 이런 참화가 그들 부자를 보다 기회주의적인 처신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13]

과거 시험 준비

이완용은 입양 다음해부터 독선생을 모시고 본격적인 과거 준비에 들어간다.[14] 이호준은 그의 재주에 크게 기대를 걸었음인지 이완용의 교육에 대단한 정성을 쏟고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충청북도 전의군의 선비 정익호를 안국동 집에 초빙해서 스승으로 앉히고 대학과 논어를 배우도록 했다. 16세 때부터는 명필로 소문난 이용희를 모셔와 친구와 함께 서예를 익히게 했다.[14] 이것이 훗날 그가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리는 밑바탕이 되었다.[14]

13세 되던 3월에 그보다 한살 위인 양주 조씨 조병익의 딸과 혼인했다.[15] 이 때 이호준은 전라도 관찰사로 전주에 부임해 있었는데 이완용은 수시로 전주감영에 내려가 부친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다. 그의 전주행에는 스승 정익호와 이용희가 동반할 때도 있었다.[15]

이완용은 학맥상으로는 노론 계열에 속한다. 그의 양가의 6대조 이만성은 이완용의 12대 방조 이승건의 아들 이심(李諶)의 4대손 의정부우의정 이숙의 차남으로 숙부 이영(李翎)의 양자가 되었다. 이영은 신독재 김집의 제자였고, 이만성은 이조판서를 지내고 송시열의 제자였다. 또한 이만성[16]의 형 이만창(李晩昌)의 아들이 도학자로 이름높은 노론계의 이재였다. 그는 청소년기에 한성부에 있는 노론 계열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누구의 문하생인가는 알려지지 않았다.[17]

21세 때부터는 평안북도 태천군의 유명한 선비 박세익을 초빙해서 수년간에 걸쳐 시경, 서경, 주역 등 3경을 반복해서 강습받았다.[15] 이 사이 그의 생부 이호석과 양모 민씨가 차례로 사망한다.[15]

청년기

관직에 진출

1882년, 25세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주서가 되었다. 이완용이 과거 급제했을 당시 양아버지 이호준의 벼슬은 이조판서였다. 그러나 곧 양부는 사망하고 그에게는 집안 제사만이 상속된다. 그뒤 대교가 되고 그후 홍문관수찬, 검상 등을 거쳐 외직인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로 나갔다. 그뒤 다시 중앙정계로 복귀, 3년 만에 정3품직에 오르면서 세자시강원에 보임되어 왕세자 순종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순종과 사제관계를 맺기도 했다.

규장각 대교 검교, 홍문관 수찬, 동학교수, 우영군사마, 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 등을 거쳐서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면서 해외에 대한 식견을 넓히게 되었고,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미국 외교관 생활과 귀국, 개화 활동

1887년에는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발령되었다. 1887년 참찬관으로 미국에 갔다가 1888년초 병으로 소환되었다.

1888년 음력 5월에 귀국하여 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 등을 지냈다. 1888년 음력 12월에 다시 참찬관으로 미국에 건너갔다가 12월에 대리공사(代理公使)로 승진하여 2년간 근무하였다. 1890년 음력 10월에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우부승지, 내무참의,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육영공원 판리, 외무협판 등을 관리직을 거쳐서 조선에 개혁적인 교육정책을 주도하였다. 그는 성균관을 개편하고, 지리, 산술, 과학등 선진 기술을 위한 과목을 신설하였으며, 정기적인 시험 제도, 기본적인 의무교육 제도까지 완비하는데 주도했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의무화와 그 체계의 제도화, 근대적인 교사 양성사업 같은,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긋는 것이었다.[18]

1893년 생모 신씨의 상을 당하였다. 그 해 관직에 나오라는 개화파 내각의 제의가 있었으나 그는 모친상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1895년 음력 5월 학부대신,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19] 또한, 주미 공사로서 2년을 지내기도 하였다.

1890년대 활동

친미파에서 친러파로 전향

아관 파천 당시 고종을 피신시킨 장소 (옛 러시아 제국 공사관의 일부)

그는 미국의 개화된 문물을 접하면서 친미주의 개화파 관료가 되었지만 서구의 침략에 의해 억지로 개항한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른 친미파들과 달리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유교불교를 신봉하였고, 성악설을 믿었다. 또한 기존 왕실에 대해 개화나 공화정을 주창하지 않았으며, 이후 정동파에 가담하여 친러파관료가 되었다.

그가 친러파 관료가 된 계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였다. 그때 친일내각세력으로부터 적으로 지목되어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이자 친분이 있던 알렌과 만나 알렌의 알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였는데, 미국보다 러시아가 조선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면서 러시아 제국 공사관 베베르하고 만나게 되어 이를 주선하여 1896년(건양 1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계획하게 된다.

1896년, 그는 일본청나라 세력의 일소를 목적으로 아관파천을 주도하여 단행함으로써 친미파에서 친러파 관료로 갈아탄 그는 외부대신,농상공부대신서리등 요직을 겸직하여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일본 제국과 친일파 관료들에 맞서 대항하는 관료들 중 한 명이었다.

대한제국에서의 정치 활동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서재필
윤치호
(윤치호는 친러파와 친일파로 변절한 그를 평생 경멸하였다.)

이어 그는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도 가담하여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안경수 등과 함께 계몽 강연 활동을 나선다. 한때 그는 독립협회주요직으로 제2대 독립협회장으로 활동했는데, 연설에서 이런 말을 남긴바 있다.

독립을 하면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만일 조선 인민이 단결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거나 해치려고 하면 구라파의 폴란드라는 나라처럼 남의 종이 될 것이다. 세계사에서 두 본보기가 있는데, 미국처럼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나 폴란드 같이 망하는 것 모두가 사람 하기에 달려 있다.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독립협회장으로 활동할 무렵 만민공동회개최에 앞장섰으며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설립에 주도하여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가 독립협회 위원장을 맡았던 시절에는 서재필독립신문을 지원하면서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독립협회의 실질적인 간부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등이 국민의 참정권을 주장하자 이들을 왕정을 타도하려는 위험한 세력이라 생각한 이완용은 곧 독립협회를 탈퇴하고 만다.

친러파로 전향

이 무렵 러시아 제국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고 독립협회가 이를 저지하고 반대하였는데, 이완용은 러시아 제국은 배격하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호의를 가졌다. 예를 들자면 외무대신으로 재직하던 그는 서구열강세력들(주로 미국이다. 이완용은 주미공사 알렌과 친분이 두터웠다.)에게 많은 이권들을 넘겨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다. 반면, 러시아가 요구한 함경도 영흥·길주·삼수·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을 거부했으며 러시아 군사교관 초빙 문제가 제기됐을 때에도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완용이 친미 반러(反露)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고종에게 압력을 가하여 1897년 7월 20일 외부대신 이완용을 학부대신으로, 또 9월 1일자로 평양 관찰사로 좌천시켜 중앙 정계에서 축출했다. 다음날, 9월 2일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후임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에 취임한 스페에르는 고종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궁궐 경비병을 철수하겠다.”,“제2의 아관파천을 실행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미국인 헤링튼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스페에르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오. 나는 그의 이름에 표를 해 두었소. 그는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결코 벼슬을 얻지 못할 것이외다. 그는 언제나 독립을 외치는 친미(親美)그룹의 우두머리지요. 나는 그 그룹을 조선에서 없애버릴 작정이니, 그들은 더 이상 세력을 쓰지 못할 것이외다.

고종이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것은 노골화되는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고육지책의 수단뿐이었다. 고종은 또 주한 미국공사관 알렌에게 밀사를 보내 '제2의 아관파천'에 해당하는 ‘미관파천’(美館播遷)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시아 제국과의 충돌을 우려한 알렌의 거부로 무산됐다.

한편, 이완용은 1897년에 내각에서 차츰 밀려나게 되어 1898년 3월 11일에는 전북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방 관찰사직으로 좌천된 이후 부임 5일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되었고, 공금횡령죄로 파직될 뻔했으며 급기야 그해 7월 11일 독립협회로부터 제명당하기까지 이른다. 1901년 2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된다. 그러나 이후 자신을 양자로 받아들인 부친 이호준이 죽자 고향으로 낙향하여 칩거하였다.

친러파에서 다시 친일파로 전향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후, 기회가 되어 다시 관직에 복귀했다. 러일전쟁에서 대세가 일본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이때, 대한제국일본 제국으로부터 국권 침탈 위협을 받게 된다. 이완용은 철저한 배일(排日) 친미주의자이자 친러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국공사관 알렌하고 알선하여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파천할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완용과 친분이 있던 주미공사 알렌마저 해임되어 한국을 떠나면서 이완용은 정치적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이후부터 그는 권력의 재기를 노리기 위해 새로운 정치협력자가 필요했고 때마침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이완용은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과 이재에 민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했다. 1905년 학부대신이 되어 11월 17일 을사조약체결 직전때,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일본은 한국 문제 때문에 두 번이나 큰 전쟁을 치러 이제는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을사 보호 조약 체결

이후 이완용은 일본, 이토 히로부미의 압력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일본 제국의 무력을 업게 된 친일파들의 압력과 협박에 시달림을 당했다. 이완용은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조약을 적극 지지하고 체결케 함으로써 을사오적의 수괴,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로 지탄받게 되었다.

을사 조약 체결 당시, 그는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완용을 처벌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 올렸는데, 이때 이완용 자신은 '시국에 따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선의 외교권은 힘을 키워 다시 도로 찾으면 된다.'고 고종에 되려 항변했다. 고종은 이완용을 처벌하지 않는다.

을사 조약 이후

1905년 학부대신 겸 외부대신 서리가 되어 을사조약 체결에 앞장섰고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을 얻은 이완용은 그해 1905년 12월에는 의정대신 서리, 외부대신 서리를 겸직하고 1907년 6월에는 의정부 참정이 되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조선 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 총리대신겸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일본제국의 지시대로 일진회(一進會) 회장 송병준(宋秉畯) 등과 함께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 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협박하여 마침내 순종에게 양위케 했다. 이와 동시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등 주도함으로써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거가 빈번하게 일어나는데 이때 이완용은 일제의 장군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매일 찾아가 의병 토벌 및 진압방법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인헌병보조원제도를 제안하여 항일의병들을 탄압하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진압하는 데 앞장섰다.

1907년의정부참정대신이 되었으며,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겸임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를 겸했고, 곧 내각총리대신에 추천되었다. 이완용은 처음에는 총리대신직을 거부하였으나 계속된 취임요청에 수락하게 된다.

총리 대신

총리 대신 취임

6월 내각총리대신으로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했다. 또한, 그는 어전회의에서 의병장 허위에 대해 처벌할 것을 순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하여 그의 집이 민중들의 응징으로 불태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때 조상들의 위패와 재산은 소실되지 않았다.

고종 양위 주도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

1907년 7월 1일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전문이 한국 황실과 정부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20]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외무성에 보낸[20] 긴급 전문을 다시 외무성이 이토에게 전달한 것이다.[21]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21]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21]

고종 황제
(일본정부와 이토 히로부미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오자 이완용은 고종의 퇴진이 왕실과 국민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21]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21]"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21]

이토는 이어 7월 3일 오후 일본 해군 연습함대의 장교들을 데리고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문제의 친서라는 것을 고종에게 보이며 책임을 추궁했다.[21] 이토는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대해 당당하게 선전포고하는 것만 못하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황제가 져야 하며 이런 행동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으로 협약을 위반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선전을 포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총리대신에게 통고했다.[21]"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 사건으로 이토가 일시 궁지에 몰린 듯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신문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은근히 한국정부에 대한 감독을 소홀히 한 이토의 책임을 거론했기 때문이다.[22] 그러나 이토와 일본은 이 사건을 오히려 한국 정부의 주권을 말살하기 위한 호기로 역이용하기로 작정하고 우선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선전포고 운운의 협박을 한 것이다.[22]

그는 고종에게 순종의 황제 대리청정을 진언하였고, 고종은 처음에는 그의 대리청정 주장을 거부하다가 수용한다. 그러나 고종은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다.

고종 퇴위 주도의 후유증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기 직전 순종에게 이완용의 진언대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게 한다. 그리고 고종은 그해 말 양위한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이를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서 식을 치룰 수가 없게 된 것이다.[23]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20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23]

순종의 황제 대리 의식이 있던 7월 20일 그 시간에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덕수궁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이완용의 남대문 밖 중림동 집으로 몰려가 집을 완전히 불살라버렸다.[24] 이 사건으로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서적 등이 모두 타버려 이완용은 1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24]

특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조상들의 신주까지 불 속에서 사라졌다. 양자를 잘못 들인 탓으로 우봉 이씨 조상들의 위패가 수난을 당한 것이다. 이완용 자신이 조상 신주가 불타버린 것이 일생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24] 을사조약 전까지만 해도 민중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얻어먹은 것은 주무 대신이었던 박제순이었다. 이완용은 박제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격과 비난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완전히 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민중들의 저주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24]

순종 즉위식 주관

집은 불타고 이완용의 가족들은 '매국노의 일족들을 잡아 죽여라'는 군중의 함성에 쫓겨 남산 아래 왜성구락부로 몸을 피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이완용은 덕수궁에서 총리대신으로서 그리고 궁내부대신 임시 서리로서 순종의 즉위식을 주관했다.[24] 이완용이 순종 즉위식을 주관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반이완용 데모와 이완용 화형식은 전국 각지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순종 즉위식이 끝난 뒤에 덕수궁으로 몰려와 이완용을 죽여라 라고 외치는 함성을 듣고 그는 당황한다. 기자들과 관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그가 고종 양위를 주관하고 순종 즉위식을 주관했으며, 고종이 그의 음모에 의해 퇴위당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음을 알려왔다.

식이 끝나자 이토는 이완용을 재촉해 자신의 마차에 태우고 함께 통감 관저로 향했다.[25]

통감 관저에는 이미 이완용의 가족들이 일본 순사들에 의해 구출되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오갈데가 없어진 이완용과 그의 가족들은 이토의 주선으로 이날부터 왜성구락부에 머물기 시작했다.[25] 이완용의 부인 조씨는 왜성구락부에서 거처하기 시작한 첫 1주일 동안은 생활비도 모두 이토가 대주었다고 회고했다. 이완용은 이곳에서 두 달 가량 머물다 9월에 식구들을 데리고 장교에 있는 그의 서형 이윤용의 집으로 들어가 함께 살았다.[25]

1908년 1월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이완용의 딱한 소식을 듣고 집을 마련한다.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이 '집도 없이 형에게 얹혀 사는 총리대신 이완용의 딱한 사정[25]'을 듣고 저동에 있는 남녕위 궁을 하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집을 장만하게 되었다.[25][26] 고종은 자신에게 양위를 사실상 강요한 이완용을 괘씸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그에게 황실 소유의 저택까지 하사한 것이다. 일반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황실과 이완용은 계속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25] 이완용을 고종 퇴위의 책임자로 생각하는 국민들의 비난은 계속되었고, 지식인들은 당황해하였다.

박영효 탄핵

박영효

일본군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내부 대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25]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준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한다'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다.[25]

순종은 물론 그대로 허락했다. 순종이 한일병합 때까지 3년여 황제로 재위한 동안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지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한결 같은답변이었다. 순종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완을 지사할만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토가 기를 쓰고 그를 황제로 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27]

이완용의 상소에 따라 박영효는 역시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사 남정철과 함꼐 법부에 구속되었다.[27] 이때 감옥에 갇힌 박영효가 배탈이 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가 그에게 약을 보냈으나 박영효는 한국에도 약이 있다면서 되돌려 보냈다. 박영효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하자 "총리대신 이완용 씨를 역적이라고 말했을 뿐 죄지은 것이 없다"고 호통을 쳤지만 결국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27] 그러나 황제는 유배 중인 박영효제주도 밖으로 이동할 권한을 부여한다.[28]

고종 퇴위 이후

1909년 12월 24일자 황성신문. 12월 22일 낮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 의사에게 칼에 찔려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한 내용이다.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그는 사회적으로 황제를 퇴위시킨 망국노, 역적이라는 질타를 당했고 반이완용 시위, 이완용 화형식이 곳곳에서 거행되었다. 1907년 12월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이완용은 1909년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가하러 명동성당에 갔을 때 기다리던 이재명[29]의 칼에 찔렸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 등 세 곳을 칼로 찔리는 큰 부상을 당하였고, 왼쪽 폐에 찔려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당한다. 이때 상처는 만년에 해수병으로 고생하다 끝내 천식과 폐렴으로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이완용은 암살될 뻔한 위기를 맞았으나 약 2개월간의 입원 치료 끝에 회복되었다.

1910년 한일 합방 조약문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날 장충단에서 시종원경 윤덕영, 한성부민회 대표 윤효정 등과 함께 이토 추도회를 열었다.[30] 그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이토 공(公)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공언을 했었으며, 당시 이토를 총으로 쏘았던 안중근의사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이등박문의 극동평화론' 신봉자이기도 했다.[31] 1909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에 반대 공작을 펼쳤으나, 결국엔 이완용 자신이 일본에 먼저 한일합방을 제의하게 된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가 소집되자 의장 자격으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1910년 8월 22일,에는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병합전권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로 찾아가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완용은 곧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한일합병의 주역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퇴직금 1,458원 33전, 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 원을 지급받았다.

1910년대~1920년대 활동

경술국치(한일합방) 이후

1916년 8월 4일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이왕가의 왕세자 이은의 결혼 결정을 '내선융화'로 미화한 내용의 글이다.

한일병합이후, 백작이라는 귀족작위를 받은 그는 1912년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주장했다. 그는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정기적으로 문안인사를 수차례 올렸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이거니와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심심치 않게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해 7월 11일 농사장려회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15년 10월 13일 조선농회 회두로, 16년 7월 30일에는 이무회 회두로 선출되었고, 1918년 5월 25일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19년 1월 15일,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 그당시 고종의 독살설이 의문되어 제기되었는데,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히기도한다.

1919년 4월 5일매일신보 1면에 이완용이 3.1 운동의 실패를 주장하는 경고문 3번째 발표한 글.

3·1 운동때 민족지도자들에게 참여를 요청받았으나 거절하고, 오히려 3·1 운동의 진압방법에 대한 주내용으로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비밀리에 3·1 운동 진압방안에 관한 편지를 수차례 보내기도 했다. 3·1 운동이 한창이었을때 이완용은 3·1 운동의 실패를 주장하는 경고문을 연달아 3회 발표하여 ‘3·1 운동은 불순세력에 의한 불순세력의 주도이며, 치열한 국제경쟁시대 속에 조선의 독립은 허망하다.’는 주 내용으로 일제에 노골적인 충성을 드러내며 강조했다.

친일관료 및 사회단체 활동

이후 일제는 3·1 운동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를 1920년에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그는 이후에도 내선일체와 일본어 보급 교육을 강조했으며,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원,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 고문, 선만노몽연구협회 고문 등등 여러 친일협회에 고문으로 역임하며, 계속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 협조한다.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
[32]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

— 이완용이 썼던 구절

1922년 3월 14일 조선미술전람회 서예부문 심사위원, 1923년 1월 6일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이 되었다.

파일:Lee Wanyons's Family.jpg
이완용 가족 사진
(앞줄 왼쪽 손자 이병주, 가운데 이완용, 이완용이 안은 이는 손자 이병철, 뒷줄 왼쪽 손자 이병길, 가운데 장남 이항구, 뒷줄 오른쪽 손자 이병희)

1924년에는 그의 아들 이항구도 남작 작위를 이어받아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부자귀족이 되기도 했다. 1921년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을 지냈다.[33]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34][35] 한일합방 이후 상당수의 귀족들이 무위도식하거나 타락해서 방탕한 생활로 몰락해갔다.[36] 그들 가운데는 파산 지경에 이르러 품위 유지는 물론 생활조차 꾸려나가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36] 이들은 창덕궁에 가서 전 황제 고종, 순종에게 가세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며 신세한탄을 하고, 고종순종에게 용돈을 받아다가 생활하는 것으로 소일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이완용은 착실하게 재산을 관리하고 불려서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36] 그는 양아버지 이호준에게 물려받은 재산도 변변치 않았으므로 이완용 스스로가 재물을 모은 것이다. 이완용은 한번도 고종순종에게 돈을 달라는 하소연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종순종에게 오히려 선물을 가지고 방문을 했다.

최후

말년의 이완용

이재명의 칼에 찔려 폐를 다친 이후 이완용은 매년 겨울철만 되면 해소와 서식, 기침, 폐렴과 통증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대의 명의를 불러 진료를 하였으나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의 재산은 생각보다는 넉넉하지 못했는데, 민영익의 1925년 당시 재산이 6천만 원이었던데 반해 이완용은 3백만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폐렴과 해소 증상은 계속됐고 그는 흉통에 시달렸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심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완용은 참고 대외활동을 벌이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1925년에도 가을까지는 전라남도 화순 동복의 명승지 물염적벽을 유람하고 11월 하순에는 순종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등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다시 해소가 심해져 12월 5일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유덕리의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묘에서 열린 제사에도 참석하지 못했다.[37] 이공정 묘는 오래전에 유실된 것을 이완용이 찾아내 개축공사를 끝내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므로 이날의 주인공은 이완용이었다. 따라서 어지간하면 참석하려고 했으나 기침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37]

그후 한동안 집에 들어앉아 요양을 한 덕분에 어느 정도 증상이 호전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했다.[38]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중추원도 새 청사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새 청사는 데라우치가 계획을 세워 하세가와가 착공한 이래 9년만에 완공을 본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라고 했다. 이완용은 새 건물 낙성 소식을 듣고 가보려고 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 총독도 참석한다고 해서 빠질 수가 없어서 무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38]

찬 바람을 쏘인 탓으로 기침과 서식이 심해져 아예 자리에 눕게 된 것이다. 이제 몸도 노쇠해진 데다 워낙 오래된 병이라 뚜렷한 치료방법도 없었다. 2월 11일 오전 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순종은 붉은 포도주 한 상자를 이완용의 집으로 보냈다. 순종 자신도 이 때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병이 깊었지만 늙은 신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 정을 표시한 것이다.[38]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이완용은 순종이 보낸 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서형 이윤용과 아들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69세를 일기로 옥인동 집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상주인 장손 이병길은 일본에 유학 중이어서 임종하지 못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22]'이라는 평가가 있다.

부정적 평가

이완용은 권력욕과 재물욕이 강한 철저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이 있으며 을사오적으로 지목, 친일파의 대명사로 비판받았던 측면도 존재한다. 동시대를 살던 윤치호는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나는 이완용을 대단히 싫어한다. 그의 특권의식, 야비한 교활성과 음흉함, 그와 같거나 열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고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욕적일 만큼 복종하는 태도, 이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그에게 편견을 갖게 한다. 이완용은 철저한 기회주의자요 변절주의자 아부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완용은 초창기 독립협회의 의장이었다. 독립협회의 구성원이 대부분 우습지만 일본과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지만 말이다.
- 윤치호 일기 내용中-

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이완용 사후 1주년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저술한 '일당기사'('일당'은 이완용의 호.) 책.

또한, 이완용의 조카이자 이완용의 비서직으로 있던 김명수가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1927년 '일당기사'를 펴냈는데, '일당기사' 내용 중 이완용의 가치관이 어땠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20세 때에 한학(漢學)을 숭상하고 산림학(山林學)에 종사했으나 존도숭유(尊道崇儒)의 풍이 퇴색하고 외국과의 교통이 확장되어 서양과의 교제가 절실하여 하루아침에 머리를 깎고 구미(歐美)로 갔다. 최초에는 조선인이 목적으로 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당시 미국과의 교제가 점차 긴요한 까닭에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는 아관파천 사건으로 노당(露黨·친러파)의 호칭을 얻었고, 그 후 러일전쟁이 끝날 때 전환하여 현재의 일파(日派·친일파) 칭호를 얻었다. 이는 때에 따라 적당함을 따르는 것일 뿐 다른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이라 한다.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 한다. 천도,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실리를 잃고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술도 즐기지 않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으며, 취미는 책을 읽고 서예에 몰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성격은 내성적이고 치밀한 사색형의 성격에 오로지 글읽기와 쓰기, 시문 짓기를 낙으로 삼았던 데다 조상과 부모에 대한 예와 효도 깍듯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대 최고로 인정받을 정도의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그는 독립협회위원장직 지낸시절, 독립문의 현판을 쓴 것과 독립문설립에 앞장섰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 매국노이었음에도 일본어는 거의 할 줄 몰랐으며, 이토 히로부미 이외엔 제대로 아는 일본인 관리나 실세가 없었다.(주로 의사소통은 영어로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매천야록에는 그가 자기의 아들 이명구의 아내인 임씨 즉 며느리와 간통을 하여 이명구가 자살하였고,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권력과 축재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는데, 1925년당시 그의 재산은 오늘날 600억에 해당되는 재산에 이르러 식민지 조선에서 민영휘와 더불어 제일 가는 부자로 손꼽히기도 했다.

사후

1926년 2월 13일 매일신보에 보도된 이완용 사망소식 기사.

1926년 2월 12일에 그는 69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다고 알려져 있다. 장례식은 일본인조선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일본 순사들의 호위 아래 진행된 그의 장례식 행렬은 호사스러웠고, 장례 행렬은 그의 3천평짜리 집인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장례식 규모나 인파등 고종황제 장례식에 못지않게 화려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반면, 명맥만 존속하던 구 이왕가 황실은 그에게 훈1등 이화 대수장과 금척 대수장을 수여했다.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설란에 실린 기사.

1926년 2월 13일동아일보 사설란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순사의 겹겹 파수와 견고한 엄호도 저승차사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너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이 이때였다. 아무리 몸부림하고 앙탈하여도 꿀꺽 들이마시지 아니치 못할 것이 이날의 이 독배이다. (중략)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은 그만하면 내놓았지. 앙탈하던 이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의 산에 묻혔었다. 이는 그의 원 고향인 망성면 황산리와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훼묘 사건이 발생하여 1979년에 이완용 후손들이 이완용의 묘를 파묘하여 유골은 화장했다. 그의 묘터는 이후 채석장으로 바뀌었고, 그의 묘의 흔적도 역시 사라졌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는 아들 이항구와 함께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명단에는 손자인 이병길도 들어 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39]

이완용의 가족과 후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거나 돌팔매를 맞고 다녔다. 장손 이병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되었고, 손자 이병주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이기지 못하고 1962년 일본으로 밀행해 귀화했고, 증손자 이윤형은 캐나다로 이민을 가는 등 직계후손은 뿔뿔이 흩어졌다. [40][41]

저서

  • 《일당기사》 : 사후 간행됨

일화

  • 이완용의 아들 이승구는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 가운데 이승구는 그 아버지 이완용이,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42]버렸다. 이승만 역시 그를 독립협회에서 한때 활동하다가 변절한 인물로 취급하고 그를 경멸하였다.
  • 이완용의 후손들은 현재 친일파 재산 환수에 대해 소송을 걸어 재산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 이완용이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렸을 당시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로부터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던 기록[43]2008년 12월에 발견되었다. 서울대학교 병원 흉부외과 김원곤 교수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이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의 칼에 찔렸을 당시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로부터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던 기록을 발견했다”고 2008년 12월 18일 한국 언론에 밝혔다.[43] 이는 한국 의료 역사상 처음으로 100년 전 흉부외과 기록이기도 하다.[44] 김원곤에 의하면 발견된 기록물은 당시 병원의 단순한 의료기록이라기보다는 이완용 피습사건 후 일제에 의해 재판이 이뤄지면서 검사 측 요구로 의료진이 제출한 감정서 성격이 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43]

가족 관계

그의 양아버지 이호준 역시 이석의 아들인데 숙부인 이식의 양자가 되었다.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
(운현궁 가계도)
이호준
(李鎬俊)
조병익
(趙秉翼)
이씨(李氏)이윤용
(李允用)
이완용
(李完用)
이호준 아들로 입적
조씨(趙氏)조민희
(趙民熙)
이명구
(李明九)
이승구
(李升九)
임걸귀이항구
(李恒九)
김진구
(金鎭九)
조중수
(趙重壽)
이병태
(李丙台)
이병길
(李丙吉)
이승구 아들로 입적
이병희
(李丙喜)
이병주
(李丙周)
{{{BCH}}}이병오
(李丙吾)


파일:Taewongun photo.jpeg
흥선대원군
  • 장인 : 조병익(趙秉翼, 본관은 양주)
  • 장모 : 송씨(宋氏)
  • 사돈: 임대준, 맏며느리 임걸귀의 친정아버지
  • 사부인 : 윤씨(尹氏, 맏며느리 임걸귀의 친정어머니)
  • 사돈: 임선준, 임걸귀의 숙부
  • 사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성격

이완용은 말수가 대단히 적고 목소리는 낮았으며 말은 반드[9]시 생각한 후에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했다. 그는 평소 말이 급하면 항상 실수하기 쉽다고 경계해왔다고 한다. 그가 말이 너무 없자 양아버지 이호준은 "너는 어떤 일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 너무 적어 마땅히 설명해야 할 것도 이를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남자로서 처세에 대단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는 습관이니 고쳐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동료간에 모인 자리에서도 농담이나 객설에 구애받지 말고 하도록 노력해 보아라"고 가르쳤다.[14] 그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상당히 꼼꼼하였고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된다고 믿었을 때는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든 달성하려 했다.

후대의 역사가 윤덕한에 의하면 '그가 이처럼 말이 없었던 것은 원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양자로 들어가게 된 환경 변화가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시골의 초가집에 비해 안국동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우선 기가 죽었을 것이고, 드나드는 사람들의 차림새나 행동거지에도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친부모에게 한참 응석을 부릴 나이에 지체 높은 양부모 눈치를 살피며 행동에 각별히 조심하다 보니 자여히 말수가 적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14]'라는 평을 내렸다.

기타

고종 양위와 국권 보호

이완용은 황실과 나라를 지키는 길은 고종의 양위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헤이그-밀사 사건이 발각되면서 일본대한제국에 압력을 행사했고 그는 고종의 퇴위로 사건을 종결지으려 했다.

1907년 7월 3일 이토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통감 관저로 불러 어디서 입수했는지 고종의 밀사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호소 친서의 초고라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면서[21] 이완용을 추궁했다. 이완용은 한때 친러시아파 인물이라 의심받고 있었다. 이토는 이완용에게 "이같은 행위는 보호조약을 위반한 것이며 일본에 대한 적대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협박했다.[21]

이토의 추궁에 대해 이완용은 우선 이번 사건은 내각에서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21] 이에 대해 이토는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다. 그런데 어떻게 남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21]"라고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완용은 이토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하다가 거듭 사죄하고 물러 나왔다.[21]

이완용은 이토로부터 책임을 추궁받고 돌아온 즉시 내각 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대신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이완용은 스스로 황태자로 하여금 황제의 역할을 대행케 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밀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고종을 2선으로 물러나도록 하자는 것이다.[22]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충한 진언을 하느냐였다.[22]

신하가 전제군주에게 양위를 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며 정상적으로 왕권이 확립된 시절이라면 3족을 멸족당하고도 남을 대역죄에 해당되는 행동[22]이다.

이완용은 고민 끝에 자신이 직접 상주키로 작정하고 이날 밤 단독으로 고종을 알현해 이런 듯을 넌지시 비쳤다.[22]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며 한 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성취하는 의지가 굳은 인물'이라는 세간의 평에 걸맞게 그는 신하로서 감히 황제[22]에게 황제의 거취 문제를 제기하고 나온 것이다.[48]

고종 협박설 루머

일설에는 고종 양위 사건 무렵 이완용이 칼을 빼들고 고종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믿기 어려운 소문이다.[49] 이완용이 비록 이토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제의 괴뢰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황실에 대한 그의 평소 충성심으로 보나 평생 붓대만 잡아 온 그의 인생 이력으로 보아 칼을 빼들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뒤에도 지속된 황실과 이완용, 특히 고종과 이완용 사이의 돈독한 관계로 볼 때 납득이 안되는 주장이다.[49] 대신 '황실과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고종이 양위[49]할 것을 간곡히 상주하는 형식을 취했다.[50]

시조묘를 찾아 개축한 이완용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완용이 오래 전에 없어진 우봉 이씨 시조 이공정의 분묘를 일제 시대에 찾아내 개축했다는 것이다.[51] 이완용이 사망한 다음해 1927년 그의 생질이자 오랫동안 비서로 일했던 김명수가 이완용의 문집과 약력 등을 엮은[51] '일당기사'라는 책을 펴냈는데 이 책 속에 이완용이 그 시조의 묘를 찾아내 개축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52]

일당기사에 의하면 이공정의 분묘는 언제 없어졌는지도 모를 만큼 오래 전에 없어져 우봉 이씨 가문에서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완용이 죽기 1년 전인 1925년 5월경 황해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서원동에 사는 문창업이라는 사람이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마답동에서 이공정 묘의 지석을 발견해 이완용에게 들고 왔다.[52] 윤덕한에 의하면 이를 두고 '비록 매국노라는 손가락질은 받고 있었지만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을 3년 이상 지냇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시조의 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한 시골 촌부가 그것을 들고 이완용을 찾아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52]'고 평했다.

이완용은 이 지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925년 6월 5일 우봉이씨 종친 몇 명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이 지석이 이공정 분묘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하고 이 사실을 전국의 모든 우봉 이씨 종친에게 통보한다. 이어 6월 28일 자신의 옥인동 저택에서 종친회의를 열어 이공정의 분묘를 개축하고 석물을 설치하기로 최종 결정한다.[52] 종친회의는 또 이공정의[52] 분묘가 있는 산판을 사들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9월 27일 사람을 현지로 보내 산판 평가액 1,540원 가운데 240원을 원 소유자에게 지불하고 우봉 이씨 대표 몇 명과 매도자가 공동 소유하는 것으로 등기를 마쳤다.[5]

이공정 분묘는 그해 연말인 12월 5일 개축 공사가 마무라되어 전국의 우봉 이씨 종친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이완용이 죽기 두 달 전이었다. 그는 이 날 행사에는 해소병으로 차먹하지 못했다. 결국 잃어버렸던 우봉 이씨 시조의 묘를 23대손인 매국노 이완용이 찾아낸 것이다.[5]

19세기 이후 상민이나 노비 중 재산을 모은 자가 족보를 사서 양반행세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족보에 대한 중요성이 희미해졌지만 이완용은 조상과 족보에 관련된 것은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주석

  1. 삼성그룹이병철과는 다른 동명이인.
  2. ‘친일’이라는 말 적절하고 충분한 표현인가
  3. 이호준에게는 서자 이윤용만이 있었고, 정실부인에게서 적자가 없었다. 이호준의 서자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결혼하였다.
  4. 일조각, 역사가의 유향 (일조각, 1984) 273~276pp, 진단학회 편 <실증사학과 민족사학>
  5.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
  6.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4페이지
  7. 이길배의 아들인 이기의 아들 이승건의 11대손 이돌(李堗)의 아들이었다. 이승건은 이승녕의 형제이다. 그러나 이돌도 증조부 이제녕은 이길배의 다른 아들 이연(李埏)의 8대손 이훈(李坃)의 아들이었으나, 이기의 8대손 정랑 이접(李系+集)의 양자가 되었다.
  8.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7페이지
  9.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5페이지
  10.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4페이지
  11.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8페이지
  12.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2페이지
  13.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3페이지
  14.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6페이지
  15.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7페이지
  16. 그는 삼촌 이영의 양자로 갔으니 생가 조카인 이재는 5촌 조카가 된다.
  17. 이완용 등이 친일파로 단죄됨에 따라 삭제되었을 수 있다.
  18. <이완용 평전>
  19.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1권 (돌베게, 1993년) 49~50쪽(강만길 집필 부분)
  20.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0페이지
  21.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1페이지
  22.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3페이지
  23.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9페이지
  24.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0페이지
  25.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1페이지
  26. 이완용은 이때 자신의 집을 처음 마련한 것이었다.
  27.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2페이지
  28. 박영효는 도성에 출입금지령으로 형이 감량되고, 1910년 마산에서 한일 합방 소식을 접한다.
  29. 이재명은 당시 대한제국의 현역 군인이었다.
  30.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83쪽쪽. ISBN 89-7199-036-8. 
  31. 이등박문의 동양평화론(극동평화론이라고도 불린다.)이란, '조선은 더이상 근대화를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항상 러시아로부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에 위기에 항상 노출되어 근대화를 이룰 수 없는 조선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해서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열강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다.
  32. 여기서 ‘떠오르는 해’는 일본을 묘사했다.
  33. 김삼웅.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55쪽. ISBN 978-89-86072-03-7. 
  34. 성강현.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일요시사. 2008년 4월 16일에 확인함. 
  35. 성강현.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일요시사. 2008년 4월 16일에 확인함. 
  36.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48페이지
  37.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49페이지
  38.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350페이지
  39. 이민정. “재산 환수되는 친일파 9인은 누구? - 권중현·이완용 등 을사오적 중 일부 포함”.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13일에 확인함. 
  40. 허성호, 99년 전 매국노 이완용의 영욕 조선일보
  41. 캐나다로 이민간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은 1992년 '증조 이완용의 땅을 되찾겠다.'면서 법정소송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42. 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0페이지
  4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585.html
  4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18/2008121800191.html
  45. 이완용의 둘째아들 이항구의 아들로 큰아버지 이승구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46. 삼성그룹이병철과는 다른 사람이다.
  47. 이윤용은 서자였기 때문에 그가 양자로 들어올 수 있었다.
  48.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4페이지
  49.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7페이지
  50.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58페이지
  51.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1페이지
  52.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2페이지

관련 항목

관련 자료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이완용〉 (PDF). 《2006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서울. 99~144쪽쪽. 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 반민족문제연구소. 〈이완용 : 한입‘합방’의 주역이었던 매국노의 대명사 (강만길)〉.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 윤덕한, 《이완용 평전》 (도서출판 중심, 1999)

참고 문헌

  • 고종실록
  • 순종실록
  • 순종실록부록
  • 고종시대사
  • 승정원일기
  • 일성록
  • 윤치호일기
  • 매천야록 (황현)
  • 조선통사 (박은식)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