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사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46번째 줄: 46번째 줄:




== 민무늬토기 시대 ==
=== 민무늬토기 시대 ===
{{본문|민무늬토기 시대}}
{{본문|민무늬토기 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또는 아연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와 공열토기가 주로 쓰였다.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또는 아연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와 공열토기가 주로 쓰였다.

2009년 10월 24일 (토) 05:57 판

한국의 선사 시대는 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난 시대로 문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를 말한다. 한반도의 선사 시대는 유럽이나 지중해 지역과는 달리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정리했던 《세 시대 체계》로 구분하기 어렵우며, 고고학적,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연구에 의존한다. 일반적인 일반적인 역사 및 고고학의 시대 구분에 의하면 석기시대에 해당되며, 석기 시대는 발굴되는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시 구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로 나누어진다. 그 영역은 한반도를 위주로 하지만, 그 기원 및 전파와 관련이 있는 러시아, 만주, 랴오닝, 중국 동부의 문화도 함께 연구된다.

지질학적 선사시대

한국의 신석기 시대 돌도끼

지질학적 선사시대는 한반도 과거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바위는 선캄브리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연천의 지질시스템이 이에 해당하며, 서울 주위에서 북동쪽 방면으로 연천군으로 확장된다. 그리하여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눠지며, 각섬석 - 석영 - 장석 편암과 대리석, 석회-규산염, 규암, 흑연 편암, 운모 - 석영 - 장석 편암, 운모 편암, 규암, 안구 편마암, 석류석 함석류석 화강암으로 구성된다. 한반도는 중생대에 활동적인 지질학적 선사시대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산맥이 형성되었어, 신생대에 가서 점차 안정적으로 되었다. 중생대에 형성된 주요한 곳으로 경상도를 포함하며, 흑운모 화강암, 혈암, 사암, 역암질 안산암, 현무암, 유문암, 그리고 오늘날의 경상도 지방 아래에 덮여 있는 응회암으로 구성되었다.

한반도 인류의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이 시기의 기원에 대한 것은 원시 인류가 한반도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이며, 기원전 5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빠른 출현이 구석기 태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에는 회의적이다.[1] 구석기는 도기의 생산이 시작되는 기원전 8000년경에 끝난다. 방사성탄소측정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고대인의 출현은 기원전 4만년 경에서 3만년 경으로 지시한다.[2] 고대인이 기원전 50만년 경까지 확장된다면, 호모 에렉투스가 한반도에 존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충청남도 공주 근처의 석장리 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태동기의 특징을 가진 유물이 가장 낮은 층에서 발굴되었다. 양면을 뗀 석기와 떼는 도구도 발견되었다. 후기의 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로 생각되는 손도끼와 클리버도 발굴되었다.

구석기 중기에는 고대인들이 동굴에서 거주를 했으며, 제천군 점말 동굴과 청주 두루봉 동굴 등이 그 유적이다. 이 두 동굴 유적에서 코뿔소의 화석 유물과 동굴 곰, 갈색 곰, 하이에나와 여러 종류위 사슴들, 멸종된 종 등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점말 동굴에서 사냥에 사용했던 도구로 보이는 석기는 고대인의 뼈로 만들 것이며, 동물뼈 골각기와 함께 사냥을 하거나 음식을 준비했던 도구로 보인다. 영양보충을 위한 밤껍질도 발굴되었다.

충청남도 공주 근처의 석장리 유적과 다른 강안의 유적에서 구석기 전통을 가진 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가는 규암 바위, 예를 들면 규암, 반암, 흑요석, 규질암, 규장석이 구석기 전기의 아슐리안, 르발루안의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뗀석기들은 모양이 단순하고, 석영이나 화강암(페그마타이트)에서 뗀 것들이다. 석장리의 중기층에서는투척용 볼라와 투척용 돌이 발굴되었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다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눠진다. 이 중 현생인류가 남긴 유적은 주로 구석기 후기 이후의 유적에서 나타난다.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屈浦里), 평양직할시 상원군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全谷里), 충청남도 공주시 석장리(石壯里), 충청북도 청원군 만수리[3]를 손꼽을 수 있다. 이들 유적지의 발생 연대는 오늘날 고고학계에서 약 50여만 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또는 강가에 집을 지어 작은 군집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짐승의 사냥과 과일이나 열매 등의 식물 채집에 의존한 것으로 여겨지며, 집단 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세계의 다른 지역의 모든 석기시대의 사람들처럼 보다 효율적인 사냥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

중석기 시대

중석기 시대는 1만여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가 따뜻해져서,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구석기시대의 주요 사냥 대상물인 맘모스, 쌍코뿔이, 물소 등의 큰 짐승이 사라지고 작은 짐승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짐승을 잡기 위한 무기인 활, 화살촉 등이 등장했다.

중석기 시대의 유적지

빗살무늬토기 시대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약 1만(중석기를 포함할 경우) ~ 8000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은 간석기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토기이다. 이들은 주로 물가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을 했고,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초기 농경 단계로 들어간 곳도 있다. 또 돌쾡이와 돌보습으로 밭을 갈고,돌낫으로 곡물이나 이삭을 따 갈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를 내어 먹었다.


민무늬토기 시대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또는 아연을 조금씩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무문토기와 공열토기가 주로 쓰였다. 신석기시대처럼 돌쾡이를 사용하여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반달 돌칼로 추수하였다.

주석

  1. Yi Seon-bok and G A Clark. 1983 Observations on the Lower and Middle Paleolithic of Northeast Asia. Current Anthropology 24(2): 181–202.
  2. Bae, Kidong. 2002 Radiocarbon Dates from Palaeolithic Sites in Korea. Radiocarbon 44(2): 473–476.
  3. 「청원 만수리 구석기유적 베이징 原人과 동시대 것」, 동아닷컴, 2007.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