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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 고리 ==
== 바깥 고리 ==

2011년 5월 4일 (수) 22:00 판

돈의문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 중의 하나로 서쪽의 정문이다.

한양 도성 서쪽의 큰 문이라 하여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다. 돈의문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중구 정동의 '신문로'나 '새문안길,'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돈의문의 다른 이름인 '신문', '새문' 에서 따온 말이다. 돈의문은 1915년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경성도시개발계획에 따른 전차의 복선화로 인해 강제로 헐렸다.

위치

이름에 따라 서대문구에 위치했던 것으로 혼동할 수 있으나, 현재 알려지는 실제 위치는 지금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서대문구가 아닌 중구 관할 지역에 존재하였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 라는 표지석이 있다.

역사

돈의문은 1396년(조선 태조 5년) 한양 도성의 제2차 축성 공사가 끝나고 8문이 완성되던 때 처음 세워졌다.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돈의문을 폐쇄하고, 그 대신 그 북쪽에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출입하게 하였다. 그러나, 1422년(조선 세종 4년)에 다시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수리하였다. 그 뒤에 헐어진 것을 보수하여 1711년(조선 숙종 37년)에 다시 지었다가, 1915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건축적 특징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둘레의 담장은 곧 서울성곽과 연결되었다.

복원

서울특별시는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이 자리에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새로 복원되는 돈의문과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경교장 (현 삼성서울병원 본관)과 서울성곽 등을 한 축으로 묶어 서울의 역사문화중심지로 개발할 방침이다.[1]

명칭의 유래

사대문 및 보신각의 명칭은 유학의 덕목인 오상(五常)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에서 따왔다. 그리하여 “돈(義)문”의 명칭은 서쪽의 의(義)를 집어 넣어 만들어졌다.

교통

바깥 고리

주석

틀:서울의 랜드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