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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전'''(禹性傳, [[1542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우성전'''(禹性傳, [[1542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본관은 [[단양 우씨|단양]], 자는 경선, 호는 추연과 연암, 시호는 문강으로 유학자 [[이황]]의 문하생이다. [[허균]]의 매형이자 [[허난설헌]]의 형부이며 초당 [[허엽]]의 사위이기도 하다. [[156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봉교, 수찬 등을 지냈다. [[1583년]]에 응교에 오르고 사인을 역임하였으며 [[동인 (정치)|동인]]으로 활동하다가 뒤에 동인이 분당될 때는 [[남인]]의 거두로 앞장섰다.
본관은 [[단양 우씨|단양]],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과 연암(淵庵), 아버지는 현령 언겸(彦謙)이다. 시호는 문강으로 유학자 [[이황|이황(李滉)]]의 문하생이다. 초당 [[허엽]]의 사위이며 [[허균]] 매형이자 [[허난설헌]]의 형부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봉교를 거치고 부수찬으로 1572년 정공도감(正供都監) 혁파를 건의하여 관철시켰으며, 경연에서 <서경(書經)>을 강의하기도 하고,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73년에는 기대승(奇大升)의 제사를 하사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1576년 수원현감을 지냈다.
그러나 [[1591년]] 시인 [[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삭직당했다. 수원 현감으로 근무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추의군(秋義君)이라 칭하고 [[강화]]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로 들어가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으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다.


1581년 재주를 믿고 논변을 좋아해 그 동아리가 성세를 떨치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 때 그는 김효원(金孝元)·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동인을 대표했으며, 그 뒤 이발(李潑)과 사이가 벌어져 그가 남산(南山)에 살아서 [[남인]]으로, 이발이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이 시기 동안 장령, 사옹원정을 역임하고 [[1583년]]에 응교에 오르고, 의정부 사인을 역임하였다.
사후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홍예문관 대제학 에 추증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에 부인 양천허씨 묘소 옆에 있다. 저서로는 《역설》, 《이기설》, 《[[계갑일록]]》 등이 있다.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삭직당했다. 수원 현감으로 근무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추의군(秋義君)이라 칭하고 [[강화]]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로 들어가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행주에서는 권율(權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에 부인 양천 허씨 묘소 옆에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 때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역설(易說)》, 《이기설(理氣說)》, 《계갑일록(癸甲日錄)》 등이 있다.<ref>http://www.kgib.co.kr/new/04_project/project_news.php?idx=303700&cate=ps13</ref>


== 가족 ==
== 가족 ==
* 부인 : 증 정부인 양천허씨
* 부인 : 증 정부인 양천 허씨


== 참고항목 ==
== 참고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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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의병]]
[[분류:의병]]
[[분류:과로사]]
[[분류:과로사]]


== 참조 ==
<references/>

2011년 4월 3일 (일) 15:53 판

우성전(禹性傳, 1542년 ~ 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본관은 단양,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과 연암(淵庵), 아버지는 현령 언겸(彦謙)이다. 시호는 문강으로 유학자 이황(李滉)의 문하생이다. 초당 허엽의 사위이며 허균의 매형이자 허난설헌의 형부이다.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봉교를 거치고 부수찬으로 1572년 정공도감(正供都監) 혁파를 건의하여 관철시켰으며, 경연에서 <서경(書經)>을 강의하기도 하고, 향약의 시행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573년에는 기대승(奇大升)의 제사를 하사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1576년 수원현감을 지냈다.

1581년 재주를 믿고 논변을 좋아해 그 동아리가 성세를 떨치자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 때 그는 김효원(金孝元)·유성룡(柳成龍) 등과 함께 동인을 대표했으며, 그 뒤 이발(李潑)과 사이가 벌어져 그가 남산(南山)에 살아서 남인으로, 이발이 북악(北岳)에 살았기 때문에 북인으로 나누어졌다. 이 시기 동안 장령, 사옹원정을 역임하고 1583년에 응교에 오르고, 의정부 사인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이 물러날 때 북인의 책동으로 삭직당했다. 수원 현감으로 근무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 2000명을 모집해 추의군(秋義君)이라 칭하고 강화에서 의병장 김천일의 휘하로 들어가 각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행주에서는 권율(權慄)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 겸 지제교로 특전되었으나 계속 의병장으로 활약해 후퇴하던 왜군을 의령까지 쫓았으나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으로 후송된 뒤 죽었다.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숙곡리에 부인 양천 허씨 묘소 옆에 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조 때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충강(忠康)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역설(易說)》, 《이기설(理氣說)》, 《계갑일록(癸甲日錄)》 등이 있다.[1]

가족

  • 부인 : 증 정부인 양천 허씨

참고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