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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9일 (일) 07:20 판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제1대 총통
임기 1934년 8월 2일~1945년 4월 30일
부총통 루돌프 헤스
후임: 카를 되니츠(2대)

나치 독일의 기 나치스 당의 당수
임기 1921년 7월 29일~1945년 4월 30일

신상정보
출생일 1889년 4월 20일
출생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 오스트리아-헝가리 브라우나우
사망일 1945년 4월 30일
사망지 나치 독일의 기 나치 독일 베를린
정당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당
배우자 에바 브라운
서명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오스트리아,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정치가로, 나치총통(대통령 겸 총리)이었다.

뛰어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던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하의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상황 속에서 베르사유조약의 군사 관련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확장, 실업 극복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 실업대책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슐라이허 내각에서 수립한 계획이었고, 히틀러는 그 열매를 따먹었을 뿐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후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중 그의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강제수용소가스실에서 학살당했으며 바로 그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외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로는 집시, 장애인도 있는데, 집시들은 나치의 강제수용으로, 장애인들은 의사들과 결탁한 조직적인 안락사로 학살당했다. 이러한 나치의 범죄는 집시와 유대인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 포위 아래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지하 벙커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물면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1]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소련에 의해 독약 자살로 판단되는 등 여전히 의문거리이다. [2]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알로이스에게는 알로이스 2세라는 장남과 안젤라라는 딸이 둘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둘과 딸 한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 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히틀러는 세계 정복을 꿈꾸기도 했다.

초기 생애

유년 시절

아기 때의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렸으며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히틀러 평전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아가 강하고 학업 성적은 전혀 우수하지 못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의 자기 중심적인 자세를 잘 보여준다.

13세 때 오스트리아 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그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독일어: Mein Kampf 마인 캄프[*])'에서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03년 1월에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3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기게 되었다. 그는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옆에서 누워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바가 있어 이후 죽을 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청년 시절

아돌프는 그가 18세 되던 해인 1907년 10월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떠나 그곳에서 고아들을 위한 약간의 보조금을 받고 이어 빈의 미술학교에 두 번 지원했지만 두 번 모두 학교측으로부터 입학을 거절당한다. 하지만 교수가 히틀러의 건축적 재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조언을 해준다. 그래서 히틀러는 건축가가 되기 위한 꿈을 가지고 건물 스케치와 여러가지의 도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건축가가 되기위해선 높은 학력이 필요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였고 21살 되던 해에는 받았던 보조금마저 끊기게 된다. 대신 아주머니로부터 약간의 돈을 물려받게 되는데 이마저 곧 바닥이 나게 되고 이후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다시 그려 상인에게 되파는 일개 그림장이 신세가 된다. 당시 그는 여전히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시설에 살고 있었고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가며 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종종 리하르트 바그너게르만 민족신화에 관련된 오페라를 감상하였다.

히틀러가 활발한 반유대주의자가 된 것은 빈에 있을 때부터였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자랐던 오스트리아의 기독교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빈에는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인 동방정교회 신도를 포함한 큰 유대인 사회가 있었다. 빈 사람들은 이 유대인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히틀러는 정치 평론가 란츠 폰 리벤펠스나 정치가 카를 뤼거, 비엔, 게오르히 리터 폰 쇠너러의 영향을 받아 후에 그의 정치관념의 밑바탕이 되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를 배웠다. 결국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아리아인의 적이며,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는 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영향을 끼쳤다.

화가로서의 히틀러

히틀러는 비엔나 콩쿨 대신 린츠 실업학교로 진학하면서 화가로서의 그의 생활이 단절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겼다. 현재 히틀러의 작품 중 한 점이 한화로 10억원에 해당되는 금액에 경매 낙찰되기도 했는데 그의 그림은 화가로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독재자였기 때문에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은 그림으로서의 작품성보다 화가의 인물적 특징이 훨씬 이슈가 되었다.[1][2][3][4][5][6]

독일 제국으로

그는 1913년바이에른 주의 뮌헨으로 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뮌헨으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오스트리아로부터 체포 영장을 들고 온 수사관들이 히틀러를 찾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군 징집을 거부하고 독일로 도망간 것이다. 히틀러는 이때 몸이 허약하여 도저히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지만, 히틀러는 슬라브족과 유태인으로 혼탁한 오스트리아군에서 군복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그에게 오스트리아는 조국이 아니었고, 그의 조국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독일 제국이었다. 그가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거부한 것도 그 때문이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선포되었다. 뮌헨 오데온 광장에서 전쟁을 선포하는 장교 앞에서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에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히틀러가 우연히 촬영되었다. 히틀러는 즉시 바이에른 16 보병연대 입대를 자원했다. 그에게 마음의 진정한 조국 독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군복무 시절

상병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패배의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에서 회복되자, 뮌헨의 제4군 사령부로 복귀해 활발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9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싹트고 있던 수많은 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를 조사하라는 군 정보부의 명령을 받았다.

나치당에 입당하여 지도자로

그러나 히틀러는 오히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라는 극우 정당에 당원증 제555번을 받으며 입당했다. 히틀러는 곧 당내에서 가장 유능한 연설가가 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20년 초,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0년 2월 24일, 뮌헨의 커다란 맥주홀인 호프브로이하우스에 모인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 히틀러는 그의 동지들이 추구하고 있는 운동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민주공화제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베르사유 조약의 타파,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다국적기업 공격 등을 포함한 25개 조항의 당 강령을 발표했다.

1923년의 히틀러의 초상화

베니토 무솔리니파시스트당로마 진군에 자극받은 히틀러는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으며 부상당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베르크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을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이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합법적인 운동으로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수감 생활은 6개월로 끝났으나 당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다. 히틀러는 흩어진 당원들을 다시 모으고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재건은 쉽지 않았다.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좌와 극우 정당들은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1929년, 검은 목요일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기업들이 도산하고, 살아나던 독일 경제는 실직자 수가 6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민주주의 정당들이 속수무책인 가운데 나치스는 18.3%의 득표율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단독 집권을 요구했다.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원래는 장군)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자본가나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독재자가 되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죽자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

나치스의 집권

1934년 6월의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전권위임법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했고 제3제국이 시작되었다. 지방 의회가 해산되고 사민당은 불법화되었다.

그리고 각종 단체와 조합들이 나치당의 하부조직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나치 조직 내부의 권력 재편에 착수하면서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나치 돌격대 지휘관 에른스트 룀을 제거, 이후 일어난 바르톨로메오의 밤 권력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비밀을 알고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제거를 통해 오래된 청구서를 모두 해결하였다.

그후 독일 국방군은 나치 당원에 융합되었고, 이러한 권력 인수와 더불어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지구수도

히틀러는 세계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전 세계를 정복하면 전세계의 수도에 해당되는 도시를 계획했다. 히틀러의 패망으로 이 계획은 도중 중단되었으나 굉장히 치밀하고 크게 심혈을 기울인 계획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라는 건축가를 고용하여 1938년에 인구 1억명의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오늘날 베를린에 해당되는 지역에 계획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게르마니아를 조성하기 위해 슈페르는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고 18만 명 이상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세웠다. 그러나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공사가 중단됨은 물론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3]

제2차 세계대전과 죽음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선전 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이는 스탈린이 히틀러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와의 군사조약이 있었으나 소련의 도움없이는 힘들다는 이유로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곧 기자들에게 '앉은뱅이 전쟁' 이라고 불리였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천명하며 직접 개입을 삼가하고 있었다.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전법으로 독일은 벨기에네덜란드, 룩셈부르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프랑스마저 항복하였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전체(중립국인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위스, 스웨덴은 제외)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우세한 공군을 쏟아 부어 폭격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게는 패배하였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왕국그리스 왕국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연합군의 마지막 보루인 영국에 공습을 퍼부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배틀 오브 브리튼이 실패했음에도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했고, 10월에는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소련의 매서운 겨울앞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나흘 후 히틀러는 미국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나 허스키 작전에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에 밀린 이탈리아가 영국군에 항복,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항복을 하게 되고 독일군은 천왕성 작전으로 인한 소련군의 반격에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게 패하고 치타델 작전의 대표적인 공격으로 대표되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전략적으로 패배하고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을 독일 본토까지 밀어내고 베를린을 점령함으로 곧이어 제2차세계대전의 끝이 났다.

1942년 6월 4일의 히틀러.
1945년 5월 2일성조기 신문 위에 Hitler dead(히틀러 죽음)라고 크게 써진 신문의 일부분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괴멸, 북아프리카 전선의 상실, 암살 미수로 인한 히틀러의 정신 이상 등이 초래한 전선의 혼란, 미국의 참전으로 전열이 더욱 두터워진 연합군의 진공으로 독일은 패망의 길을 걷는다. 1945년 4월 30일 절망한 히틀러는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게 된다.

논란

사인과 두개골

2009년 9월 27일, 영국 일간지인 가디언의 주말판 옵서버에서 미국 코네티컷 대학 고고학자이자 뼈 전문가인 닉 벨란토니 교수가 분석한 결과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 중인 히틀러의 두개골은 40대 미만의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보도했다. 벨란토니 교수가 이 두개골이 40대 미만의 여성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베를린 점령 직후인 1945년, 소련은 벙커 주변 구덩이에서 히틀러로 추정되는 시신을 발견했고, 이듬해인 1946년 추가발굴을 통해 히틀러의 두개골 조각을 찾아냈다고 주장해왔다. 그리고 2000년, 러시아국가기록보관소에 보관하고 있던 두개골을 공개하였다. 이 때부터 벨란토니 교수는 러시아가 '히틀러'라 주장하는 두개골의 DNA를 분석하였는데, 분석 결과 이 두개골은 20대~40대 사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이어서 벨란토니 교수는 "두개골 두께가 남성의 것과 달리 너무 얇았으며 두개골의 봉합선도 1945년 56세였던 히틀러의 나이와 달리 40세 이하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많은 외신들은 히틀러가 진짜 권총 자살했는지 의문시 되는 검사결과라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2가지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하지 않았거나, 두 번째는 러시아 국가기록보관소가 보관하고 있는 '히틀러'의 두개골이 히틀러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현재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4][5]

여성이었다는 논란

히틀러가 여자였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6]

  • 발견된 두개골의 분석결과가 여성의 것으로 나온 점.
  • 165cm의 작은 키와 좁은 어깨, 큰 엉덩이와 적은 근육량이 여성의 체형에 가까웠던 점.
  • 걸음걸이가 여성스럽게 조심스러웠으며, 콧털의 위치가 매번 바뀐 점.
  • 주치의가 쓴 기록에 의하면 히틀러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주기적으로 투여받은 점.
  • 히틀러가 여성 생식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담당 군의관의 기록과, 히틀러의 여자들이 전부 자살한 점.[6]
  • 히틀러 측근의 일기장에 히틀러가 어린 시절부터 성별을 감추고 남자아이처럼 자랐고 콧수염 역시 남자로 위장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문구가 있었다는 점.[7]

그러나 아직도 확실한 근거는 없는 상태이며 단순한 음모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어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생존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금까지도 히틀러가 당시 자살하지 않고 생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출처 필요]

  •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측에선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히틀러의 측근들은 권총 자살하였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다.
  •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교들에게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교들은 히틀러와 비슷한 몸매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였다.
  •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의 죽음후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이 누벰버그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였다.
  • 스탈린이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 라는 명령을 NKVD에 내렸다.

이 밖에도 다른 주장들이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리고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남극에 있는 비밀 기지로 도망갔다거나, 소비에트 연방에서 거주하다 1971년 사망했다거나,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는 등의 설들이 있으며, 그의 여러가지 생존설은 영화나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가족

주요 저서

참고 문헌

  1. Hitler's final witness. BBC News, 2002-02-04.
  2. 히틀러 평전, 요하임 페스트, 푸른 숲.
  3. 게르마니아, 히틀러가 꿈꾼 초대형 ‘세계 수도’ 모습 공개 :: 네이버 뉴스
  4. “히틀러 두개골, 알고보니 여자의 것?”. KBS. 2009년 9월 29일에 확인함. 
  5. '히틀러 두개골' 여성의 것”. 한국일보. 2009년 9월 29일에 확인함. 
  6. 권태명 기자. “독재자 히틀러가 여자?…‘성별논란’ 서프라이즈 재조명”. kwnews. 2009년 11월 8일에 확인함. 
  7. “히틀러는 여자? 측근 일기장에 “어린 시절부터 성별 감추고 남자아이처럼 자라””. 투데이코리아. 2009년 11월 8일에 확인함. 

바깥 고리

틀:나치 독일의 총통

전임
쿠르트 폰 슐라이허
독일총리
1933년 ~ 1945년 4월 30일
후임
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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