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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11일 (일) 03:58 판

틀:인물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초상화
대한민국제5·6·7·8·9대 대통령
임기 1963년~1979년 10월 26일
전임: 윤보선(제4대)
후임: 최규하(제10대)

신상정보
출생일 1917년 11월 14일(1917-11-14)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군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1979-10-26)(61세)
사망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당 민주공화당
배우자 김호남, 육영수
자녀 박재옥, 박근혜, 박서영, 박지만
종교 개신교
박정희
별명 호 중수(中樹)
출생지 일제강점기 한국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525번지
사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
복무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0년-1963년
근무 육군
최종계급 대한민국 육군 예비역대장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1] ~ 1979년 10월 26일, 경상북도 선산군 출생)는 만주국, 남조선로동당의 군인이자 대한민국군인·교육인·정치가이다. (號)는 중수(中樹),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창씨개명다카키 마사오이다.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5.16 군사정변을 주도하였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과 의장, 남조선로동당 군사총책 그리고 1963년 ~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만주국 장교 경력 등으로 인한 정체성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 1989년, 한 수사관이 육영수 여사의 암살범은 문세광이 아니라는 양심 선언을 했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한 결과 육영수 여사의 목숨을 앗아간 총알이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2]

대통령이 되기 전의 생애

유년시절과 가정 배경 (1917 ~ 1926)

박정희는 1917년 음력 9월 30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1978년~현재: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의 금오산 자락에서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경명왕의 왕자였던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言成)의 후손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효력부위(效力副尉)와 사과를 지낸 아버지 고령 박씨 박성빈(朴成彬, 당시 46세)과 어머니 수원백씨 백남의(白南義, 당시 45세)의 5남 2녀 중 다섯째 아들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위로는 박동희(22세), 박무희(19세), 박귀희(15세), 박상희(11세), 박한생(7세), 박재희(5세)가 있었고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두 형 박동희와 박무희는 결혼하여 자녀가 있었고, 은씨 집안으로 시집간 큰누이 귀희는 임신중이었다. 아버지 박성빈은 영락한 양반 계급으로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1892년, 동학의 접주로 활동하였고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하자 연좌되어 이후에는 외가의 선산인 상모동의 약 1600평짜리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여 상모동으로 이사를 하였다.[3]

박정희는 어머니 백남의가 원치 않는 자식이었다[출처 필요]. 박귀희에 의하면 당시 두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가 있었다. 45세에 임신한 데다 딸과 며느리가 임신 중이었고 집안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백남의는 박정희를 낙태하기 위하여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 도 하고, 장작 더미위에서 곤두박질 쳐보기,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기,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넘어져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 등 온갖 민간요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4]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고 한다.[4] 그의 어머니는 맏딸 박귀희에게 임신사실을 비밀리에 말하였고 귀희는 어머니의 낙태를 돕기도 하였다.[4]

박정희는 결국 태어났으나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버지와 형들이 기골이 장대한 데 비해, 박정희는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는 가끔 큰 누나의 젖을 먹기도 했다.[5] 그러나 노산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그는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죽을 먹고 자랐으며, 맏누이 귀희의 젖을 먹기도 했다 한다. 또한 변비로 고생하기도 했다고 한다.[4] 영아기에 박정희는 집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밑에 놓은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흙을 짓이겨서 갓난 아들에게 발라주었고,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4] 이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도 한다.[4] 유년기에 박정희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6] 훗날 입학하는 구미보통학교의 입학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입되어 있으며[6] 학교에 다니면서도 박정희는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6]

소년 시절 (1926~1934)

조갑제가 말하길 8세가 된 박정희는 1926년 4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7]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5] 한편 그의 담임 선생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7] 학급중 연소하였으나 급장으 로서 통솔력이 탁월하여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갖추어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7]

수업시간에 박정희는 남보다 먼저 손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7]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겨했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 중 나폴레옹이순신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하며[8]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8]

소년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9] 그의 동창인 한성도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10]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올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올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10]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박정희는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뒤 생가로 이동했다.이 사건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자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10] 한다. 1972년 이준상은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 다시 다쳐서 입원했을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으나[10] 그는 53세에 사망했다.

1932년 3월 1일 구미공립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7] 박정희는 1932년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11]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선생님들과 교장선생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님를 설득하여 대구사범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이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도록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 못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합격하였고, 입학성적은 51등이었다.[11]

교육 활동 (1932 ~ 1940)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 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한국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11] 대구사범고등학교 진학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는 성적 하위권이었다.[12] 품행평가도 '양'이 네번, '가'가 한 번이었으며, 군사 및 체육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기간에는 공개금지가 되기도 하였다.[12]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는 간청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였고 1937년 4월 1일 만 20세의 나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13] 박정희는 여기서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는데[14] 박정희가 교사로 근무중인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박정희는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교육청에 대기발령 받았다가 4월 문경공립보통소학교 담임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1940년까지 문경소학교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중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고 주장하였다.[15][16] 박정희의 셋째딸 박근령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15][16][17]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한다고 판결을 내린 동시에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며 무죄를 판결했다.[15][16]

그러나 박정희는 1944년 7월 "만주군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열하성(熱河省) 주둔 보병 제8사단으로 배속되었다. 보병 8사단의 주 토벌 부대가 중국의 팔로군으러 당연히 팔로군 토벌 작전을 벌이는데 박정희는 제8단 단장의 부관으로 전투병력을 지휘하는 직책이 아니므로[18] 여기에 해당되지는 않는다."라고 데일리안이 주장하였으나 당시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장교로 임관된 곧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된 곳은 이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19]

청년기

만주군 장교 활동 (1940 ~ 1945)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20]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다. 그리고 견습사관 과정을 거쳐 7월에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다.[21]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집안을 따라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22],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토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21]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일본어: 岡本實)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자신이 발간한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며 주장하였다.[23]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23] 조희연 또한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24]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키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혔다.[22][25]

박정희는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고,[26]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북경으로 건너가 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1945년 8월 해방 직전에 만주 싱릉에서 중국 국민당의 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견해도 있다.[27] 이후 해방조선으로 질서정연한 귀국을 하기 위해 장교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한국 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귀국하였다.[28]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부산항에 도착하였다.[27] 한편 1946년 6월 이후부터 9월까지 3개월간의 공백기간이 있다.

광복 직후(1946 ~ 1950)

1946년 한국 광복군으로 귀국한 그는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출처 필요]

소위로 임관한 박정희는 본부가 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출처 필요] 당시 경비중대장은 경비사관학교 1기인 김점곤 중위가 중대장으로 있었다. 원용덕 연대장이 장교들을 소집하고 경비초소(CP)의 위치와 소대장의 배치장소를 의논하였는데 미군 고문관 브라운이 소대장의 서열에 따라 배치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면전에서 미국놈이 왜 간섭을 하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미국놈'이란 욕을 알아들은 브라운은 고소하였고 원용덕 연대장이 미국놈은 애칭이며 욕이 아니라고 변명해도 통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타이피스트한테 들어서 안다며 미국놈은 욕이라 하며 박정희의 징계를 요구하였으나 원만한 원용덕이 적당히 달랬다.[출처 필요]

그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는다. 한국군 내의 남로당 프락치의 상부 군사총책였던 그는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프락치 활동의 핵심 역할을 했던 박정희는 그해 11월 11일 체포 되었다. 그후 그는 군사재판에 회부 되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있는 군부내 남로당원의 이름을 군 특무대에 실토하면서[29] 실형은 면하고 다음해 1월 강제 예편되었다[30]. 이때 군부내 김창룡 등 숙군사업을 지휘한 사람들이나 백선엽, 원용덕 등 만주군 선배들은 박정희가 좌익 명단을 죄다 불었고, 박정희를 데리고 다니며 각 부대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했기 때문에 좌익들이 박정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주기로 마음먹는다. 박정희의 육사 동기로 숙군에 직접 참여해 박정희를 수사한 김안일은 '자기 조직을 털어놓은 공산주의자란 거세된 환관과 같아 풀어줘도 안심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31] 그 이후, 그는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6.25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32]

6.25 이후(1950 ~ 1959)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은 박정희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광역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하였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예비장인 대신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 김영기가 임석하였다.[32]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33] 그는 이후 이용문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쿠데타를 계획하였다.[33][34]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35] 이용문과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35], 이용문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35] 박정희는 이때 주동적 역할은 아니었지만 이용문을 보좌하는 위치에 있었다.[33] 쿠데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33]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36]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36]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있은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조치로 대기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37]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박정희의 육군 소장 진급심사위원회가 열려 22명의 심사위원이 참가하여 찬성 18표, 기권 2표, 반대 2표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되는 듯하였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서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37]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36]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36]

이승만 정권 말기에도 박정희는 쿠데타계획을 세웠으나 1960년 5월 이승만이 자진 하야함으로서 실패하였다. 그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내각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37]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37]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37]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36]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37]

5·16 군사정변

5·16 군사정변1961년 5월 16일, 당시 군수사령부 사령관 소장이었던 박정희 주도 하에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해병대, 6군단 포병대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이다.

5·16 군사정변의 주도 세력은 5월 18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초대 위원장에 장도영, 부위원장에 박정희가 취임하였으며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면서 의장에 장도영, 부의장에 박정희가 취임,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첫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5.16 직후 김구 암살범 안두희와 관련혐의로 징역 15년형을 받고 수감중이던 김학규를 사면, 복권시켰다.[38] 김학규가 중풍으로 쓰러져 운신을 못 할 때, 박정희는 한학자인 최서면(崔書勉)을 시켜 김학규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부탁하여 국군 병원에 입원시켰다.[38] 그는 병석에서 입버릇처럼 항상 박정희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하였다.[38] 5월 23일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39] 6월 3일 오후 4시 대구매일신문 기자와 단독 회견을 가졌다.[39]

박정희는 이 무렵 자신의 최측근으로서 자신의 죽음과 연관성을 갖게 된 차지철과 처음 조우하게 된다.

제3공화국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1962 ~ 1963)

1962년 3월국가재건최고회의가 구정치인을 정죄하는 구정치인 정화법이 발표되자 이것에 반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정희는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물려받았다. 같은해 7월부터 8월 김현철을 후임으로 임명하기 전까지는 공석인 국무총리급의 지위인 내각수반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62년 7월 14일, 사재를 기부하여 장학재단인 5·16 장학회를 설립[9]하였다고 ‘박정희 기념사업회’는 밝히고 있으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에 지시하여 '부정축재처리요강'에 의해 이병철 등 기업인 15명과 함께 구속되어 있던 부산 지역의 재력가 김지태(金智泰)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주식과 부일장학회 기본재산 명목의 토지 100,147평을 강제적으로 헌납토록 하였고, 이 재산 중 토지는 국방부에 무상으로 양도하였으며 이후 "기부 받은 재산이 자꾸 유실된다"는 보고를 받고 법무부 장관 고원증에게 장학회의 설립을 지시하여 5.16 장학회를 설립했다. 이 사건은 당시 최고권력자였던 박정희 의장의 언론장악 의도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의 핵심인 언론 자유와 사유 재산권이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침해당한 사건으로 조사되었다.[40] [41]

제3공화국 초기(1963 ~ 1964)

1966년의 세계 정상들과 만난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3번째)

1963년 중반 군에 복귀한다는 이른바 혁명 공약과는 달리 강원도 철원 비행장에서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1963년 10월 15일 5대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민주당의 윤보선으로부터 좌익 활동한 과거전력에 대한 사상검증을 받았고 6대 대선에서도 민주당으로부터 사상검증을 받았다..

박정희는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대통령 취임 직후 여운홍을 면담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맏형 여운형의 묘소 주변 토지가 채윤혁에게 매각되자 여운홍은 변호사를 찾아 구제의 길을 찾았으나 법적으로 구제의 길이 없자 박정희를 찾아와 호소하였다. 여운홍의 직소를 들은 박정희는 여운형 묘소주변 토지의 불하를 차단해주었다.[42]

3선 개헌과 유신전야 (1967 ~ 1971)

1967년,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00여만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제6대 대통령이 된다. 1969년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을 이기고 3선에 성공한다.

제4공화국

긴급조치 시대와 집권 말기 (1975 ~ 1978)

만년의 박정희는 탈모현상으로 아침 샤워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졌고, 좌골신경통을 앓고 있어 통증이 심할 때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서류결재하였다. 또한 9대 대통령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임기 1년 전에 사퇴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계자로서는 김종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43]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국립극장에서 진행중인 제29회 광복절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경축사를 낭독중인 박 대통령을 저격, 옆자리의 육영수 여사의 두부에 총상을 입혀 살해했다. 그러나 1989년, 한 수사관이 육영수 여사의 암살범은 문세광이 아니라는 양심 선언을 했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한 결과 육영수 여사의 목숨을 앗아간 총알이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44] 1년 뒤인 1975년 8월 6일에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위치한 청해대에서 ‘일수’(一首)라는 (詩)를 썼는데 아내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거닐던 곳에 혼자 와 보니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쓴 이 시는 2004년, 가수 남상규가‘임과 함께 놀던 곳에’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45]

아래는 박정희가 쓴 시인 일수(一首)의 전문이다.

님과함께 놀던 곳에 나 홀로 찾아오니 / 우거진 숲속에서 매미만이 반겨하네
앉은자리 밟던자국 모래마다 밟던자국 / 저도섬 백사장에 체온마저 따스해라
파도소리 예와같네 짝을 잃은 저기러기 / 나와함께 놀다가렴

박정희는 이외에도 ‘한 송이 흰 목련이 바람에 지듯이’와 ‘추억의 흰 목련’, ‘제야(除夜)’등 많은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육영수 여사에 대한 그리움과 인생의 회한을 나타낸 시들이며 이외에도 많은 그림들과 휘호를 남겼다.

말년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한편 말년까지도 미국의 의구심은 여전했던 듯하다. 남로당 출신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국민에게는 독재자 소리를 듣고, 미국한테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북조선에게는 친일파로 매도되어 완전히 사면초가에 몰렸다고 한다.[46]

한편 박정희는 김영삼을 위선자로 보고 경멸하였고 독재정권을 혼내주고 대한민국의 인권싡장을 바랐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들고 나온 미국의 대통령 제임스 얼 카터도 경멸하였다.[47] 그는 또 이 카터와 미국의 힘을 믿고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본 김영삼을 더 경멸했다.[47] 또한 핵개발 등의 문제와 인권 문제 등으로 미국과 마찰을 빚었으며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 카터 행정부와의 갈등 등으로 정권의 기반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박정희는 1979년에 들어와서는 카터와 김영삼에 대한 이런 경멸감을 정책으로 표현하면서 갈등은 심화되었고, 카터의 방한을 앞두고는 통역을 담당할 의전수석 최광수에게 인권 좋아하시네를 영어로 어떻게 통역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을 해두라는 지시를 사전에 내리기도 했다.[47]

사망

10·26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재규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암살하여 성공한 사건이다.

박정희는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 후 귀경하여,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도우미로 불러 연회를 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 만 61세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박정희를 저격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박동선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점 때문에 미국정부가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한반도라는 소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약력

사상

박정희는 소학교 당시 기독교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동급생이었던 한성도에 따르면 "박정희와 저는 처음에 유년 주일학교에 나왔다. 구미 보통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일요일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하는 주일학교에 열심이었다. 소년들이 막 코흘리 개의 때를 벗을 무렵 성경책과 찬송가를 들고 한복차림으로 교회에 모여들던 시절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이 기도하는 법이었지요" 라고 하였다. 박정희는 사회주의 활동도 하였다. 1962년 6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최고위원들과 함께 김포로 가서 모심기를 할때, 논두렁에 앉아 쉬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한 기자가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48] 나는 원래가 유신론자입니다.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를 안주시는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한 일도 있었다.[48]

1972년 지폐 도안을 놓고 기독교 등 종교계와 갈등하기도 했다. 만원권 지폐가 처음 도안됐는데 한국은행에서는 만원의 주인공으로 석굴암의 불상(앞면), 뒷면이 불국사로 정하였고, 박정희의 친필 서명까지 하였다. 새로 발행된 만원은 그의 재가를 얻어 발행공고까지 냈다. 그러나 기독교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여론에서도 특정 종교를 두둔할 수 없다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자 만원권의 주인공은 세종대왕으로 교체되었다.[52][53][54]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 그리고 역시 박정희의 지지 정당인 공화당은 공산주의로 얼룩졌다.

공산주의 활동

강원룡의 증언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박정희의 군사 혁명을 이데올로기로서 좌익이라고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군인들이 일으킨 혁명인 데다, 6개 혁명공약의 제1항에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이라고 못박았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차츰 그의 과거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언론에 보도됐고 윤보선이 선거에서 이 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한다.[55] 당시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 북한은 군사·경제적으로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중공과 군사동맹도 맺고 있었고, 4·19 혁명 이후 북한에서는 ‘남조선 인민들이 봉기했으니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기에 공산주의라고 하면 다들 무척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들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보았다.[56]

당시 한국에는 지주제도가 확산되었고 지주제도는 통상 총독부와 관련이 깊었다. 대도시, 특히 대구와 서울에서는 교사 등의 지식인들이 정부를 비난하거나 내심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교수들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은 컸다. 박정희와 그의 형제들은 대구 근방의 기차 정거장인 구미 근처에 사는 소작농의 아들이었다. 김종필과 여섯형제는 대전 인근의 부여 근처에 사는 중간 규모 지주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김종필의 부모는 김종필이 어릴 때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두 사람은 총명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상황이나 국가적인 상황을 절망적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개인과 국가의 진로를 폭력적인 견지에서 보았을 것이다. [57]

박정희는 일찌기 대구에 있는 사범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박정희를 가르쳤던 교사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전 북한 외교 통상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에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일본과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학생들의 분위기는 적대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절친한 교우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왕학수와 황용주 같은 박정희의 급우나 김종필의 친구들이 지금 박-김 정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57]

박정희는 1937년에 대구 보통 학교를 졸업했지만, 만주 군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그가 3년 동안의 공백기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좌익 책자를 읽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의 동기 세 명이 나중에 쿠데타에 동참했다. 박정희는 5백명의 동기 가운데 성적 최상위자로 선발되어 자마에 있는 일본 사관학교 제57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박정희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좌익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9명은 박정희의 후배로, 동양적인 제도에서는 특히 그의 영향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이들 후배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훗날 박정희가 지휘한 공산주의 음모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국 사관학교 교관들로 그와 공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7명은 그 결과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와 그의 동기생들 사이에 좌익 영향의 징후는 생도 시절에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도쿄에서 2년제, 혹은 4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엘리트가 박정희와 더불어 좌익으로 돌아섰다. [57]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형 박상희의 죽음이라는 견해와 박상희의 죽음 이전에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으며.[57], 광복 직후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하다 여수-순천 반란을 꾸미다가 적발되어 일시적으로 직급박탈을 당하였다가 복귀하기도 하였고 그 뒤 전향을 하였다고 하나 정부로부터 진실된 전향인지 의심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은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에 관해여 그의 사상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며 제5대,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윤보선에게 사상공세를 당하기도 했다.[55]

한국 군사 정부의 핵심 세력이 과거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였고 혹은 대규모 정부전복 기도에 참가했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박 의장 본인은 공산주의자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감행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1947~48년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의 핵심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종필은 대학 재학시절 좌익분자였으며, 그 후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옹호하고 그들과 어울려 지냈다. 박 의장과 김종필의 가족 중에는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이 있다. 중앙정보부 내의 김종필 측근들은 좌익이나 공산주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의장의 고문진과 동료들 중에도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박정희의 정당인 공화당에는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57]

박-김 정권의 운영 방식은 어느 정도 이런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 속임수, 증거 없는 기습 체포, 공갈, 정치 뇌물, 테러 전술이 자주 동원된다. 또한 의심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중앙정보부의 지배적인 권력이다. 일부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고문진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는 이 조직은 공화당, 국가재건최고회의 등 주요 기관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역이며 겉으로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면서 신원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지도부 내의 핵심 세력에 의해 빈틈없이 조직되고 통제된다.[57]

1960년 12월에 ‘16인 장교사건’에 개입되어 군복을 벗을 때까지 김종필은 상대적으로 무명의 장교로, 일부 연수 기간을 제외하고는 군 생활의 전부를 G-2에서 보냈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출세할 가망은 별로 없었다. 그러므로 전기(傳記) 기록도 드물다. 박정희가 대구 사범학교 시절을 조용히 보냈던 것에 비해, 김종필의 서울 사범대학 시절은 그렇지 않았다.[58]

1946년에 미군정은 서울대 사범 대학을 비롯해 몇 개의 대학을 통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대학, 특히 좌익 교수단과 학생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정의 명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독립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의 감시가 강화될 것을 우려했다. 사범 대학은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이 싸움에서 좌익의 입장을 견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김종필과 중앙정보부에 있는 그의 측근 김용태, Korean Republic의 발행인인 김동성, 동양 통신(Orient Press)의 김규환,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58]

여기에 개입된 사람들을 철저히 조사해 보면, 분명히 공화당 총무인 김동환을 비롯해 더 많은 사람들이 드러날 것이다. 박정희가 사관학교에서 조직을 형성했던 것과 거의 같은 때에 그의 조직과 비슷한 또 다른 조직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질 수 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김종필과 김용태는 불온한 사건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사범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대전 근처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로당으로 지역 청년들을 전향시키는 일을 했다고 한다.[58]

김용태는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장항 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김종필과 김용태는 그 지역의 좌익분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누리고 있던 이범석의 우익단체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쿠데타의 지도부들이 처음부터 이범석 장군과 그를 따르는 청년단에 강한 적개심을 보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좌익분자들에 대한 단속이 진행되자, 일부 좌익분자들은 체포되는 것이 두려워 당시 조직 확대를 위해 청년들을 필요로 하던 장교 양성소와 군방첩대(CIC)에 들어가는 길을 모색했다.[58]

김종필은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장교 후보 선발에 보다 엄격한 안보 규정을 적용하기 직전인 1948년 8월에 장교 양성소의 예비학교인 지도자 양성소에 입학했다. 그는 동기생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해 자신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곳을 졸업하였고, 곧 G-2에 들어가서 박정희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인 김용태를 G-2의 문관으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58]

박정희와 김종필, 김용태의 가족들에게 좌익과 공산주의 영향이 퍼져 있다는 사실은 조기 환경 요소의 효과를 여실히 입증해준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지만, 공산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1946년 10월 2일 시위와 그로부터 1년 뒤에 다시 대구를 휩쓴 격렬한 좌익 시위를 지도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희는 북한의 전 외교통상부 부위원장을 지낸 황태성과 절친한 관계였음이 분명하며, 황태성은 1946년의 시위 후 대구를 떠났다가 1961년 9월 1일에 간첩 임무를 띠고 박의장과 접촉하기 위해서 서울로 돌아왔다.[58]

박상희의 또 다른 동료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정책 자문으로 있는 윤장혁으로, 그는 1948년의 대전 폭동을 지도했으며, 1955년 11월 7일 북한을 위한 간첩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상희가 정확하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1946년에 시위를 주동한 죄로 미군정에 의해 사형된 것으로 보인다. 김종필의 장인이 바로 박상희이며, 김종필의 처는 아버지가 죽은 뒤 거의 박정희의 딸처럼 키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뿐만 아니라 김용태를 비롯한 남편 측근들의 지위 유지에 적극적이라고 한다.[58]

김종필의 6형제 가운데 전부는 아니나 몇 명은 1950년에 북한이 남침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것으로 보인다. 6형제 가운데 김종식은 그의 걸출한 형제 김종락이 인정하듯이 북한에 있다. 김종필의 또 한 형제는 충청남도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동네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고 현재 고향 마을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 형제는 남로당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후 김종필이 그의 체포를 막았다고 한다. 김종필 형제가 남로당에 협력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살던 동네에서는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모든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온 원인중 하나였다.[58]

김종필과 절친한 사이인 김용태의 가족도 그 지역에서는 김종필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악명이 높았다. 1945년 이후에도 좌익분자였으며 남로당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용태는 공산주의자들이 대전을 점령했을 때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3형제 역시 공산주의에 협력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소련에서 전쟁 포로 생활을 한 뒤 모스크바 대학을 다니다가, 현재는 한국에 돌아와 공산주의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1945년에서 1951년까지 좌익분자나 공산주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현재 한국 중앙정보부와 박-김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으로는 중앙정보부의 장태화, 조칠기, 반미적이고 중립적인 부산일보의 발행인인 황용주, 서울대학교 교수이자 전(前) 고문인 김성희, 재무 고문이자 운영요원인 김성곤 등이 있다.[58]


대한민국 공산화 음모

남로당 공산주의자들 중 이주하, 김삼룡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면서 동일한 서열의 최고위간부로 이중업(李重業)이 있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1933년에 공산주의 활동으로 제적되었다. 그 후 이중업은 박헌영, 이주하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활동했고 해당 기간(47년말-48년초) 동안에는 남로당의 조직부장(Chief of the Organization Departement) 직을 맡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작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한국 국방경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던 1945년에서 1948년 9월 사이 이 조직에 침투한 것이었다. [57]

이때 이중업은 박정희를 비롯해 많은 장교들과 접촉한 듯하다. 이중업이 접촉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중있고, 가장 성공적으로 접촉한 장교는 박정희였다. 이중업과 박정희의 접촉은 박정희가 중국 광복군에서 김홍일과 근무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한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 분명하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에서 1947년 2월까지 제1연대의 중대장으로서 사관생도들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모집하는 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7]

제1연대는 당시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1연대 건물에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사관학교)가 있었다. 당시 연대 장교들은 새로 생긴 장교 양성소의 교관 역을 겸했다. 당연히 이 장교 양성 과정은 생도 시절의 젊은 장교들에게 사상을 주입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기회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사관학교에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참모를 많이 포함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고, 박정희는 이런 노력에 앞장 선 듯 하다. 1947년 3월과 4월에 졸업한 제3기생들이 교육을 받은 건 박정희가 이 연대에 있을 때였다. 제3기는 주로 전직 사병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한국의 한 고위 장성은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어떤 장교가 자신의 사병들을 장교 연수 과정에 강력하게 추천했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한국군의 G-3(작전국)는 300명의 생도들 가운데 절반이 노골적인 불충분자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57]

948년 10월 19일에서 27일에 여수-순천 반란을 일으킨 건 이들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948년 4월에 제주도 제9연대에서 처음 발생한 소규모의 전복기도를 비롯해, 1948년 11월 2일에 발생한 대구 제6연대 사건, 1948년 10월 20일에 발생한 제4연대 사건, 1948년 11월에 발생한 대전 제2연대 사건에도 개입했다. 이 사건들의 결과, 많은 장교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으며, 많은 장교들이 여수 순천 반란에서 목숨을 잃고, 또 일부는 순천과 대구에서 달아나 게릴라가 되어 1949년 4월부터 한국 전쟁이 날 때까지 한국을 유린한 게릴라전을 지도했다.[57]

박정희가 이 심각한 사건들과 전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다. 그가 정체를 드러내고 1950년(1948년의 잘못인 듯) 11월에 체포된 것은 이들 사건들, 특히 여수 순천 사건 때문이었다. 박정희 혼자 사관생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하는 주역을 맡은 건지, 이정업과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이들과 접촉하는 데 적극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박정희와 이중업은 이 기간 동안 친분을 유지했다. 이들은 워싱턴 주재 현 한국 대사인 김정열 중장에게 각각 친분 사실을 증언했고, 최경록 중장(퇴역)은 이들이 이중업이 즐겨 찾던 명월관에서 몇 차례 함께 술을 마시는 걸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작성한 한국 정부 전복 도표를 본 어느 한국군 장교는 거기에 박정희의 이름이 주요 군 장교로 나타나 있더라고 회상했다. [57]

박정희와 장교 양성소와의 관계는 이렇게 짧은 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7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육군 사관학교에 있는 학생 파견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중요한 직책에서 그는 공산주의 영향을 받은 교관들로 참모진을 구성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지도자로 생도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57] 여수 순천 사건과 그 뒤를 이은 수사 결과 박정희 조직은 전모가 드러나게 된다. 박정희는 1948년 11월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1949년 2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박정희는 죄의 심각성에 근거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57]

이런 극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의 동창생들이 육군 고위직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박정희는 그 뒤 김창룡 수사대의 수사에 합류했으며,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그가 직접 폭로한 사람의 숫자와 신원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지만, 10여명이 넘을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는 그의 부하 장교들도 있었다. 자신의 체포가 바로 조직 지도자의 배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 다른 사람을 폭로했다. 당시 이런 상황을 지켜보았던 관측통은 아마도 수 백 명의 좌익분자들, 주로 군 장교들이 이 사건으로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제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57]

이중업도 여기에 포함되어 1949년 4월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중업은 그해 7월에 딸이 간수를 유혹하여 대한민국 헌병복을 입혀 북한으로 인도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 이중업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해서 한국 군내의 정부 전복 기도는 제거되었으며, 이 음모가 진행되었다면 한국 전쟁 초기의 혼란 이상의 혼란상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57]

이에 대한 보상으로 채병덕 참모총장과 정일권 부참모총장, 특히 G-2(정보국)의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구명을 탄원했고, 그 결과 박정희는 징역 10년으로 감형을 받고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는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으며, 그 후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를 G-2 분야의 문관으로 고용했다. 이런 위치에서 박정희는 1949년 봄에 졸업하는 제 8기생들 가운데 똑똑한 젊은 장교들을 G-2 분야에 추천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종필을 비롯해 젊은 시절에 좌익 성향을 지녔던 일부 장교들이 박정희의 후원으로 G-2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적어도 그곳에 근무하는 동안 분명히 박정희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김종필은 1949년 5월 이후 계속 G-2에 있었다. [57]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의 성실한 근무에 만족했고 한국 전쟁이 시작되자 즉각 그의 한국군 재입대를 추천했다.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미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에게 고문과 죽음을 안겨준 그의 성격도 드러났다. 음모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박정희 한 사람 뿐이었지만, 박정희는 그 음모를 주도한 실질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57]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37] 그러나 총리 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37]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며 항의를 했습니다.[37]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은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36]

미국의 감시도 감시였지만 당시 박정희에 대한 사상문제는 한국군 내부에서도 완전히 정리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매그루더에게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하였던 김형일은 이 일로 박정희와 등을 지게 되었는데, 김형일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하였다.[37]


박정희 정부

군사 정부가 만든 국가 구조는 박정희와 김종필, 그리고 그들의 고문들이 정보통제와 끊임없는 감시 등 사회주의적인 형태를 창출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58]

그 첫 번째로는 한국의 중앙정보부로 그것은 사실상 국가 내의 국가 역할을 한다.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고문들이 정책, 안보 체제, 대부분의 중요한 외무와 경제문제, 사법, 언론, 라디오, 심지어는 문화행사의 중요한 부분까지 통제하고 있다. 민주적인 통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소한 예산 문제에까지 결정권을 허락하지 않는 중앙정보부는 전체주의적인 통제기관 이다.[58]

국가 재건 운동은 대규모 조직으로, 겉으로는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대부분 육군 준장 출신의 부의장과 그의 참모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국가 재건 운동’은 농촌 지역의 젊은이들을 선동해서 ‘공중 도덕 회복’과 각종 주택개량 사업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조직의 매력은 한국 생활의 전통적인 봉건주의적인 형태를 반대한다는 데 있다. 이 조직은 필요할 경우에 폭력적인 정치 행위에 쉽게 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농촌 청년 조직과 유사하다.[58]

정부의 주요 정치기구인 공화당의 구성을 보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인물들은 대개 중앙정보부에서 임명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직원들로 구성된 내부 사무 조직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 조직이 구성되는 방법은 매우 의심스럽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대령 한 명과 소령 두 명이 대학 교수나 직장이 없는 무명 정치인, 혹은 지식인에게 주로 밤에 접근해, 조국의 이익을 위한 막연한 계획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협박으로 그들을 유인한다. 그 계획에 동참을 거부하는 사람은 통금 시간 후에 조사에서 풀려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통금 위반으로 체포되거나 그들이 속한 단체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58]

한국인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스파이와 앞잡이에게 통제 받는 데 익숙해 있다. 군사 정권은 이 제도를 확대 정비해 이승만 대통령 시절보다 더 큰 규모로 만들었다. 돈을 받고 야당 내에서 분쟁을 조장할 책임을 맡은 ‘사쿠라’ 정치인들이 최근 군사 정권의 한 특징이 되고 있다.[58]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에는 혼란에 대한 절망감과 전(前) 지도자와 정당(정치정화법과 ‘사쿠라’), 은행과 통화(환율과 인플레이션), 금융 기관(주식 거래 불시 단속), 기업과 기업가(폭리 기업인 단속과 민간 기업의 경영권 인수), 군(정화와 정치적 임명을 통해), 미국(공적, 사적 언어 공격을 통해) 등에 대한 신뢰가 체계적으로 붕괴하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무능한 통치력의 징후인지, 남한 사회의 제도와 자신감을 파괴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징후가 아닌지 점점 의심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58]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이유

김재규는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인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했다고 한다.[59]

여성 편력증

한 중정부 직원은 박정희의 시중을 들기 위한 '마담'이 200명 가량 있었다고 증언했다. 안가에서 술자리 모임이 생기면 이 중에서 면접을 통해 접대 여성을 선발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증언에 따르면 '대통령의 여인' 중 수십 명이 1980년대에도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60]

김재규 중정부장의 변호사였던 안동일 변호사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접대하기 위한 여성의 수가 200명을 넘었으며, 그 중 가수 심수봉 등 연예계 종사자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육영수는 주색에 빠져 항락에 젖은 박정희와 부부싸움을 하다가 얼굴에 심한 멍이 들었다고 한다. [61] [62][63]

박선호는 박정희의 술자리 여인으로는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하였다고 한다. 그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고 주장했다. 박선호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차지철은 박손호에게 『돈은 얼마든지 주더라도 좋은 여자를 구해 오라』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대통령의 채홍사란 중정 의전과장보다도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붙여져야 할 이름이었다고 평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고 하는데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등이며,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이라고 하며 박선호와 한 중앙정보부 직원 등 이 같이 증언하였다. [64] [65][66]

박정희 시대사의 막후에서는 설마하던 일들이 실제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사흘에 한 번 꼴로 술자리 행사를 갖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들어와있었다. 그 대통령전용 비밀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대통령의 채홍사로 그는 최고의 비밀관리자였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이 시작했다. 5·16쿠데타를 일으킬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군대에서 부관이나 전령병이 지휘관을 잘못 모시면 전체 분위기가 썰렁해진다는 말은 금언에 속한다. 그런 군사문화에 젖은 경호실장 박종규는 각하의 심기관리를 최우선 업무로 삼았다. 박종규의 부도덕한 행동에 육영수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홍종철한테 박종규를 은밀히 조사하라고 부탁했다.

70년대 초 어느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67]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러나 1989년, 한 수사관이 육영수 여사의 암살범은 문세광이 아니라는 양심 선언을 했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한 결과 육영수 여사의 목숨을 앗아간 총알이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다. 어쨌든 육영수가 죽고 박종규는 물러났으며 박정희는 절제없는 사생활이 더욱 심각해졌다.[68]


정인숙 살해 사건

1970년 장자연 자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부근의 강변3로에 멈취 서 있는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권총에 넓적다리를 관통당해 신음하고 있는 한 사내와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아 이미 숨진 한 젊은 여인이 발견되었다. 부상당한 사내는 정종욱이고 숨진 여인은 정인숙(으로 두 사람은 남매 관계로 밝혀졌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한테 구조를 요청하여 겨우 살아남았다.

당시 정인숙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69][55] 아이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당시 정부의 한 유력인사가 지목되기도 했다.

나중에 정인숙의 집에서 발견된 정인숙의 소지품에선 정관계 고위층의 명함 26장이 포함된 33장의 명함이 쏟아져 나왔다. 이후 경찰 수사는 지지부진해졌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언론은 정인숙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은 당시 청와대 고위층의 자녀라는 소문과 정인숙이 당시 정관계 고위층 전용이라 할 수 있는 고급 요정 '선운각'을 드나들었다는 것 등을 밝혀냈다.

1주일 후 검찰은 범인은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이라고 발표했다. [70]

사건은 권부의 압력에 의해 흐지부지되었다. 정인숙 살해 사건은 넷째 오빠인 정종욱의 범행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진범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의혹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성급히 정결지으려는 수사 태도도 의심을 샀고 정종욱이 사용했다는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고, 증거는 오직 정종욱의 자백뿐이라는 점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정종욱에 대해선 '권세가들에게 희생된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71]


10월 26일 궁정동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와 그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권력자들인 중앙정보부장, 청와대비서실장, 경호실장, 그리고 여자 둘이 동석했다. 이렇게 6명이 저녁에 벌인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박정희는 암살당하고 10.26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다. 이 군사재판은 법정의 옆방에 보안사령부 파견관이 대기하면서 수시로 지시메모를 전달했다. 이날 변호사 신문에 앞서 진행된 검찰관 사실신문에서는 연회장의 여자 얘기가 나올 때마다 끊어지곤 했는데 그 이유는 처음부터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군 검찰관은 사실신문에서 피고의 진술을 통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선호가 10·26 당일의 행적에 대해 진술하면서 「대행사」 얘기를 꺼내자 검찰관은 재빨리 『네 알겠어요』라며 말을 더 이상 못하도록 끊었다. 또 행사준비차 플라자 호텔에 갔었다면서 다음 말을 이으려 하자 검찰관은 급히 『네 알겠습니다』고 말을 막았다. 이후 박선호는 세상이 놀랄 일류 연예인들이다고 설명했다. 김재규는 말을 아꼈는데 변호사들은 김재규가 고문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72]


통일관

옛 동유럽 외교문서에 의하면 1971년 이후 대화를 진전시켜온 남북한 정권은 당시 은밀한 교감을 통해 분단 이후 적대적 공생관계를 지냈다. 그 바탕 위에서 남한은 통일과 남북관계를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강화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실제로 남북한 당국은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른 남북대화와 통일논의를 각자 자신의 권력 강화에 최대한 활용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0월유신 선포 하루 전인 16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질서’란 박 대통령이 선거와 야당, 언론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강력한 독재구조였다. 북한도 두 달 뒤인 같은 해 12월 새 헌법을 만들어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수령 절대주의 체제’를 강화했다는 점에서 남북은 같은 길을 걸었다.

당시 평양 주재 동독과 불가리아대사관이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회의에서 남측 위원장이던 이 부장은 박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을 언급한 것을 북측이 따져 묻자 “그 표현은 언론인들이 넣은 것”라고 말했다.[73]

유신헌번 선포 전, “오후 7시에 비상사태를 공표할 것”이라고 북측에 2차례 통보했다. 이후락 부장은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쪽 위원장에게 보낸 이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쪽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74][75]

외교관계

통일 문제

박정희의 통일관은 선개발 후통일이었다. 경제개발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킨 뒤 통일하자는 것이었다. 조갑제에 의하면 '박정희는 집권 3년째인 1963년에 쓴 저서『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피력한 조국 근대화란 목표와 자조-자립-자주-통일의 단계적 방법론을 죽을 때까지 견지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76] 미국의 닉슨 대통령의 닉슨독트린정책으로 베트남전쟁포기와 중국과의 관계개선,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및 동아시아에서 냉전기류의 해체경향의 영향을 받아 남북간의 관계를 모색하고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여 '선건설 후통일' 정책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통해 북한을 실체를 인정하고 남북간의 대한 경직된관계에 개선하여 '선평화 후통일' 정책으로 바뀌어 현재까지도 통일정책의 기본원칙이 되고있다.[출처 필요]

사후 영향력

국무총리로 재임 중이였던 최규하는 헌법에 따라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전두환은 박정희를 부정하였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헌법에서 소위 "5.16 혁명정신"에 관련된 사항을 삭제하였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하고 하나회 계열에 부정적인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엮어서 제거하였고, 박정희의 시대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대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선언하였다.[77]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에 반발하여 6월 항쟁이 일어난 후,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의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었고, 하나회 계열을 제외한 공화당 출신 세력들도 활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77]

전두환 정권 시절에 몰락했던 공화당의 주요 세력들은 6월 항쟁 이후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으나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으나 통일민주당김영삼민주당 출신 정치인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자유민주연합2006년 일부는 한나라당과 통합하고 일부는 국민중심당을 거쳐 자유선진당으로 내려오고 있다.

박정희의 친딸인 박근혜 역시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다가 199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하였으며, 지금까지 한나라당의 중심적인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새로 창립된 민주공화당의 총재 허경영은 자신이 박정희의 비밀 정책보좌관이었다고 주장하며 '제2의 박정희'를 자칭하였다.(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참조)

정당 외에는 뉴라이트 계열 정치운동단체들이 박정희 집권기를 일부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짙은 현행 국사 교과서 대신, 박정희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수록된 자신들의 교과서로 바꿀 것을 주장하고 있다.[78]

평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방면에서의 이해당사자들이 존재하므로 명확한 설정이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조갑제는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침묵하는 서민대중'이었으며 이들 속에서 박정희는 항상 영웅이었다고 보았다.[76] 또한 박정희는 봉건적 잔재와 싸웠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76]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은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춰 본 사농공상의 시대에 상업국가론은 혁명이었다”며 “박 전 대통령은 농업국가로부터 상업국가, 즉 무역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뤄 대한민국을 흥융하게 했다”고 평가했다.[79] 조갑제는 “박정희는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고 38명의 급우들을 통솔하는 데 상당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라며 “박정희 급장의 통솔 방식이 대통령 박정희의 통치술로 발전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80]

1999년 조갑제와 대담한 노태우에 의하면 박정희 주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인용,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일해도 국민이 알아주질 않아 배신감을 느꼈으며 朴대통령이 유신으로 나간 것도 그런 동기가 깔려 있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라는 교과서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박정희를 독재라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수준이 높아진 상태에서 민주주의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그보다 훨씬 못한 시절에 야당 주장대로 민주주의식으로 했다면 나라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81]

김정렴의 증언에 의하면 경제적으로는 검소하였다고 한다. 넥타이, 만년필, 전기면도기 세 가지를 빼고는 모두 국산을 사용하였으며 국산 넥타이를 매면 마디가 잘풀려서 상공부에 넥타이에 대한 특별지시까지 했으나 풀리지 않게 하는 납처리 기술을 로열티를 지불하고 도입할 처지가 못되어 생전에 국산 넥타이를 마음껏 매보지 못했다고 한다.[43]

최상천은 “피도 눈물도 예의도 없는 냉혈동물의 망나니짓을 지도력이라고 치켜세우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사적이익을 위해 일본에 봉사한 친일파의 수준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된 천황주의자 " 라고 하였으며[82][83], 진중권은 자신의 저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전반에 걸쳐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를 파시즘적인 소설이라고 평했다. 노회찬은 박정희의 경제개발독재를 빗대어 사회주의정책이라 평가하기도했다.[84] 한편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박정희의 5·16 군사 정변을 ‘구국의 혁명’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85]

이 외에도 박정희의 친일 행각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특히 박정희의 만주군 행적과 창씨개명에 대해 논란이 있다. 박정희는 사망하였지만, 당시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현재 생존해 있는 시점에서 아직은 박정희의 공과나 치적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제 정책과 민주주의 탄압

박정희는 통일의 길을 조국 근대화에 있고,[출처 필요]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이후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을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한다. 박정희는 재임 기간 중 민족 중흥의 기치 아래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6.25를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출처 필요]

그러나 강준만, 진중권, 한홍구 등 진보적인 학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군사 정변으로 전복한 집권 과정,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탄압, 극심한 반대자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부정적·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일본구 소련을 모방한 관료주의 경제정책으로 산업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 형식의 정실자본주의의 양상을 띄고있었다. 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동안 ,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86]

그 외에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는 경제학자 김수행이 있다. 그는 공저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정책을 '토건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다. 아울러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87]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경제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며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 덧붙였다.[88] 한편 임기말 그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체제 인사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였으며[출처 필요] 집권초에는 국가보안법을 개정발표하였다. 반국가활동의 규제를 위해 반공주의를 공고히 한다는 명분 아래 민주주의 발전을 유보시켰다는 비판이 있다.[출처 필요]

2000년 이후의 평가

국내

2000년대 들어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 중흥을 실현한 통치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보수주의를 나누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이해관계에 의한 상반된 평가가 상존하고 있으며 일부 언론에선 박정희의 구체적 친일 행적을 취재, 보도하여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소득이 낮을수록, 연령이 높을수록, 학력이 낮을수록 박정희를 업적이 많은 대통령으로 응답하고 소득이 높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학력이 높을수록 박정희를 증오한다는 평가를 한다.[89][90][91][92]

IMF 사태 이후 김영삼,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는 높아졌는데, 이를 '박정희 신드롬'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 조석곤은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평가하며, 일종의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한다.[93] 성공회대 조현연 교수도 "독재자 박정희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신화 속의 허구"라 비판하며, "청산해야 할 독재통치 18년"으로 평가한다.[94]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업적이라고 알려진 것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퇴를 가져왔다. 또한, 박정희가 서민적이고 검소한 대통령이라는 주장 역시, 각종 비리 의혹사건, 3분 폭리사건, 장준하가 폭로한 3분 밀수사건, 전두환 정권 때 밝혀진 김종필의 200억대 부정축재 사건 등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박정희 신드롬이 "개발독재의 단맛을 독점해온 사회 곳곳의 수구적 보수세력과 특히 그들과 결탁된 조중동 보수언론"이 부추긴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 신드롬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는 강준만월간말의 투고글에서 IMF 사태 이후의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독재의 후신들 등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박정희에 대한 해외의 긍정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김재홍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박정희의 유산》이라는 책을 인용하며, "(3선 개헌 직전인 1970년) 한국의 로비스트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대학 교수 겸 프리랜서에게 박정희의 얼굴을 타임지 표지사진으로 게재하게 주선해 주면 5만 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제의"하는 등 박정희에 대한 해외의 호의적인 반응의 원인을 진단하고 있다.[95]

이에 대해 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박 전 대통령 식의 경제 개발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의 유공자이며 경제성장을 이룩하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이나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라면 유공자로 볼 수 있으며 민주화 진영이 (그간)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 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에 이룩한 괄목할 만한 성과에 대해, 그리고 전제적이며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그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안 해준 것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군사문화와 대대적 환경파괴에 근거한 박정희 시대의 발전은 지속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며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국민들로부터는 (민주화 등) 다른 욕구가 나온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제적 성공이 그의 권력을 도리어 잠식했다”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객관적인 평과를 강조하였다. [96][97]

이런 상반된 시각에 대해 박정희를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던 조희연 교수는 직접 경험한 ‘역사적 박정희’와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현상으로 포착되는 ‘현대적 박정희’의 간극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의 폭압성과 국민적 저항을 강조하는 비판 일색의 기존 담론을 성찰하고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진보 담론이 강조하듯 박정희 체제는 폭압적이었지만, 최근 ‘대중독재론’의 지적처럼 새마을운동의 지지자들이 보여 주는 ‘열광’도 함께 존재한다”며 “미국에 의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 측면이 존재하고, 경제정책조차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것을 지적했다.[98]

해외

1999년 8월에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던 인물 20인」에 오르기도 하였다. 타임은 박정희에 대해 “비록 독재적 성향을 가졌지만 한국의 최장수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경제적 약체 국가를 산업강국으로 변모시켰다고 ” 평가했다. 타임이 선정한 인물들 중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타고르, 중국의 마오쩌둥쑨원, 일본의 히로히토모리타 아키오, 싱가포르의 리콴유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베트남의 호치민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선정되었다.[99]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으며[100] 독일 정부 국정교과서에서는 박정희를 "강력한 손으로 남한을 농업 국가에서 산업 능력을 가진 국가로 이끌어낸 지도자"로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타 국가들의 경제성장 과정과 비교하여 '기적'으로 평가하였다.[101]

2004년,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박정희를 언급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KBS 박권상 사장에게 KBS가 제작한 ‘영상 실록’ 가운데 박정희 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박정희에 대해 “박 대통령의 평가는 후세가 할 일이지만 그 시대, 그 환경에서는 유신인지 뭔지 그런 길밖에 없었다. 민주화도 무정부적인 민주화는 좋지 않다”며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고 2002년에는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을 평양에 초청하여 영화 ‘실미도’의 소재가 된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죄하며 “한국을 방문하면 박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라고 말하였다.[102]

또한 통일되어도 일본과 1대 1 대결 어렵다고 한 말로 유명한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에 대해 각각 "중화학공업 정책 이후 그가 폭력을 사용하고 나라를 경찰국가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매우 화가 났고 흥분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하며 동시에 "큰 발전을 이룩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독재적인 리더가 있었다. 1920년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그랬고, 대만과 한국이 그랬다. 중국은 덩샤오핑 치하에서 발전을 이뤘다. 모두 독재적이었고, 중앙집권적이었다. 먼저 민주화부터 하라는 미국인들의 충고는 성공하지 못했다."며 개발독재의 불가피성을 지적했다.[103]

기미야 다다시는 박정희를 복잡한 과정이 들어있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정리했다. 그는 박정희가 사회주의자인 일부 인물을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자립하고 공업화하는 데에 등용했다고 기록했다.[104]

가족 관계

배우자와 자녀

문화에 나타난 박정희

문학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정희 일대기 형식[107]
  • 이인화, 《인간의 길》 [108]
  • 김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2》
  • 백무현, 《만화 박정희》, 박정희에 대한 만화

드라마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영화

괄호 안은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이다.

같이 보기

주요 저서

  •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
  • 《민족의 저력》
  • 《민족중흥의 길》
  • 《국가와 혁명과 나》
  • 《조국 근대화의 지표》
  • 《지도자의 길》
  • 《한국 국민에게 고함》
  • 《연설문집》
  • 《수기집-나의 어린 시절》[7]

참고 자료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 김정렴, 《아, 박정희 - 김정렴 정치 회고록》(중앙M&B, 1997)
  • 김성진, 《박정희 시대》(조선일보사, 1994)
  • 김종신,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 》(한국논단, 1997)
  • 김형아,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일조각, 2005)
  • 박봉현, 《박정권 19년을 해부한다》(고려출판사, 1991)
  • 박정희, 《한국 국민에게 고함》(동서문화사, 2005)
  • 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향문사, 1963)
  • 박정희, 《하면 된다! 떨쳐 일어나자》(동서문화사, 2005)
  • 박정희, 《나라가 위급할때 어찌 목숨을 아끼리》(동서문화사, 2005)
  •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 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 강국 만들었나》(동서문화사, 2006)
  • 유원식, 《5.16 비록 혁명은 어디로 갔나》(인물연구소, 1987)
  • 이석제, 《각하,우리 혁명합시다》(1995, 서적포)
  • 이한빈, 《일하며 생각하며:이한빈회고록》(조선일보사, 1996)
  • 정재경, 《한민족의 중흥사상-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철학》(신라출판사, 1979)
  • 정재경, 《박정희 사상 서설:휘호를 중심으로》(집문당, 1991)
  • 정재경, 《박정희 실기-행적초록》(집문당, 1994)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 조갑제,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 (월간조선, 2006)
  • 홍하상, 《주식회사 대한민국 CEO 박정희》(2005, 국일미디어)
  •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역사비평사, 2007)
  • 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 2》(개마고원, 1998)
  •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 허경영,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한강사, 2000)

주석

  1.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18~320쪽 참조.
  2. 육영수 여사 저격, 문세광 아니다
  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9&aid=0000001535 박근혜 조부, 동학운동 가담 확인 ]
  4.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67) - 조선닷컴 인물
  5.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353~354쪽 참조.
  6.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2) 조선일보
  7.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4)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8.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7) 조선일보
  9.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10.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5) 조선일보 1998.01.06일자
  11. 사이버 박정희 대통령 홈페이지 (대구사범학교 입학)
  12.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9) 조선일보 1998.01.22
  13. 청년 박정희
  1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21쪽 참조.
  15. "박정희, 독립군 토벌" 출판업자 무죄 확정 한겨레 2009년 02월 08일자
  16. "박정희, 독립군 토벌" 책 출판 무죄 확정 한국일보 2009년 02월 09일자
  17. '독립군 토벌한 박정희' 역사서 명예훼손 무죄 경향신문 2009년 02월 08일자
  18. 토론이 있는 인터넷신문 - 데일리안
  19. 진중권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20. 청년 박정희, 박정희대통령 인터넷 기념관
  21. 박정희의 일본군 병적기록 60년만에 '햇빛' - 오마이뉴스 2005-02-02
  22. 대통령과 '창씨개명', 《오마이뉴스》, 2002.9.2.
  23.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왜 두개였나, 《세계일보》, 2006.08.09
  24.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25. ‘박정희 재조명’ 날선공방 불붙는다 한겨레, 2004-07-26
  26. 조희연 저서 참고
  27.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35페이지
  28. 박정희, 《한국 국민에게 고함》참조.
  29. 박태균, "한국전쟁" , pp.149-150, 2005.
  30.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43071&section=section1
  31. 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2/10/021075000200210230431140.html
  32.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33.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66) - 조선닷컴 인물
  34. [박정희 생애]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3) - (184)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35. [박정희 생애] 제6부 쿠데타 연습-이승만제거계획(2) - (183) - 조선닷컴 인물
  36. 박정희 대통령 전자도서권 - 도서관 프로필
  37. 정운현. '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 -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3] 누가 살려줬나”. 오마이뉴스. 2008년 7월 15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24) (도움말)
  38.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
  39. 박정희, "국회에 불을 확 질러버리고싶었다" - 조갑제 닷컴
  40. 국가정보원 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조사결과
  41. 그는 언론이 탐나서 몸부림쳤다 - 한홍구, 한겨레21
  42. 이기형 《여운형 평전 (역사인물찾기 5)》(실천문학사, 2009) 464페이지
  43. 김정렴이 그가 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언급. 이고운 기자. “박정희의 경제정책 18년, 생생한 증언”. 209년 5월 12일에 확인함. 
  44. 육영수 여사 저격, 문세광 아니다
  45. 원로가수 남상규,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시로 노래 만들어
  46. 《북조선 악마의 조국》(박갑동, 서울출판사, 1997) 253~254 페이지
  47.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21) - 조선닷컴 인물
  48.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76) 조선일보
  49.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88) 조선일보 1998.01.21
  50.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51. 관광 자원학(김병문, 백산출판사, 2000)
  52. 불국사-석굴암,1만원권 지폐모델 계획 있었다, 불교 포커스
  53. 1만원권 원래 도안은 석굴암, 한겨레 경제
  54. 1만원권 지폐 변천사, JOINS 뉴스
  55.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autogenerated2"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56.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57. 발굴-현대사 뒷모습
  58. [1]
  59. 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60. 박정희 X-파일, 여자관계에서 ‘기자박치기’까지
  61.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62. 박정희 거쳐간 '궁정동 여성'은 200여 명
  63. 법원 녹취록
  64. 궁정동 안가 불려간 여성 200명 넘었다
  65. 박정희 거쳐간 '궁정동 여성'은 200여 명
  66. 법원 녹취록
  67. 신동아 1998년 11월호
  68. 육영수 여사 저격, 문세광 아니다
  69.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70. 1970년 3월~: 여영무, 〈추적 정인숙 미스테리〉《신동아》(1983.9.) 166~167쪽
  71. (한겨레, 1987년) 14쪽.
  72. 신동아 1998년 11월호
  73. [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909250093 1970년대초 南北정권 ‘적대적 공생관계’ 입증” ]
  74. 박정희 정부, 유신선포 전 북에 통보
  75. 10월유신 선포 전, 북에 2차례나 알려줬다.
  76.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77.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책세상, 2000) 112~113쪽.
  78. 朴 "왜곡된 청소년 역사 평가 교육 생각하면 전율" , 네이버 뉴스
  79. “한국은 2차대전 후 독립국 중 가장 성공한 나라” 대한민국 정책포털, 2008-09-02.
  80.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 초인의 노래》(조선일보사, 1998) 354~355쪽.
  81.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82. 최상천, 《알몸 박정희》(사람나라, 2001) 33쪽.
  83. 최상천씨 “박정희는 천황주의자”
  84. 노회찬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박정희야말로 사회주의자"
  85. 박근혜, "5·16은 구국 혁명"
  86.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이승환옮김 ( 김영사 ) 15쪽 아시아의 붕괴.
  87. 홍성태, 박정희 개발독재의 파괴적 유산, 월간 말, 2005년 3월호, pp. 122~127
  88. 김정렴 책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소개기사
  89. 서울신문
  90. 민주화는 김대중(뷰스앤뉴스)
  91. 프레시안 "박근혜 대표 지지율 급락"
  92. 서울경제
  93. 조석곤, 박정희신화와 박정희체제, 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pp 272 ~ 286
  94. 조현연, 청산해야 할 박정희 독재통치 18년과 '인간 박정희', 기독교사상 2004년 9월호, pp 34~45
  95. 강준만, 박정희 신드롬을 해부한다, 〈인물과 사상〉 1999년 2월호, 인물과사상사, pp 28~43
  96. 백낙청교수 “박정희는 한국경제 발전의 유공자”
  97. 백낙청 "박정희 관련 글, 보수신문이 한 면을 너무 부각"
  98. 박정희 시대를 재는 잣대, 하나로만 가능한가 동아일보, 2007-08-21
  99. '20세기 아시아인물 20인' 박정희 전대통령 올라 (1999-08-16)
  100. 前 경제수석이 말하는 `경제부국 시나리오`‥`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101. 독일 교과서"60년대 빈국서 한강의 기적 이뤘다"
  102. 김정일“노태우 김영삼은 나라망친 대통령”
  103. 에즈라 보겔 "통일돼도 일본과 1대1 대결 어려워"
  104. 박정희 정부의 선택, 기미야 다다시, 후마니타스
  105. 박정희의 일가에서는 박한생이 19세에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빨치산 부대장 출신의 최태환은 박한생이 청소년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 월북하여 북조선의 고위간부인 박광선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106.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00)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07.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08. 인간의 길
  109. 단역이었다.
  110. 조영진이 맡은 배역은 '통치자'였다. 이 통치자의 이름은 영화 안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으나, 영화 내용상으로 볼 때, 통치자는 박정희를 나타낸다.
  111. 송재호가 맡은 배역은 '각하'였다. 각하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내용상 각하는 박정희를 나타낸다.

바깥 고리 및 참고 사이트

제5·6·7·8·9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임
윤보선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후임
최규하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
전임
윤보선
대통령 권한대행
1962년 3월 24일 - 1963년 12월 16일
후임
박정희
전임
송요찬
내각수반
1962년 6월 18일 ~ 1962년 7월 9일
후임
김현철
전임
장도영
제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5월 20일 ~ 1961년 7월 4일
후임
박정희
전임
박정희
제3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7월 4일 ~ 1963년 12월 16일
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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