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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고승전]]》에 나타난 제목에 의거하여 현광이 [[진 (남조)|진나라]](陳: 557~589) 때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ref name="불광-격의">{{언어고리|zh|크기=9pt}} [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8874&DTITLE=%A5%C8%A5%FA "玄光"],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3판.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송고승전]]》에 나타난 제목에 의거하여 현광이 [[진 (남조)|진나라]](陳: 557~589) 때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ref name="불광-격의">{{언어고리|zh|크기=9pt}} [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8874&DTITLE=%A5%C8%A5%FA "玄光"],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3판.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 "[[신라|新羅國]]熊州人。自幼頴悟,出家後即有遠遊之志,遂來中國,於陳太建五年(573)登南嶽,謁見慧思,受學法華安樂行義,奉行精勤,不久即證法華三昧。"</ref><ref name="운허-玄光(현광)">운허 & 동국역경원. [http://buddha.dongguk.edu/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D%98%84%EA%B4%91&rowno=1 "玄光(현광)"], 《불교 사전》.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 "[[신라|新羅國]]熊州人。自幼頴悟,出家後即有遠遊之志,遂來中國,於陳太建五年(573)登南嶽,謁見慧思,受學法華安樂行義,奉行精勤,不久即證法華三昧。"</ref><ref name="운허-玄光(현광)">운허 & 동국역경원. [http://buddha.dongguk.edu/bs_detail.aspx?type=detail&from=&to=&srch=%ED%98%84%EA%B4%91&rowno=1 "玄光(현광)"], 《불교 사전》.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 [[신라]] 스님. 진흥왕 때 [[웅주]](熊州) 사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세속과 어울리지 않고 깨끗한 행을 닦다. 뒤에 중국 [[진 (남조)|진(陳)나라]]에 가서 형산의 [[혜사]](慧思)에게 『법화경』 안락행품을 배우고, 연구 통달. 법화 삼매를 증득하고</ref> 그러나 한국의 고대 불교 전공 학자들에 따르면 현광이 [[백제]]의 승려인 것이 확실하다.<ref name="글로벌-현황"/><ref name="안계현-현광-p15">안계현 (1983),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p.15.:
: [[신라]] 스님. 진흥왕 때 [[웅주]](熊州) 사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세속과 어울리지 않고 깨끗한 행을 닦다. 뒤에 중국 [[진 (남조)|진(陳)나라]]에 가서 형산의 [[혜사]](慧思)에게 [[법화안락행문|『법화경』 안락행품]]을 배우고, 연구 통달. [[법화 삼매]]를 증득하고 인가를 청하니, [[혜사]]는 “그대의 증득한 것이 진실하여 허망치 아니하니, 잘 지켜 호념(護念)하여 법으로 하여금 증장하게 하며, 본국에 돌아가 훌륭한 방편을 펴도록 하라”라고 말하므로, 현광이 예배하고 물러나 강남(江南)에서 본국 배를 타고 [[웅주]] 옹산으로 돌아와서 절을 짓고 여러 사람을 교화하였다.</ref> 그러나 한국의 고대 불교 전공 학자들에 따르면 현광이 [[백제]]의 승려인 것이 확실하다.<ref name="글로벌-현황"/><ref name="안계현-현광-p15">안계현 (1983),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p.15.:
:해동의 웅주 또는 웅천이라 하면 백제의 구도인 오늘의 충청남도 공주를 가리킨다. 현광이 그 웅주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후에 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자리잡은 곳도 웅주였다. 더우기 그가 사사했던 천태종 제2조 혜사가 광주 대소산으로부터 남악형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진 광대 2년(568)의 일이었고, 그후 태건 9년(577)에 임종할 때까지 전후 10년간을 내내 그 형산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므로 현광이 형산의 혜사에게 배우고 귀국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 되는 셈이다. 이 무렵의 해동 웅주인이 백제인이었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중략) 그런데 일찌기 1930년에 홀활곡쾌천사(忽滑谷快天師)가 신라승이라고 발설한 이래 아무런 검토와 비판없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광을 신라승으로 다루어 온 경향이 짙었다.</ref><ref name="고익진-현광">고익진 (1989). 《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p. 106.:
:해동의 웅주 또는 웅천이라 하면 백제의 구도인 오늘의 충청남도 공주를 가리킨다. 현광이 그 웅주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후에 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자리잡은 곳도 웅주였다. 더우기 그가 사사했던 천태종 제2조 혜사가 광주 대소산으로부터 남악형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진 광대 2년(568)의 일이었고, 그후 태건 9년(577)에 임종할 때까지 전후 10년간을 내내 그 형산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므로 현광이 형산의 혜사에게 배우고 귀국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 되는 셈이다. 이 무렵의 해동 웅주인이 백제인이었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중략) 그런데 일찌기 1930년에 홀활곡쾌천사(忽滑谷快天師)가 신라승이라고 발설한 이래 아무런 검토와 비판없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광을 신라승으로 다루어 온 경향이 짙었다.</ref><ref name="고익진-현광">고익진 (1989). 《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p. 106.:
:고구려승 반야가 천태지의의 교시를 받고 천태산 화정봉에서 16년간(598~613) 수선(修禪)한 뒤 하산{{.cw}}입적 했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런데 백제의 현광은 그보다도 앞서 진의 남악 형산에 들어가 그곳 혜사(천태종 제3조, 515~577)에게 "법화안락행문"을 밀수받고 "법화삼매"를 증한다.</ref>
:고구려승 반야가 천태지의의 교시를 받고 천태산 화정봉에서 16년간(598~613) 수선(修禪)한 뒤 하산{{.cw}}입적 했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런데 백제의 현광은 그보다도 앞서 진의 남악 형산에 들어가 그곳 혜사(천태종 제3조, 515~577)에게 "법화안락행문"을 밀수받고 "법화삼매"를 증한다.</ref>

2011년 3월 23일 (수) 21:28 판

현광(玄光)은 6세기경 백제의 고승이다.[1]송고승전(宋高僧傳)》 제18권에는 "진신라국현광전(陳新羅國玄光傳)"이라는 제목 하에 현광에 대한 전기가 들어 있다.[2]

송고승전》에 나타난 제목에 의거하여 현광이 진나라(陳: 557~589) 때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3][4] 그러나 한국의 고대 불교 전공 학자들에 따르면 현광이 백제의 승려인 것이 확실하다.[1][5][6]

현광은 웅주(熊州: 백제의 옛 수도였던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5])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진나라(陳: 557~589)에 가서 중국 천태종의 종조인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지의(智顗: 538-597)의 스승이었던 남악대사(南嶽大師) 혜사(慧思: 515~577)[7][8][9]로부터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우고 돌아와서 웅주(熊州) 옹산(翁山)에 절을 짓고 법화를 전함으로써 한국의 법화종(法華宗)의 조사가 되었다.[1]

주석

  1.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삼국시대의 사상 > 삼국시대의 불교사상 > 현황,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중국어) 송(宋) 찬녕(贊寧) (988년). 《송고승전(宋高僧傳)》 제18권, 대정신수대장경, T50 No. 2061. T50n2061_p0820c13(00) - T50n2061_p0821a04(02).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新羅國玄光傳
    釋玄光者。海東熊州人也。少而穎悟頓厭俗塵。決求名師專修梵行。迨夫成長願越滄溟求中土禪法。於是觀光陳國利往衡山。見思大和尚開物成化。神解相參。思師察其所由。密授法華安樂行門。光利若神錐無堅不犯。新猶劫貝有染皆鮮。稟而奉行勤而罔忒。俄證法華三昧。請求印可。思為證之。汝之所證真實不虛。善護念之令法增長。汝還本土施設善權。好負螟蛉皆成蜾蠃。光禮而垂泣。自爾返錫江南。屬本國舟艦附載離岸。(중략) 光歸熊州翁山。卓錫結茅乃成梵剎。
  3. (중국어) "玄光",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3판.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新羅國熊州人。自幼頴悟,出家後即有遠遊之志,遂來中國,於陳太建五年(573)登南嶽,謁見慧思,受學法華安樂行義,奉行精勤,不久即證法華三昧。"
  4. 운허 & 동국역경원. "玄光(현광)", 《불교 사전》.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신라 스님. 진흥왕 때 웅주(熊州) 사람.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세속과 어울리지 않고 깨끗한 행을 닦다. 뒤에 중국 진(陳)나라에 가서 형산의 혜사(慧思)에게 『법화경』 안락행품을 배우고, 연구 통달. 법화 삼매를 증득하고 인가를 청하니, 혜사는 “그대의 증득한 것이 진실하여 허망치 아니하니, 잘 지켜 호념(護念)하여 법으로 하여금 증장하게 하며, 본국에 돌아가 훌륭한 방편을 펴도록 하라”라고 말하므로, 현광이 예배하고 물러나 강남(江南)에서 본국 배를 타고 웅주 옹산으로 돌아와서 절을 짓고 여러 사람을 교화하였다.
  5. 안계현 (1983), 《한국불교사상사연구》, 동국대학교 출판부, p.15.:
    해동의 웅주 또는 웅천이라 하면 백제의 구도인 오늘의 충청남도 공주를 가리킨다. 현광이 그 웅주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후에 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자리잡은 곳도 웅주였다. 더우기 그가 사사했던 천태종 제2조 혜사가 광주 대소산으로부터 남악형산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진 광대 2년(568)의 일이었고, 그후 태건 9년(577)에 임종할 때까지 전후 10년간을 내내 그 형산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므로 현광이 형산의 혜사에게 배우고 귀국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의 일이 되는 셈이다. 이 무렵의 해동 웅주인이 백제인이었음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중략) 그런데 일찌기 1930년에 홀활곡쾌천사(忽滑谷快天師)가 신라승이라고 발설한 이래 아무런 검토와 비판없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광을 신라승으로 다루어 온 경향이 짙었다.
  6. 고익진 (1989). 《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p. 106.:
    고구려승 반야가 천태지의의 교시를 받고 천태산 화정봉에서 16년간(598~613) 수선(修禪)한 뒤 하산 · 입적 했다는 것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런데 백제의 현광은 그보다도 앞서 진의 남악 형산에 들어가 그곳 혜사(천태종 제3조, 515~577)에게 "법화안락행문"을 밀수받고 "법화삼매"를 증한다.
  7. 운허 & 동국역경원. "慧思(혜사)", 《불교 사전》.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8. 운허 & 동국역경원. "南嶽(남악)", 《불교 사전》. 2011년 3월 23일에 확인.
  9.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분파 > 중국불교의 종파> 천태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