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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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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과 생애 초기 ===
=== 생애 초반 ===
==== 출생과 생애 초기 ====
오음 윤두수는 1533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으나,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오음 윤두수는 1533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으나,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윤변]]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나 후에 아들들의 현달로 [[영의정]]에 [[추증]]된다. 본처에게서 담수와 춘수를 얻었으나, 본부인을 잃고 후처를 얻어 두수와 근수 형제를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윤변은 일찍 사망한다.
아버지 [[윤변]]은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나 후에 아들들의 현달로 [[영의정]]에 [[추증]]된다. 본처에게서 담수와 춘수를 얻었으나, 본부인을 잃고 후처를 얻어 두수와 근수 형제를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윤변은 일찍 사망한다.


=== 학문 활동 ===
==== 학문 활동 ====
그보다 20여 세 연상의 이복 형인 [[윤담수]]와 [[윤춘수]]가 있었고, 아래로는 친동생인 [[윤근수]]가 있었다.
그보다 20여 세 연상의 이복 형인 [[윤담수]]와 [[윤춘수]]가 있었고, 아래로는 친동생인 [[윤근수]]가 있었다.



2011년 5월 29일 (일) 17:32 판

윤두수
출생1533년
조선 한성부
사망1601년
조선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 시호는 문정(文靖).
학력1558년 문과 별시에 급제
직업문신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아버지 윤변, 어머니 현씨
배우자정경부인 황씨
자녀장남 윤방, 차남 윤흔, 삼남 윤휘, 사남 윤훤, 오남 윤우
친척이복 형 윤담수, 이복형 윤춘수, 동생 윤근수, 손자 윤신지, 손자 윤취지

윤두수(尹斗壽, 1533년~1601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며, 서인(西人)의 일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는 자앙(子仰), 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1] 서인 중진 문신. 이조정랑으로 있던 명종 때 권신 이량(李梁)의 아들 이정빈을 천거하자 그는 끝까지 거절하여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이량 등이 실각한 후 복직되었다.

선조동인들로부터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음해 연안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대사헌 때 당쟁 과정에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복직되어 임금을 개성에 호종, 어영대장을 지낸 후 의정부영의정까지 올랐다.

윤근수의 형이며, 윤보선·윤치영·윤치호의 선조이자[2], 순종순정효황후의 친정인 윤덕영, 윤택영의 선조였다. 또한 선조의 부마 윤신지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생애 초기

오음 윤두수는 1533년 윤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으나,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윤변군자감정(軍資監正)에 이르렀으나 후에 아들들의 현달로 영의정추증된다. 본처에게서 담수와 춘수를 얻었으나, 본부인을 잃고 후처를 얻어 두수와 근수 형제를 보았다. 그러나 아버지 윤변은 일찍 사망한다.

학문 활동

그보다 20여 세 연상의 이복 형인 윤담수윤춘수가 있었고, 아래로는 친동생인 윤근수가 있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황(李滉)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된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다른 동문인 박승임, 유성룡 등은 동인이 되나 그는 서인을 선택하게 된다.

관료 생활

관료생활 초반

1555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1558년 문과 식년시에 을과 17등위로 급제하여[3] 승문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예문관검열, 홍문관정자, 저작 등의 직위를 지냈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 기대승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에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이때 이감은 그가 박소립, 이문형, 허엽 등과 파벌을 만들고 부박하게 선동한다며 탄핵했으나 심의겸이감이량의 당여라고 공격하여 대호군으로 전임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해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 등의 상계(上啓)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선조 즉위 이후

그 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후 이종 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동생 윤근수와 함께 연좌되어 파직당했다.

1579년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다시 기용되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하여 재령군수 최립(崔岦)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하였다 하여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전라도관찰사(通政大夫守全羅道觀察使), 1589년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형조판서(刑曹判書), 대사헌,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냈다.

159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대사헌 재직 중 왕세자 책봉 문제로 벌어진 동인서인 간의 당파싸움인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이산해 등과 함께 신성군을 지지하기로 했으나 광해군을 지지하는 문제로 누명을 쓰고 동생과 함께 삭탈관직되어 회령으로 유배를 갔다.

임진왜란 시절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피난가는 선조를 호송하여 어영대장(御營大將)과 우의정, 좌의정으로 연달아 승진하여 국난 극복에 주력하게 된다. 이때 그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조선만의 힘으로도 능히 일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며 임진강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개성을 연달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한 일본군의 공격으로부터 평양을 사수하려 했으나 패하고 만다.

평양성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 요청을 전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윤두수는 급히 쫓아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으며 부디 망명 요청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593년에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하게 되고, 1595년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생애 후반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하여졌다. 그는 평소 온화하고 화평하였으나, 큰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극복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주요 저서

  • 《오음유고》(梧陰遺稿)
  • 《기자지》(箕子誌)

가족 사항

사육신과의 관계

사후 그는 경기도 개성에 모시지 못한 고조모 고성박씨의 비석을 세웠다.[4] 고조모 고성박씨는 사위가 사육신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자 장남 윤계정[5]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을 데리고 경상북도로 피신했다.

윤두수의 고조부 윤연령 내외는 사육신 박팽년과 인척관계였다. 윤두수의 증대고모 윤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형 박대년의 부인이었다. 그러나 사육신이 화를 당하면서 박팽년의 형수인 윤씨는 봉석주 집의 노비로 제공되었다. 봉석주가 윤씨에게 자신의 첩이 되기를 원하자, 윤씨는 봉석주의 첩이 되었다.

기타

서인(西人)이었던 그는 임진왜란 당시 동인의 지지를 받는 이순신(李舜臣)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이때문에 이순신임진왜란을 극복한 성웅(聖雄)으로 신격화되면서 그를 비난할 때 역비난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한편 대한민국대통령을 지낸 윤보선(尹潽善), 서울특별시장 윤치영(尹致瑛) 등은 그가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자, 누군가에 의한 무고라고 해명한다.

주석

관련 항목

참고 문헌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국조보감
  • 난중일기
  • 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