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판 베토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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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1784년]] 그의 첫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선제후(''Kurfürst'')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 헌정한 곡으로, 1783년에 출판되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는 베토벤이 보조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784년에 죽었으나, 일찌기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 젊은 베토벤의 음악 공부를 격려하고 돈도 대주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본의 선제후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 아들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본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형 [[요제프 2세]]가 [[빈]]에서 실시한 변화의 영향을 받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혁을 도입하여, 교육과 예술에 지원을 늘렸다. 당시 10대였던 베토벤도 확실히 이러한 개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프리메이슨]] 사상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는데, 네페를 비롯한 베토벤 주변 사람들은 [[일루미나티]] 지부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사용자:Osh1213|Osh1213]] ([[사용자토론:Osh1213|토론]]) 2010년 8월 30일 (월) 13:17 (KST)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1784년]] 그의 첫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선제후(''Kurfürst'')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 헌정한 곡으로, 1783년에 출판되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는 베토벤이 보조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784년에 죽었으나, 일찌기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 젊은 베토벤의 음악 공부를 격려하고 돈도 대주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본의 선제후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 아들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본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형 [[요제프 2세]]가 [[빈]]에서 실시한 변화의 영향을 받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혁을 도입하여, 교육과 예술에 지원을 늘렸다. 당시 10대였던 베토벤도 확실히 이러한 개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프리메이슨]] 사상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는데, 네페를 비롯한 베토벤 주변 사람들은 [[일루미나티]] 지부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사용자:Osh1213|Osh1213]] ([[사용자토론:Osh1213|토론]]) 2010년 8월 30일 (월) 13:17 (KST)


=== 사람들과의 만남 ===
=== 사람들과의 만남 ===

2010년 8월 30일 (월) 13:27 판

루트비히 판 베토벤(독일어: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판 베트호픈[*] IPA: [ˈluːtvɪç fan ˈbeːthoːfn],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거의 오스트리아 에서 살았다. 고전주의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그린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초상화(1820). 장엄 미사를 작곡하고 있다.
베토벤의 친필 사인

생애

유년 시절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토벤은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프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친척 [1](Franz Rovantini) 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침이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나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실제로는 7살)이라고 주장하였다.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1784년 그의 첫 피아노 소나타 세 곡은 선제후(Kurfürst)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 헌정한 곡으로, 1783년에 출판되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는 베토벤이 보조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784년에 죽었으나, 일찌기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 젊은 베토벤의 음악 공부를 격려하고 돈도 대주었다.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의 뒤를 이어 본의 선제후가 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 아들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본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형 요제프 2세에서 실시한 변화의 영향을 받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계몽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혁을 도입하여, 교육과 예술에 지원을 늘렸다. 당시 10대였던 베토벤도 확실히 이러한 개혁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프리메이슨 사상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는데, 네페를 비롯한 베토벤 주변 사람들은 일루미나티 지부의 회원이었기 때문이다.--Osh1213 (토론) 2010년 8월 30일 (월) 13:17 (KST)

사람들과의 만남

1787년 베토벤은 처음으로 빈에 여행을 떠났는데(비용은 누가 댔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 모차르트와 수학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으며, 실제로 두 사람이 만났는지에 대해서까지도 그러하다 빈에서 체재한 지 두 주 만에 베토벤은 어머니가 심한 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도 심해져서 두 동생을 돌보아야 하였다.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글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으며, 이 곳 아이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되어 그는 평생 친구이자 재정 지원자가 되었다.

1789년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교향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세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할 때 하이든과 베토벤은 분명 본에서 만났으며, 아마 이때 베토벤은 늙은 대가에게서 가르침을 얻었을 것이다. 그 사이 몇 년 동안 베토벤은 상당한 작품을 작곡하였는데,(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는 대부분 WoO로 분류된다) 그의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1792년 11월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리란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베토벤은 본을 떠나 빈으로 향하였다. 도착 직후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그에게 작별 편지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당신은 하이든의 손으로 모차르트의 정신을 얻을 것이오."라고 썼다. 이에 베토벤은 이후 몇 년간 모차르트풍 취향의 작품을 쓰고 대가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당시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다고 생각하였다.

음악수업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찌기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서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1794년 하이든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베르히트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연주활동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유명세를 타다

1803년의 베토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2]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3]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의 도시(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브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4]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5]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제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6]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7]

음악적 성숙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로브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2번와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Cooper)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v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조세피네(Josephine)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조세피네는 조세프 데임(Josef Deym) 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조세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데임이 죽은 뒤에도 조세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8]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에스(Ferdinand Ries)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9]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를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하였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0]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자신의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1]

청력 상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12]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가령 전신 홍반성 루푸스)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머리카락 시료에서 납이 높은 수준으로 검출되었기 때문에 이 가설은 널리 분석되었다. 납 중독일 가능성도 매우 높으나 이와 관련된 청력 상실이 베토벤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3]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바로 바깥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14]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15]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1815년의 베토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16]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레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17]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이런 책에다가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책에다가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으며,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제자 안톤 신들러가 음악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버렸다.(또는 고친 것도 있다)[18]

후원

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

베토벤은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었으나,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로브코비츠 공이나 리히노프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대공 3중주(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 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과 킨스키(Kinsky) 백작과 로브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로브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면서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작품 시기별 분류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초기는 1802년 정도까지, 중기는 1814년 정도까지 그리고 그 다음 해쯤부터 후기로 나눈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과 교향곡 2번 교향곡 2번과 처음 여섯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첫 세개의 피아노 협주곡들과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든다. 여기에는 비창과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서서히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 3번부터 교향곡 8번 8번까지의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들,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 발트슈타인과 열정을 포함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인 피델리오가 있다. 후기, 즉 낭만기는 1815년경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할 수 있다. 가령 현악 사중주 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교향곡 9번 9번 교향곡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밖의 이 시기 다른 작품으로 장엄미사, 마지막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후기 현악 사중주곡, 여기에는 대 푸가도 포함과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함머 클라비어와 마지막 세 소나타가 유명하다를 포함한다.

낭만주의적 특징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영국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E.T.A. 호프만과 같은 동시대인들로부터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불렸다. 그는 자주 연가곡의 첫 작곡가로 간주되며, 낭만주의적인 민속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교향곡

피아노곡

미사

  • 《미사 C장조》
  • 《장엄 미사》

관현악곡

  • 《웰링턴의 승리》

대 푸가 자필본

2005년 10월 13일, 공식적으로 179년 된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2005년 7월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Wynnewood의 Palm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 사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 악보는 115년간 분실된 상태였는데, 이 악보는 소더비 경매에 2005년 12월 1일 경매에 붙여져 195만 달러에 팔렸다. 전화로 경매에 참가하여 낙찰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19] 이 악보는 원래 1890년 목록에 올라와 있었고, 베를린에서 열린 경매에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한 사업가에게 낙찰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딸은 1952년에 그것과 모차르트의 〈판타지아〉를 포함한 다른 자필 악보를 펜실베니아 주의 한 교회에 주었다. 어떻게 그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도서관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바깥 고리

주석

  1. 프란츠 로반티니
  2. Cooper (2008), pp. 62–65
  3. Cooper (2008), p. 68
  4. Cooper (2008), p. 69
  5. Beethoven, Ludwig. “Letter to Andreas Streicher in Vienna, Preßburg” (독일어). Beethoven-Haus Bonn Digital Archives. 2009년 6월 28일에 확인함. 
  6. Cooper (2008), p. 72
  7. Cooper (2008), pp. 75–76
  8. Cooper (2008), p. 80
  9. Cooper (2008), pp. 98–103
  10. Cooper (2008), pp. 112–127
  11. Cooper (2008), pp. 112–115
  12. Grove Online, section 5
  13. Cooper (2008), p. 108
  14. Cooper (2008), p. 120
  15. White, Felix. “Some Tributes to Beethoven in English Verse”. 《The Musical Times》. Vol. 68. 
  16. Ealy, George Thomas. “Of Ear Trumpets and a Resonance Plate: Early Hearing Aids and Beethoven's Hearing Perception”. 《19th-Century Music》. Vol. 17: pp. 262–273. 
  17. Solomon (2001)[쪽 번호 필요]
  18. Clive, p. 239
  19. 동아일보의 관련기사

참고문헌

  • Clive, Peter., Beethoven and His World: A Biograph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1, ISBN 0-19-816672-9
  • Cooper,Barry., Beethoven Oxford University Press, US, 2008 ISBN 978-0-19-531331-4
  • Cross, Milton., The Milton Cross New Encyclopedia of the Great Composers and Their Music, Doubleday, Garden City, NJ, 1953
  • Landon, H C Robbins., Beethoven: a documentary study, Macmillan, 1970
  • Lockwood, Lewis., Beethoven: The Music And The Life, W. W. Norton, 2005, ISBN 978-0-393-32638-3
  • Solomon, Maynard., Beethoven , 2nd edition, Schirmer Books, New York, 2001, ISBN 0-8256-7268-6
  • Stanley, Glenn.(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Beethoven, 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0, ISBN 0-521-58074-9
  • Thayer, A. W., The Life of Ludwig Van Beethoven Vol,Beethoven Association, 1921
  • Kerman, Joseph; Tyson, Alan; Burnham, Scott G. "Ludvig van Beethoven", Grove Music Online, ed. L. Macy (accessed 29 November 2006), grovemusi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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