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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
== 제2차 세계 대전 ==
[[1940년]] 남지나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유럽에서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여 외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진주하였다. 원래 방침은 무력 사용 없는 진주였으나, 참모본부의 제1부장이었던 [[도미나가 교지]] 소장이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하였다.
[[1940년]] 남지나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유럽에서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여 외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진주하였다. 원래 방침은 무력 사용 없는 진주였으나, 참모본부의 제1부장이었던 [[도미나가 교지]](富永恭次) 소장이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미국]]과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여 [[미국]]은 [[일본]]에 대해 석유금수조치와 자산동결조치를 취했다. 안도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41년 1월에 예편처분 되었다.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은 미국과 협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미국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자, 결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전시체제를 표방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들어섰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미국]]과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여 [[미국]]은 [[일본]]에 대해 석유금수조치와 자산동결조치를 취했다. 안도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41년 1월에 예편처분 되었다.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은 미국과 협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미국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자, 결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전시체제를 표방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들어섰다.


그래서 안도와 도모나가의 이러한 독단행위는 [[중일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루거우차오 사건]]에 비견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안도는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을 당긴 이"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안도와 도미나가의 이러한 독단행위는 [[중일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루거우차오 사건]]에 비견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안도는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을 당긴 이"로 불리기도 한다.


잠시 예비역으로 지내다가 1941년 11월에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되어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타이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4년에는 타이완군이 개편된 제10방면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본이 필리핀에서 패퇴한 이후([[레이테 해전]]) 타이완의 안보가 위험해지자, 12월 30일, 군사령관인 그가 [[타이완 총독부|타이완 총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잠시 예비역으로 지내다가 1941년 11월에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되어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타이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4년에는 타이완군이 개편된 제10방면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본이 필리핀에서 패퇴한 이후([[레이테 해전]]) 타이완의 안보가 위험해지자, 12월 30일, 군사령관인 그가 [[타이완 총독부|타이완 총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 종전 이후 ==
== 종전 이후 ==

2010년 3월 13일 (토) 13:12 판

안도 리키치
출생지 일본, 미야기 현
사망지 중국, 상하이
복무 일본제국 육군
최종계급 대장
지휘 일본제국 육군 제5사단,
일본제국 육군 제21군,
일본 남지나 방면군
주요 참전 중일 전쟁
기타 이력 마지막 타이완 총독

안도 리키치 (일본어: 安藤 利吉, あんどう りきち, 1884년 4월 3일 ~ 1946년 4월 19일) 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으며, 타이완 총독을 역임한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이다.

초기 이력

미야기 현 출신으로 190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다시 1925년 장교의 출세 코스인 일본 육군대학을 26기로 졸업하였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안도는 영국령 인도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고, 돌아와 육군 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 1928년에는 제13보병 연대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에는 제5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1932년에는 다시 참모부로 돌아왔고 소장으로 승진하여 일본 육군성의 병무과장에 임명되었다. 1932년~1934년에는 영국에 주재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 귀국하여 도야마 육군보병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이후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후방직과 야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남지나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유럽에서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여 외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진주하였다. 원래 방침은 무력 사용 없는 진주였으나, 참모본부의 제1부장이었던 도미나가 교지(富永恭次) 소장이 독단으로 무력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미국과 외교적 마찰을 야기하여 미국일본에 대해 석유금수조치와 자산동결조치를 취했다. 안도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41년 1월에 예편처분 되었다. 일본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은 미국과 협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미국의 태도가 워낙 완강하자, 결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전시체제를 표방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이 들어섰다.

그래서 안도와 도미나가의 이러한 독단행위는 중일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루거우차오 사건에 비견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안도는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을 당긴 이"로 불리기도 한다.

잠시 예비역으로 지내다가 1941년 11월에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되어 대장으로 승진하였고, 타이완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44년에는 타이완군이 개편된 제10방면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일본이 필리핀에서 패퇴한 이후(레이테 해전) 타이완의 안보가 위험해지자, 12월 30일, 군사령관인 그가 타이완 총독을 겸임하게 되었다.

종전 이후

일본의 항복 이후 그는 최후의 타이완 총독으로서 중국타이완에 주재하던 일본인의 본토 송환에 노력하였다. 그 이후 타이완에서 중화민국에 항복하였고, 상하이로 압송되었으나, 감옥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중국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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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하세가와 기요시
제19대 타이완 총독
1944년 12월 ~ 1945년 10월
후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