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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내용을 ‘* ''' 석준'''(金鮮英, 1914 ~ 1995)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배우이다. * ''' [[석준 (음악가)|...’으로 교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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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준 (349년)|석준]]'''(金鮮英, 1914 ~ 1995)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배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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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 (石遵, ? ~ [[349년]], 재위:[[349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5대의 황제이다. 시호나 묘호는 받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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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준 (음악가)|석준]](Seokjune)'''(1952 ~ )은 대한민국의 [[독립음악]] 뮤지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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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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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 (음악가)|'''석준''']](SeokJune) - [[독립음악]] 뮤지션. 소속사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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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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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준은 [[석호 (후조)|석호]](石虎)의 아들로 석호의 치세 때는 팽성왕(彭城王)에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349년]]에 석호에 의해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으며 관중(關中 :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 중부)을 진수하도록 명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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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업 (중국)|업]](鄴)으로 귀환한 석준은 황후 유씨(劉氏), 장시(張豺) 등의 방해로 석호를 만나보지 못한 채 임지를 향해 떠났다. 곧 석호가 사망하고 [[석세]](石世)가 즉위하였다. 석준은 하내(河內)에서 이 소식을 들었으며, 마침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중이던 [[부홍|포홍]](蒲洪), [[요익중]], [[염민|석민]](石閔) 등과 이성(李城)에서 조우하였다. 제장들이 석준에게 황위를 빼앗을 것을 권하자 석준은 찬탈을 결심하고 거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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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수도 업의 병력은 이농(李農)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석준은 손쉽게 수도를 장악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석준은 각지의 종실왕들을 위무하고 석민과 이농을 중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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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석준의 즉위에 반대하여 패왕(沛王) 석충(石沖)이 [[연경|계]](薊)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동진]](東晉)이 쳐들어와 서주(徐州 : [[장쑤 성]] 북부)를 위협하였다. 석준은 석민을 파견하여 석충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농을 보내 동진군을 격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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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낙평왕(樂平王) 석포(石苞)가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동진의 양주(梁州)에서 관중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거병하지 못하였다. 이를 틈타 석준은 석포를 체포하고 관중을 안정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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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가 안정되자 석준은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다. 석민은 석준의 쿠데타에서 큰 전공을 세운 후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등 전횡을 부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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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석준은 여러 종실왕들과 석민을 제거할 모의를 하였으나 태후 정씨가 반대하여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에 참여하였던 의양왕(義陽王) [[석감]](石鑒)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곧 석민이 반정을 일으켜 석감을 옹립하고 석준을 폐위해 살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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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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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이름=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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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이름=후 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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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자= [[석세]](石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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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책 = [[후조]]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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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수=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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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기= [[34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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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임자= [[석감]](石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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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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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생년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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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349년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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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후조의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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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후조의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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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암살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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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Shi Z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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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石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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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Shi Z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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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石遵]] |
2011년 3월 18일 (금) 06: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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