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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4월 7일]]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은 김준연을 고발했고, 김준연은 [[박정희]]와 [[김종필]]을 [[외환죄]] 혐의로 맞고소했다.<ref name="그547"/> [[4월 18일]]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죄로 김준연의 구속동의 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했다.<ref name="그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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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선거 낙선과 생애 후반 ===
=== 만년 ===
[[1967년]]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1967년]]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독립노선 獨立路線》(1947)·《나의 소전(小傳)》(1957)·《나의 길》(1966)·《나의 편력(遍歷)》(1969) 등이 있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건국공로훈장]])을, [[1969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고 [[1971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영결식은 [[1972년]] [[1월 7일]] 서울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고,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천주교묘지이다. <ref name="타계"> [http://www.kinds.or.kr/imgdata8/1972/01/04/19720104DAM01.pdf 《동아일보》(1972.1.4.) 1면]</ref>
저서로는 《독립노선 獨立路線》(1947)·《나의 소전(小傳)》(1957)·《나의 길》(1966)·《나의 편력(遍歷)》(1969) 등이 있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건국공로훈장]])을, [[1969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고 [[1971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영결식은 [[1972년]] [[1월 7일]] 서울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고,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천주교묘지이다. <ref name="타계"> [http://www.kinds.or.kr/imgdata8/1972/01/04/19720104DAM01.pdf 《동아일보》(1972.1.4.) 1면]</ref>

2011년 3월 26일 (토) 04:39 판

김준연(金俊淵, 아호는 낭산(朗山), 1895년1971년 12월 31일)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었다. 또한 조선공산당의 한 분파인 엠엘파의 중요 인사였다. 해방 후 전향하여 한민당 창당에 가담했으며, 단독 정부 수립에 지지를 보냈다.

1949년 민주국민당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참여하였으나, 탈당하여 자유민주당을 창당 조직하기도 했다. 1961년 5월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의 사상경력에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아호는 낭산으로 따라서 낭산 김준연으로 부른다. 전라남도 출신.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수학

김준연의 본관은 김해이다. 전라남도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김상경(相逕)의 9형제 중 장남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영암보통학교, 1917년 경기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했다. 성년기에 그는 호를 낭산이라 지었다.

1920년 일본 오카야마(岡山) 제6고등학교(대학예과과정), 1921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獨法科)를 거쳐, 이듬해 같은 대학 대학원 정치학과의 조수로서 일하였다. 1922년1924년에는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정치와 법률학을 연구하였다. 이후 영국 런던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언론 활동과 독립운동

김준연은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1925년소련을 시찰했고 조선일보 논설위원, 전 조선공산당 당수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6년부터 민족주의자의 통합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고, 1927년에는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로서 교단에도 섰다. 1927년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1] 192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할 때 제3차공산당사건(세칭 ML당사건)에 관련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 후 1934년 동아일보에서 주필을 지냈다. 1936년 손기정(孫基禎)의 일장기말살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한 뒤, 광복 때까지 경기도 전곡에서 해동농장(海東農場)을 관리하였다.[2]

일제 강점기 후반

또한 흥업구락부사건, 조선어 학회 사건 등을 주동하여 국내에서는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고, 8년의 투옥 생활과 9년 동안의 연금생활을 하였다.[2] 일제 시대 당시 김창숙과 함께 항일 세력의 양대 산맥이었으며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하는 0순위 인물이었다. 이 일화가 입증하듯 낭산은 국민들로부터 인기와 신망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며 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후 반민법 처리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2]

1940년 창씨개명이 떨어지자 그는 거절하였고, 계속 농장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이후 이승만이 출연하는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여러 번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한민당 창당 조직활동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1일 경기도지사 이쿠다를 통하여 조선의 자본가, 지주, 명사 세력을 대변할 수 있는 송진우를 접촉하여 '행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송진우는 중경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연합군의 승인을 이유로 대면서 그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어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4일 송진우와 가까운 김준연에게도 부탁했으나, 김준연은 송진우의 참여 없이는 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것 역시 무산되었고 치안권 위촉이 여운형에게 돌아갔다고 훗날 한민당측에서 사실인것 마냥 주장하지만, 1957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 지낸 엔도 류사쿠는 인터뷰를 통해 '한민당의 그 같은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중략..) 또 한국에서는 내가 처음에 송진우씨에게 이 문제를 상의했으나 송씨가 거부했기 때문에 여씨를 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나 그것은 잘못으로 내가 송씨 및 안재홍,장덕수씨를 만난 것은 종전 전 총력 연맹에 협력을 요청한 일이 있지만 그들이 깨끗이 거부하여 왔기 때문에 나도 그들의 신념을 이해하여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후 송씨와 안씨에게 교섭한 일은 없다.[3]

이후 고하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국민대회 준비회를 조직하였고,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김구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4]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5] 곧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4]

1946년 2월 민주의원 창설에 참여하였고,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과 한국민주당 상무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46년 3월 16일 발표한 '소련에 반성을 촉구'힌 방송 요지와 미국무성의 친소세력을 규탄하는 기사를 동아일보에 게재했다.[6]

정부 수립 활동 참여

낭산은 한민당 부당수 겸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제헌국회 의원, 헌법기초위원이 되어 직접 대한민국의 헌법을 작성했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힘썼다. 1948년 고향인 영암에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7]

국회의원 재임시, 국회 내의 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 1949년 민주국민당 상임당무위원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때는 조병옥 내무장관과 함께 빈약한 장비로 무장한 경찰 병력과 함께 대구 사수에 임했고, 1·4후퇴 때 법무장관으로서 안전한 철수를 위한 계획을 입안하기도 했다(참고로, 이때 대구는 백선엽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미 8사단 10연대, 미 25사단 27연대, 국군 8사단 10연대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내어 지켜냈다).

1954년 고향인 영암에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55년 동아일보사 중역 및 민주당 상무위원을 거쳐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유엔 한국대표도 지냈다. 1957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제2공화국 기간

제4·5대 의원이 되고, 1960년 3월 3·15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후 그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으나 윤보선측이나 장면측 양측과 모두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정국의 추이를 관망하였다.

야당 정치인

군사 정권 퇴진 운동

5·16 군사정변이후 김준연은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7차에 걸쳐 군사정권세력을 향해 폭탄연설을 하여 군사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1961년 5월 26일 그는 1961년 5월 26일자 미국 《타임》 지의 박정희 프로필을 인용하여 주장했다. "박정희 소장은 전에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군 반란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씨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받았다. 그는 지금 분명히 강력한 반공주의자이다.[9]"

그러나 김준연의 발언이 나온 뒤 정계는 술렁였고, 박정희의 사상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정희는 "허무맹랑한 일이어서 해명할 필요조차 없으며 법이 가려낼 것"이라고 응수했다.[9]

1963년 3월 16일 박정희가 군정연장을 선언하는 3·16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거두지 않자, 3월 19일 윤보선·김도연·장택상·김준연·이범석 등은 박정희에게 3·16 성명의 저의를 추궁하[10]였다.

1963년말 자유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이 되고, 1963년초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대통령 후보간의 갈등이 심하여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윤보선으로 대선후보가 확정되자 그는 윤보선을 지지하여 지원유세를 다녔다. 제5대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 중 윤보선 외에도 김준연 역시 박정희남로당 경력과 여순사건 관련 경력을 들어 박정희 사상의 건강성과 민주성을 의심하였다.

1964년에는 박정희의 한일회담에 반대,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이범석, 박순천, 장준하 등과 함께 한일협상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한일회담 반대 공방전

65년 3월 30일 그는 국회에서 정부가 한일협상을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사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11] 그리고 이 의혹은 장택상이 제보해주었다고 발표하였다.[11] 김준연의 주장은 장택상의 증언과[11] 일본 잡지에 기재된 기사, 우인기의 고소장 내용 등이었는데 조사위원회는 몇명의 증언만 듣고 종결시켜버렸다.[12]

65년 4월 7일 민주공화당은 김준연을 고발했고, 김준연은 박정희김종필외환죄 혐의로 맞고소했다.[12] 4월 18일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죄로 김준연의 구속동의 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했다.[12]

대통령 선거 낙선과 생애 후반

1967년 민중당 총재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

저서로는 《독립노선 獨立路線》(1947)·《나의 소전(小傳)》(1957)·《나의 길》(1966)·《나의 편력(遍歷)》(1969) 등이 있다.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3년 대통령표창(건국공로훈장)을, 1969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고 1971년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영결식은 1972년 1월 7일 서울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고, 장지는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천주교묘지이다. [13]

약력

가족 관계

  • 3녀: 김자옥(金子玉), 김자향(金子香), 김자선(金子善)[13]

주석

  1. 1927년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지형 기자. “반민특위에 스며든 부적격자들, 친일파 청산 좌절의 한 원인”. 월간민족21. 2010년 8월 9일에 확인함. 
  3. 1957년 8월 18일. 엔도 정무총감의 말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총독부 농상과장 최하영의 회고록.(월간중앙) 발췌.
  4.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1993,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255
  5. 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
  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34쪽.
  7. '헌법기초위원회' - 네이트 백과사전
  8. 국회 내의~: 민족정기의 심판
  9.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민연, 2000) 143페이지
  10. 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4) 346페이지
  11. 이병주 《그해 5월》 3 (이병주 지음, 한길사, 2006) 266페이지
  12. 이병주 《그해 5월》 3 (이병주 지음, 한길사, 2006) 267페이지
  13. 《동아일보》(1972.1.4.) 1면

참고자료

바깥 링크

관련 서적

  • 《나의 길》(김준연, 1966)
  • 《나의 편력》(김준연, 매일경제신문 연재, 1969)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윤보선,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동아일보사, 1991)
전임
이우익
제4대 법무부장관
1950년 11월 23일 ~ 1951년 5월 6일
후임
조진만
전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영암군)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한국민주당
후임
류인곤
전임
류인곤
제3대 국회의원(영암군)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민주국민당
후임
김준연
전임
김준연
제4대 국회의원(영암군)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통일당
후임
김준연
전임
김준연
제5대 국회의원(영암군)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통일당
후임
김준연
전임
김준연
제6대 국회의원(영암군·강진군)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자유민주당
후임
윤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