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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거쳐<ref name="사전1"/> 관제 개정 이후 신설된 학부아문의 [[참의]] 겸 학무국장을 지냈다. 학부아문참의로 재직중 그는 이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외국어학교 교사는 일본인만을 고용하라고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고<ref name="daum1"/>, [[1896년]] 국어학교 교장으로 발령되었다.<ref name="사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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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29일 (일) 19:28 판

이상재
출생1850년 10월 26일
대한제국의 기 조선 충청남도서천군
사망1927년 3월 29일
성별남성
국적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별칭자는 계호,호는 월남(月南)
학력한학 수학
직업교육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종교기독교
부모아버지 이희택(李羲宅),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이상재(李商在, 1850년 10월 26일 ~ 1927년 3월 29일)는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개화파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한국의 교육자·청년운동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교육과 청년의 계몽, 각성을 역설하는등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 활동하였다.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의 한사람이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고려의 학자 이색의 후손이다. 자는 계호(季皓), 아호는 월남(月南)이다. 본관은 한산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유년기

이상재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당시 한산군)에 살던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지낸[1] 이희택(李羲宅)과 밀양박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이자 자(字)는 계호(季皓)이고 성인이 된 뒤 이름을 상재(商在)로 바꾸었으며 아호를 월남이라 하였다.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상재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 서당을 다니고, 1864년(고종 1년) 조혼 풍습에 따라 3년 연상인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할아버지 이경만이 별세하여 선산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선산이 참의를 지낸 김씨 집안 선산과 경계 마찰로 아버지 이희택이 투옥되었다. 신혼기간 중 6촌 형 이경재에게 아버지 희택의 투옥 소식을 듣고 한산군에 달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겠노라 군수에게 청하여 아버지 희택을 석방시키고 자신이 대신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일이 있을만큼 이상재는 의리있는 청년이었다.

과거 낙방과 개화파

어려서부터 학문을 수련한 이상재는 18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당시 양반들의 연줄과 인맥으로 과거 합격자를 정하는 매관매직행위에 분노하여 낙방거사가 되었다. [2]

한성에서 우연한 기회에 그는 박정양(朴定陽)을 만나 그와 사귀게 되었다.[3] 그러나 인맥과 연줄로 과거 합격자를 정하는 부정한 풍토를 개탄,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비서일을 보았다.

승지 박정양의 개인 비서 시기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한 시기였다. 조정의 신임을 받는 젊은 선비이자 개화파 지식인인 박정양을 만난 사건은 이상재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당시 박정양은 엉뚱하리만치 개성이 강한 이상재 청년을 아껴서 자주 불러다가 술을 마시며 토론하였으므로[4] 이상재가 자신만의 사상을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청년 시절

일본 유학과 귀국

1881년 박정양이 일본 시찰 목적으로 조선 조정에서 구성한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동행하였던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조준영(趙準永), 어윤중(魚允中)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깊이 사귀었다.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지식인인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고영희, 안종수(安宗洙) 등 26명이 이상재와 함께 따라갔다.

이때 그는 저녁에 한가한 시간에 일본의 도심 번화가를 다니며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조선 사회 역시 개항이 필요하다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함께 유학생으로 파견된 홍영식 등과 사귀어 친분관계를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고로 우정국 주사(主事)에 발령받아 인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3]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게 된다.

갑신 정변 이후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연루자로 몰렸으나 수색 책임자인 한규설(韓圭卨)을 만나 떳떳이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감으로써 처벌을 면했다.[5]

고종학문이 뛰어난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지방수령직에 임명하려 했지만, 그는 자신을 정계로 이끌어준 박정양이 유배되었으니 자신은 관직에 있을수 없다 하며 사퇴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박정양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하여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다. 1887년 6월 박정양이 미국에 전권대사로 임명되자, 이상재는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수행하여 1년여 동안 워싱턴 D.C.에서 근무했다. 당시 월남은 미국 청소년들이 외교관인 자신에게 을 던진 무례한 행동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자, 나이어린 청소년들이 한 행동이니 용서해달라며 선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은 나중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념이 되었다.

이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담판을 벌여 직접 국서를 전달하게 했다. 워싱턴에서 청나라 공사가 국서(國書)의 봉정을 직접 하려 하자, 청나라 공사관 서기관과 담판하여 박정양이 단독으로 봉정하게 했던 것이다.[5] 이로서 조선 건국(1392년) 이후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중국의 속국화된 인습을 없애버렸다. 귀국한 뒤 청나라 정부의 압력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주한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5] 낙향하였다가 개화파 지도자들의 연락을 받고 그는 다시 한성으로 상경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참여

만민공동회

다시 관직에 등용된 이상재는 1892년에 전환국 위원, 박정양이 내무부 독판이 되자 1894년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참찬관이 되었다.

그해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거쳐[3] 관제 개정 이후 신설된 학부아문의 참의 겸 학무국장을 지냈다. 학부아문참의로 재직중 그는 이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신교육령을 반포하고,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하고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때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외국어학교 교사는 일본인만을 고용하라고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하였고[5], 1896년 국어학교 교장으로 발령되었다.[3]

이승만
(이후 이상재는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아라사 공사관으로 그러니까 제정 러시아 공사관에 간 사건인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내각 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 1등 의관(議官)이 되고, 다시 관제개편이 되자 6월 내각의 의정부 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 색출과 처벌, 감사 활동으로 부패, 무능한 탐관오리 축출에 힘을 기울였다. 1896년 7월 그는 서재필(徐載弼), 이승만, 윤치호, 이완용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 위원이 되어 민권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대중계몽집회인 만민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활동했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다른 뜻을 가졌을 것이라는 척족 대신들의 탄핵으로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독립협회
동지 서재필

그는 윤치호, 서재필 등과 민중의 참정권을 주장하였다. 5월 17일 서재필이 강제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고 이완용은 독립협회를 떠나 변절하게 되면서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주도했다.[6] 10월 28일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전제군주권을 제한하고 내각책임 행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헌의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하자 그해 10월 30일 고종이 이를 수락한 후 중추원을 개정하여 중추원 관제를 발표했으나, 조병식(趙秉式)·유기환(兪箕煥) 등의 반격을 받게 된다. 11월 4일 독립협회 해산령이 내리고 정교(鄭喬)·남궁억(南宮檍) 등 16명과 함께 구속되었다.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열어 시위항의를 함으로써 11월 10일 태(笞) 40대를 맞고 풀려났다. 이후 만민공동회를 지도하여 헌의6조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황국협회에 맞섰으나 1898년 말 독립협회는 보부상들의 정치단체인 황국협회를 앞세운 보수파들의 탄압으로 해산당하였다.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기독교에 귀의

서재필은 도미하였고 윤치호는 관료생활에 매진하였으나 그는 벼슬을 거부하고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리, 내부 묵인 등을 탄핵하다가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거나 일본으로 피신하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6월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그는 감옥에서 이승만이 전달한 성서를 읽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는데, 청소년 기독교 잡지인 《새벽나라》(두란노 刊)에 의하면 이상재 선생은 원수도 사랑하라는 마태복음서산상수훈에 감동받았다 한다.

이승만과의 관계
한성감옥에서의 사진(맨 왼쪽 서있는 사람이 이승만, 오른쪽 앞줄 두번째에 앉은 이가 이상재, 뒷줄 오른쪽 두번째는 그의 아들)[7]

옥중에서 그는 김정식(金貞植), 유성준(兪星濬), 이승만, 이동녕을 만났고, 그들과 가까이 지냈다. 이때 그는 이승만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로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교인이 되었다.

1904년 2월 이상재는 특별 석방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옥바라지를 했고, 이승만도 미국에 파견될 특사로 선정되어 곧 석방된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YMCA에서 만난 이승만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 주었고, 후일 이승만이 미국 유학을 할 때는 그의 생활비를 지원, 후원하기도 했다.

공직 사퇴와 기독교청년회 활동

출옥한 뒤로는 그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1905년 9월 26일 서울 전동에 있던 시종무관장 민영환 집에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환영하는 이색 만찬이 개최되었다.[8] 이상재 역시 이 만찬에 큰 기대를 걸고 참석했다. 주빈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배빈이 앨리스양을 수행한 해군대장 트레인과 앨리스 양의 약혼자 커빈 해군 중장이었다. 한국에서는 민영환 이외 이준, 이상재, 이용익, 윤치호, 그리고 미국인으로 서울에 와 항일 필봉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사 주간 헐버트(흘법) 여사 등 반일 친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8] 그리고 앨리스양에게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부탁했고, 앨리스양은 황제의 국서를 지닌 특사를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쾌히 응낙했다.[8]

YMCA의 지도자이며 기독교, 개화파와 친분을 쌓았던 이상재는 바다 건너 해양 문명국이 대한제국의 자유와 해방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자인 이승만, 친구 윤치호 등으로부터 가쓰라-태프트 밀약 소식을 듣자 이상재는 미국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을 품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뒤 고종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관직에 미련이 없었음을 밝혔으나 도와달라는 고종의 애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 이후 관직을 사퇴했다.

윤치호
(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다.)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 유성준, 이승만 등과 그밖에 윤치호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 YMCA 초대 교육부장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사회 참여 활동

YMCA

1910년 8월 한일 합방 이후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교육 계몽활동에 나섰고, 청년들의 깨달음과 실력 양성, 해외 유학과 견문 시찰을 청년들에게 당부하였다. 1913년 조선총독부YMCA의 확장을 경계,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 이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 구금, 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출국한 이승만미국 체류를 위한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편 윤치호에게도 출국을 권한다. 그러나 노부모가 생존해있던 윤치호는 출국을 주저한다.

그러나 그는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하여, 지도자들의 이탈과 구속, 추방 등의 가운데 윤치호와 함께 YMCA의 간판을 지키고 청년회를 사수하였다. 1914년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YMCA, 군산의 YMCA연맹, 전주의 YMCA신흥, 공주의 YMCA연맹 등 학생YMCA와 연합, 황성기독교청년회와 통합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한국 YMCA의 모태가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계몽운동에 참가했는데, 이는 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에서 계몽운동에 중점을 둔 사회참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기독교청년회(YMCA)는 3·1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그도 이 일로 관련자로 지목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으나 혐의점이 없어 풀려났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 초대 총재,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사회운동을 하였다.그러나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문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거부하였다.

청년들과의 교유

그 뒤 그는 YMCA 청년회의 제2대 총무에 취임한다.[9] 그는 기독교에 늦게 입문하여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청년회 운동을 하였고, 사망하는 해에도 신간회 초대 회장을 맡는 등 끝까지 원기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유머가 넘치는 밝은 성격이라 "만년청년"으로 불렸다. 당시 보수적인 이들은 "나이지긋한 분이 체통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의 그러한 행동에 불만을 가졌으나, 이상재 자신은 "내가 청년이 되야지,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할 수 없다"면서 청년들과 교류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그 자신은 셋방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고학생이 있으면 학비를 줄 정도로 청년들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키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독교 비판

이렇듯 이상재는 너그럽고 밝은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옳지 못함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 실례로 1923년 이상재는 서구 선교사들앞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여, 당시 조선 개신교 교회에서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이 대립하게 된 원인인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를 비판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자.[10]
계몽활동

1920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동년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에 선출되었고, 1920년 미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제2의 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을 다녔다.

교육 계몽운동

1922년에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한규설, 윤치소 등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11]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1922년 3월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2년 이상재는 이승훈, 윤치호, 김병로, 김성수 등과 함께 주동이 되고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 기성회를 출범시키고 모금활동을 했다.[11]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22년 신흥우, 이대위(李大偉), 김활란, 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국제YMCA연맹에 가입을 허락해줄 것을 각국의 YMCA 대표자들에게 설득 호소하고, 일본 YMCA 대표단과 담판하여 한국 YMCA가 단독으로 국제 YMCA에 가입케 하고, 독자적으로 국제YMCA 행사에 참여하게 하여 한국YMCA의 국제YMCA 가입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물산장려운동·절제운동·지방전도운동·창문사운동 등을 지도했다. 24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퇴하였다.

1927년 4월 7일, 이상재 사회장. 당시 그의 장례행렬은 수 많은 인파가 몰렸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에 피선됐고,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를 결성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상재는 당시 병석에 누워 있었으나 신간회회장직을 수락했다. 1927년 4월 7일 병사하였고, 당시 나이 77세였다. 거족적인 사회장으로 선영인 충청남도 한산군의 선영에 장사되었고, 1957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卞榮魯)가 묘비문을 썼다.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종묘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고, 독립기념관에는 다음 문구를 새긴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서리가 오기 시작하면 반드시 굳은 얼음이 얼고야 마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한 가지 두 가지 일이 외국에 침식되니, 계속 이와같이 나간다면 몇 날 몇 달이 못 가서 전국의 권한이 모두 외국에 양도되어, 태아(太阿)의 칼자루를 거꾸로 쥐게되는 후회를 남기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가족

  • 할아버지 : 이경만
  • 아버지 : 이희택(李羲宅)
  • 어머니 : 밀양박씨(密陽朴氏)
  • 부인 : 강릉 유씨(江陵劉氏, 1847년 ~ ?)

평가

풍자와 기지가 넘쳐 차원 높은 해학으로 살벌한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악독한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풍자와 경구로써 제어하였다. 그 근거로 계몽사에서 만든 이상재 전기에는 이상재 선생이 풍자와 경구로써 부당한 현실에 저항한 재담가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온다. 이상재 선생은 신사유람단에 따라갔을 때 일제가 총과 칼을 보여주며 힘을 자랑하자 "로 일어서면 칼로 망한다."는 예수로마제국군국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한 말(마태복음서 26:52)을 인용했고, 을사오적들에게는 "대감들,일본에 가시지요. 당신들 나라 망하게 하는데 재주가 있으니 말이오"라고 독설을 보여주었다.

참고자료

함께 보기

주석

  1. 충청시대:역사다큐 이상재 일대기
  2. 이러한 타락상은 김구백범일지에도 나온다.
  3. 네이버 백과사전
  4. 계몽사 위인전기《이상재》/계몽사
  5. daum사전
  6. 이후 YMCA 운동 역시 윤치호와 함께 지도하게 된다.
  7. 이 사진은 우남관에 전시되있다.
  8. (이규태 역사에세이) 앨리스-헐버트 이야기 조선일보 1999.06.10일자
  9. 개화창구 봉사 소비자.환경운동/YMCA 창립 90년 조선일보 1993년 10월 14일자
  10. 기독교사상》2005년 9월호, 무엇이 이 시대의 복음이고 선교인가:선교의 반성과 오늘의 방향성 모색,한규무, 대한기독교서회 p.56
  11.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6) 290페이지

관련 서적

  • 이시원, 《월남이상재》(중앙서관, 1926)
  • 김설동, 월남이상재실기(월남이선생실기출판소, 1927)
  • 공보실 편, 월남이상재선생략전(대한민국 공보실, 1956)
  • 나라사랑 9―월남이상재 특집호―(외솔회, 1972)
  • 김을한, 《월남이상재일대기》 (정음사, 1976)
  • 전택부, 《월남이상재》 (한국신학연구소, 1977)
  • 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정음사, 1978)
  • 김성태, 월남이상재의 성격연구(성곡논집 4호, 1973)

틀:1992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