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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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8일 (수) 18:49 판

임진왜란

일본군의 부산침공
날짜1592년 음력 4월 13일 ~ 1598년 음력 11월 19일
장소
결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조선
선조
왕세자 광해군
이순신†,
이순신,
권율,
유성룡,
이억기†,
원균†,
김명원,
이일,
신립†,
곽재우,
김시민†,
송상현†,
고경명†,
김덕령,
유정,
휴정,
정문부,
김천일†,
조헌†,
김호†,
정기룡,
명나라
이여송,
이여백,
조승훈
마귀,
천만리,
유정,
양원,
진린,
등자룡

심유경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소 요시토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구루시마 미치후사
다테 마사무네,

다테 시게자네
병력

조선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음,
명나라
1차 원병 (1592–1593)
43,000명[1]
2차 원병 (1597–1598)

100,000명[2]

일본
1차 침입 (1592–1593)
약 160,000-235,000
2차 침입 (1597–1598)

약 141,000
피해 규모

조선 군인 합계 300,000여 명[모호한 표현]
명나라

군인 합계 30,000여 명[3][4]

일본

군인 합계 130,000여 명
민간인, 군인 합계 1,000,000여 명[5]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1597년 ~ 1598년 사이의 전쟁은 정유재란이라고도 불린다.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조선 수군의 대 활약상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만력의 역, 북조선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6]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대체로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한다.

배경 및 원인

1590년 일본 열도의 정권을 잡고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 자리를 그의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어 일본의 내정을 맡게 하고 스스로는 타이코(太合)라 칭하며 그의 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 한편 15세기 후반 서세동점에 따라 유럽 상인들이 일본에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기에 노력하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일본은 오랜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의 억제를 위하여 대륙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7]

오랜 전국 시대를 끝냈지만 아직 산재해 있던 일본 내의 불평 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향하려는 의도로 1591년 대마도주 소씨(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의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했는데, 그때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라는 주장을 사신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은 도의상 일본의 명 정복에 도움을 줄 수 없는데다 사실상 ‘길을 빌려준다’라는 말은 조선을 정복하겠다는 의미와 다름 없었으므로 조선은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였다.[8]

조선통신사

도요토미는 재차 대마도주를 통하여 교섭을 청하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침략할 뜻을 나타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에 보빙(報聘)을 겸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보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조신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동인인 허성마저 황윤길의 입장을 옹호하였지만,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이 주축인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게 되었다.[9]

그러는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築城術)·해운술(海運術)을 정비하고 특히 유럽에서 전래된 보고와 빈번한 일본 사신의 왕래로 사태를 짐작하고 대책을 강구, 김수(金睟)·이광(李光)·윤선각(尹先覺) 등으로 무기를 정비,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하고 신립(申砬)·이일(李鎰)로 하여금 변비(邊備)를 순시케 하여 요충지(要衝地)인 영남지방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다만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각 국의 정치 상황 및 군사력

조선의 정세

조선의 정치 상황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그 부패가 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파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큰 타격을 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으며 사림 역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 후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에서 제외되고 명종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신진 사림 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은 선조 연간에 이르러 다시 동인,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적 운용에 장애를 끼쳤다.

조선의 대외관계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이 왜구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때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1419년(세종 1년), 조선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도 했다.(대마도 정벌)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를 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명과의 관계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한 사대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에 의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나라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 등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 등으로 양국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와 정도전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나라와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주체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16세기에는 사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당연시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국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나라와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나라와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를 통해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적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체제 아래 규정된 당초의 조공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여 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그리 원활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조선 내부의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나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가속화했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조선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지만, 그 이전에는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자주성이 침해되거나 국익이 심하게 손상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엔 명나라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는 명나라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조선에 비해 매우 강대한 국력을 가진 명나라에 대하여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부터 세조 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채택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 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지휘를 받아야 하는 시간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최전방에 대한 과도한 병력 집중으로 말미암아 후방 지역이 공백화 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위 체제는 일본여진족 등 야만족들이 소규모의 노략질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국방력의 와해

조선왕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아 문치(文治)를 국가 정책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국방에 대해 소홀히 여김과 동시에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국방체제는 점차 이완되기에 이르렀다. 국방의식이 희박해지고 군정이 이완되어 감에 따라 각종 국방 제도도 형식화되어 남해안이나 북방 일부 지역에서 근근이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전국 각지에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따라서 이미 병력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군은 실제로 무력한 대역인으로만 편성되어 국방력 부재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결국 선조 때에 와서는 경군(중앙군)과 향군(지방군) 모두 병부에 편제 상의 정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실병력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가 되었다.

일본의 정세

센고쿠 시대 통일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영주세력에 대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고다이묘들이 사분오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7년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년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센고쿠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지방의 신흥무사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센고쿠다이묘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하여 다수의 경쟁 세력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1582년 오다가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피살당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 가문을 장악하여 일본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쓰이에(柴田勝家)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음력 3월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이시야마 혼간지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도 노부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전쟁에 들어갔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경하여 화의가 성립되었고, 이로써 후방을 안정시킨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히데요시는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했다. 간파쿠가 된 히데요시는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다고 칭하며, ‘소부지(墜無事, 전국의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바탕으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도록 강요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따르지 않던 규슈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1590년에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으며 도호쿠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국 통일을 완성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곧 강력한 정치,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검지(檢地)라는 토지 제도 개혁과 가타나가리(刀狩)라는 무기 몰수 정책이었다.

1591년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국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였다.

가타나가리는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의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분리를 완성시켰다.

일본의 군사력

15세기 중엽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 전투의 양상이 대규모의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됨에 따라 전투의 주체도 소수의 특정한 영웅이 아닌 보병의 밀집 부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아시가루(足經)라는 경장비보병이 출현하여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철포(조총)(텟포)와 화약이 전래되면서부터 철포 부대인 철포조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의 주역을 맡았다.

당시의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군과의 전투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의 변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의 두 가지로 대별하고, 시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의 지휘관으로 기사, 보사 등을 두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 또는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공격을 수행하는 것을 기본적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즉, 제1진의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의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쏘면서 돌격을 감행하고 이어서 제3진의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의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비(非)전투 요원으로서는 소인(전령 업무), 하부(수송 업무), 선두 및 수주(순박운앙 업무), 대목부(감찰 업무), 의사, 승려(부대특성에 따라 서양에서 파견된 신부가 이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지휘관 다이묘가 그리스도교 신도일 경우에 해당되었다. 일례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서 성직자로서의 업무를 담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였다.) 등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도요토미는 이와 같이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부터 대규모의 건조 계획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미 천여 척의 전함을 확호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 이르러서는 3천여 척이라는 대규모의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西海道), 난카이도(南海道), 산요도(山陽道), 산인도(山陰道), 기나이 및 그 동쪽의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3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철포, 창, 궁시, 왜도 등 4가지의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주종 간의 단결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에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명의 정세

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1368년 개국된 명나라는 15세기 초인 영락제 때에 이르러 그 국력이 막강해졌으나 영락제가 죽은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49년정통제몽골의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내부의 기강도 해이해져 갔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만큼 크게 동요하였고,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 집단은 명나라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었다.

이에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양쪽에서 싸워야만 했으며,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자연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만력제가 등극하면서 10년간은 장거정 등의 대정치가의 등장으로 다시 중흥의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정사를 환관에게 일임해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명나라는 또한 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降將) 보바이(知拜)의 반란과 귀주(貴州)지방의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평정해야 했으며, 후에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명의 대외 관계

조선과의 관계

명나라는 1368년 건국 후 대내적으로는 전제왕정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을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책봉체제로 편입시켰다. 조선은 왕권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등 이웃 나라들과 함께 명나라의 조공·책봉체제를 받아들였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매년 서너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해금정책을 취한 명나라와의 무역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공 무역은 명나라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책봉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황제에게 헌상물을 바치는 형식이었는데, 조선으로부터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받으면 명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고급 견직물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주었다. 조공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명나라에게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조공무역은 제후국에서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을 가져와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대해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하사품이 조공품보다 더 귀하고 많아야 한 것 또한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운반비를 명나라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결국 조공 무역은 제국보다는 제후국에게 더 이로운 제도라 할 수 있다.

일본과의 관계

평소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특별히 필요한 물산들도 아닌 데다 천황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차 조공 인원을 300명으로 늘려 그런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래서 1547년 이후부터는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의 해적활동이 더 극심해졌다. 왜구는 주로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횡행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번거로워 공식 무역로를 트려고 노력하며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명의 군사력

명나라는 개국 초부터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을 절충한 위소제도라는 군제를 채용했다. 위소의 최소 단위는 백호소로 정원은 병사 백명과 지휘관인 총기 2명, 소기 10명 등 총 112명이었다.

총기는 각각 소기 5명을 지휘하고, 소기는 각각 병사 10명을 지휘했다. 10개의 백호소로서 1개의 천호소를 구성하고, 5개의 천호소로서 1위를 구성한다. 유사시에는 위의 지휘관으로 참장, 유격장, 파총 등을 임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총병관이 이를 총괄 지휘하였으며, 1위의 병력규모는 5,600명이었다.

수 개의 위가 모여서 도지휘사사라는 군단을 형성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지휘사이다. 여러 도지휘사사는 중앙의 오군도독부에 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위소의 병사들은 평시에는 둔전 및 군사 훈련에 종사하면서 전시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전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총병관의 지휘하에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군단인 도지휘사사는 각 성 혹은 전략상 중요 지역에 소재하고 있었으므로 명대에는 13성의 도지휘사와 요동, 만전, 대령 등의 도지휘사사를 비롯하여 관할구역이 광대한 지역에는 행도지휘사사를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전반기까지 명나라는 전국에 16개 도지휘사사, 5개 행도지휘사사, 2개 유수사를 두고 여기에 소속된 493개의 위, 2,593개의 소가 있었으며, 도사에게 직속된 315개의 수어천호소가 있어 그 병력은 총 329만여 명에 달했다. 이 밖에도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궁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금의, 금오, 우림 등의 25위가 있어 그 병력 수가 15만여 명에 달했다.

명나라 군제의 근간인 위소제도의 경제적 기반은 군둔(軍屯)이었으며, 그에 대한 초기의 세금 부과는 매우 경미하엿으므로 위소제도의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 연간부터 군둔 관리 체제의 정비와 함께 둔전병의 부담이 가중되어 군둔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후 1449년의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위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민병 모집을 통한 병력 보충이 이루어졌다.

이 민병은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정치의 혼란과 더불어 군의 기강이 해이해짐으로써 그 전투력이 약화되어 역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경과

제1차 침략

일방적인 패퇴

동래부순절도.

1592년 음력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섬 도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 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쓰시마 도주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교섭을 해 왔으나 조선은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음력 4월 14일 15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해 침략하게 하였다. 이 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음력 4월 24일 순변사 이일상주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10일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충주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요시타카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였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한양을 떠나고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으며, 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한 뒤, 다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음력 6월 13일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난다.

숱한 싸움을 겪었던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다. 반면 조선군은 오랜 평화기를 누린 상태에서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없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련한 대책은 하나같이 효과적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또한 병사들이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해 버리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조정의 피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 조정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향하고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게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이때는 이미 민심이 정부에서 이반되어 모병에 응하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선조가 피난 가는 길을 막고 욕하는 자까지 있었다. 왕이 한양을 나왔을 때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掌隷院)과 형조를 불질렀고, 이 때문에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10]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도성의 수비를 맡겼으나, 결국 1592년 5월 3일, 도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의 주민들은 항복하여 해당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투의 기본 방식이었는데, 조선의 경우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반면, 각지에서 백성들이 일어났으므로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선군의 반격

이순신의 학익진에 대해 묘사한 수조병풍도.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왕세자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한편으로 공명첩으로써 식량을 바치는 자와 의병을 모집하기도 했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 보급로,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려 놓았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1592년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 등지에서 싸우는 족족 쳐부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략 행위에 대한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일본군을 축출하고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昌寧) 등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 끝에 전사했으며, 김천일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고 강화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함경도를 수복하는 북관대첩을 그린 창의토왜도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鏡城)·길주(吉州) 등을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休靜)은 격문(檄文)을 팔도의 승려에게 발하여 그의 제자 유정(惟政)의 내원을 얻어 1700명의 승병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공을 세워 도총섭(都摠攝)에 임명되었으며, 그 제자 처영(處英)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명군의 개입

한편, 의주로 몸을 피신한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에 요양부총병(療養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5천의 병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沈惟敬)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 송응창(宋應昌) 등이 이끄는 4만여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여 일시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배수진을 치고 있던 곳으로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이를 무찔렀다. 이는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의 하나이다.

강화 회담

명나라는 다시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으며, 일본군도 각지의 의병의 봉기와 명군의 진주, 보급 곤란, 악역(惡疫)의 유행으로 전의를 잃고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西生浦)에서 웅천(雄川 :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니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과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한 휴전 협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2차 침략

정유재란의 전개

울산성 전투도.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의 참패를 겪고 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화의에 결사 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 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가 왜성을 쌓고 은둔하다시피 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화의 교섭을 하려 하였다. 일본은 명나라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한반도의 남부 4도를 내줄 것, 감합 무역을 부활할 것,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을 명나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다만 협상 과정에서 조선의 두 왕자는 일본 측에서 돌려주었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활동이 여의치 못하였다. 조선군도 전비를 갖추었으며, 명나라의 원군도 즉시 출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 지방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을 집중 공략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물리쳤고 일본 육군은 전라도 각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를 베어 일본에 보냈고(→귀무덤),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서양 등지에서 온 노예상에게 팔아넘겼다.

일본군의 퇴각

노량해전의 경과도.

한편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은 직산 소사평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면서 북상을 저지하였고, 잠시 파직되었던 이순신이 돌아와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전세는 다시 기울게 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농성전에 돌입했다.

1597년 12월 말부터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11][12][13] 일본군은 극심한 군량 부족 상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중로군·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뒷받쳐 주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에 대해서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다. 그러나 왜교성 전투,[14] 제2차 울산성 전투,[15][16]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17][18][19][20] [21]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 철수에는 성공함으로써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조선에 끼친 영향

조선은 문란하였던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직접 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야(田野)의 황폐는 전국에 미쳤다. 또한 납속책을 시행하여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으로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졌다. 그리고 국민의 생활은 처참하여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고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몽학의 난이 가장 큰 것이었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했던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의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는 원래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 국민들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일으켜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의 개선과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 중 명군이 관우(關羽) 숭배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 끼친 영향

일본은 도요토미가 국민생활을 피폐하게 하였으므로 일본 국내에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조선의 선진 문물을 약탈해 감으로서 문화가 발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것이 도자기 기술로, 일본군은 조선의 도공(도자기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도자기 제작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또 조선에서 다수의 백성을 포로로 하여 경작 노동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였으며, 활자(活字)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하였고, 《퇴계집》 등의 사적을 가져가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명나라에 끼친 영향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소모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팽창시키는 기회를 주어서 청나라와 명나라 교체의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사용된 무기

조선

화차

일본

일본에서 생산된 조총

양국 전함 비교

조선

서울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

판옥선 위에 판자를 덮어 방어체계를 갖춘것 외에는 판옥선과 동일하다. 한때 위인전기 등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하였지만, 철갑선이었다는 기록은 없고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철갑선이 아니였다는 기록도 없다는 의견도 있슴.) 거북선은 배의 층수가 분명치 않은데, 현재 2층설, 2층 반(半)설, 3층설이 있다. 적에게 정신적인 위협을 주는 효과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운용되었다.

조선의 주력 전함으로, 함선 위에 판자로 만든 집(누각)이 있다고 하여 판옥선이라 불렸다.

정찰과 연락용도로 사용한던 함선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각 수군 항구에서는 판옥선과 협선을 1:1비율로 보유하는 것이 규정사항이였다. 다른 함선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일본

주요 인물

전쟁에 참전하였거나 외교 등을 통해 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목록이다.(일부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 있을 수 있음)

칼표가 붙은 인물은 전쟁 중 사망한 인물.

조선 (한국)

일본

명 (중국)

같이 보기

주석

  1. Turnbull, Stephen. 2002, pp. 140.
  2. Turnbull, Stephen. 2002, pp. 217.
  3. Turnbull, Stephen. 2002, pp. 221.
  4. Turnbull, Stephen. 2002, pp.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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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임진왜란 연구의 현황과 과제 64쪽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 2005년
  7. 글로벌세계대백과》, 〈임진왜란〉, 임진왜란〔槪說〕.
  8. 조선왕조실록
  9.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조선왕조실록. 2009년 2월 14일에 확인함. 
  10. 그러나 일본군 선발대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까지 궁궐이 제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며칠 뒤 후발대가 도착했을 때 불타 없어졌다는 일본 측의 기록으로 볼 때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11.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0日(丙申) 3번째기사 접반사 윤형, 충청 절도사 이시언이 적과의 전투상황을 보고하다
  12.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2번째기사 이시언•성윤문이 적과의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13.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3번째기사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14.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6번째기사 우의정 이덕형이 중국군의 패전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15.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2日(甲寅) 3번째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이 경주로 퇴진하려 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16.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7번째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의 패전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17.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8日(庚申) 7번째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
  18.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6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중국 군사의 퇴각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19.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6日(戊辰) 3번째기사 동 제독이 전투에 관한 게첩을 올리다
  20.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7日(己巳) 1번째기사 감찰 어사 진효의 왜군과의 전투에 관한 제본
  21.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7번째기사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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