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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신천동 (서울)]]
* [[신천동 (서울)|신천동]]
* [[송파구]]
* [[송파구]]
* [[잠실섬과 부리도]]
* [[잠실섬과 부리도]]

2010년 9월 21일 (화) 00:04 판

잠실본동
국가대한민국
지역서울특별시 송파구
관청 소재지송파구 백제고분로15길 9 (잠실본동 230-1)
지리
면적0.94km2
인문
인구31,202명(2009.11.30)
세대14,233세대
인구 밀도33,000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잠실본동주민센터
잠실2동
국가대한민국
지역서울특별시 송파구
관청 소재지송파구 올림픽로 159 (잠실2동 22-7)
지리
면적2.18km2
인문
인구35,385명(2009.11.30)
세대12,541세대
인구 밀도16,200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잠실2동주민센터
잠실3동
국가대한민국
지역서울특별시 송파구
관청 소재지송파구 잠실로 51-31 (잠실3동 27-4)
지리
면적1.49km2
인문
인구37,573명(2010.3.31)
세대12,963세대
인구 밀도25,200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잠실3동주민센터
잠실7동
국가대한민국
지역서울특별시 송파구
관청 소재지송파구 백제고분로8길 13 (잠실7동 85)
지리
면적0.60km2
인문
인구10,736명(2009.11.30)
세대3,524세대
인구 밀도18,000명/km2
지역 부호
웹사이트잠실7동주민센터

잠실동(蠶室洞)은 송파구법정동이자 중심지역으로, 행정동상 잠실본동, 잠실2동, 3동, 7동에 해당한다.

역사

이곳은 조선 세종때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기 위하여 국립양잠소인 잠실도회가 설치되었다. 지금의 서대문구 연희동 쪽에 있던 서잠실과 함께 설치한 동잠실로서 잠실마다 실을 뽑아서 승정원에게 바치게 하고 그 정교함과 수량에 따라 상을 주가나 벌을 내리기도 하였던 곳이다. 그때 붙여진 이름이 잠실(蠶室)이라는 지명이다. 서초구 잠원동의 잠실은 송파구 잠실보다 늦게 생겼으므로 '신잠실'이라고도 불렀다. 이후에 이곳과 혼동되지 않도록 지금의 잠원동에서 잠실리의 ‘잠(蠶)’자와 인근 신동면(新東面) 신원리(新院里)의 ‘원(院)’자를 따서 '잠원동(蠶院洞)'으로 바꿨다고 한다. [1]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에 속해 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 111호에 의거하여 경기도 내 각 면의 명칭과 구역을 새로 정함에 따라 이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편입되어 잠실리가 되었다. 광복 후 1949년 대통령령 제 159호에 의해 서울특별시가 확장됨에 따라 고양군 독도면 전부가 서울시에 편입됨으로써, 이 지역은 성동구에 속하게 되고 잠실리에서 잠실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1년 국토 개발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한강개발사업에 의해 이곳 지역은 대대적인 변형을 가져오는데 남쪽으로 굽어돌았던 송파강을 메워지고 잠실섬에 75만평의 새로운 부지가 조성되었다. 잠실 북쪽은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혀 파내고 신천강의 너비를 넓혀 줌으로써 새로운 한강의 물길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한강 개발 과정에서 한강의 범람으로 일시적으로 생기는 신천강을 본류로 삼고, 송파강(기존 한강)을 메우며, 지대를 높였던 것이다.(단, 기존 한강의 일부는 메우지 않아 석촌 호수로 남아 있다.) 이후 잠실동은 신천동과 함께 한강의 남쪽 지역으로 연육(連陸)되었고, 강남지역의 개발과 인구증가에 따라 1975년 대통령령 제 7816호에 의해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됨으로써 잠시 강남구에 속하기도 하였다. 70년대 말부터 아파트와 잠실 종합운동장이 들어서는 등의 변화를 거쳤으며, 행정구역도 서울 강남구에서 서울 강동구를 거쳐 서울 송파구에 속하게 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

애초에 이 지역은 강북 즉, 행정구역상 양주군 뚝도면(지금의 뚝섬)에 속하였으나 물의 범람으로 섬이 생겨 나게 되었다. 토사가 쌓이면서 제법 섬의 형태를 갖추었고 큰섬으로 변하게 되었다. 원래 한강은 송파에 접어들면서 신천강(새내)과 송파강(남쪽)으로 갈라져 큰 섬인 잠실섬(360만평)과 그 서남쪽의 작은 부리섬(30만평 가량)을 만들었다. 또 잠실 왼쪽에는 무동이라는 또다른 작은 섬이 한강 흐름의 변화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곤 했다. 부렴마을이 있던 부리섬은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잠실과 백사장으로 연결됐다. 예전의 한강은 광진교를 지나 남북으로 갈라져 흘렀다. 남쪽의 물길(송파강)은 현재의 석촌호수와 지하철 2호선 신천역 남쪽을 거쳐 잠실종합운동장 자리에서 탄천과 합쳤다. 북쪽 물길(신천강)은 현재 한강과 비슷한데, 너비는 절반 이하로 좁았다. 잠실·부리섬이 육지로 된 건 한강 공유수면 매립 사업 때문이었다. 1971년 남쪽으로 굽어돌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섬을 75만평의 육지로 만들었다. 잠실 북쪽은 물속으로 가라앉혀 신천강의 너비를 넓힘으로써 지금의 지형을 만들었다. 이 사업 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주변 터와 합친 340만평에 잠실아파트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만드는 잠실지구 종합 개발계획 사업이 추진돼 새로운 개발지로 변했다. [2]

파일:Seoul-Han.River-09.jpg
한강과 탄천 옆의 잠실운동장

한편 이곳에는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부근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길렀었다. 그런데 잠실의 누에치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으므로 이곳의 감독관은 궁궐의 환관, 즉 내시를 보내서 누에고치의 생산실적을 점검하게 하였다. 또한 중국 한나라때 사마천이 쓴「사기」를 일명 잠사(蠶史)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그가 궁형, 즉 남성 성기를 제거당하는 형벌을 받고 잠실에 보내져서 그곳에서 사기를 집필하였기 때문에 부르게 된 것이다.

교통

주요 시설

같이 보기

기타

누에는 고조선(古朝鮮)시대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가져온 벌레로 전해진다. 오래 전부터 한국인과 함께 하면서 길러 왔기 때문에 명칭도 다양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묘(帳), 검은 털을 벗지 못한 새끼를 의자(蟻子), 세 번째 잠자는 누에는 삼유(三幼), 27일 된 것을 잠노(蠶老), 늙은 것을 홍잠(紅蠶), 번데기를 용(踊), 성체를 아(蛾), 고치를 견(繭), 똥을 잠사(蠶砂)라 하였다고 한다. (네이트 백과사전 일부 참조)

주석

  1. 잠실본동 주민센터 유래 참조
  2. “뽕밭이 ‘콘크리트숲’ 으로”. 한겨레(네이트). 2010년 5월 11일에 확인함.  이름 목록에서 |이름1=이(가) 있지만 |성1=이(가) 없음 (도움말)
  3. 8호선 잠실역은 신천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