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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가·언론인·정치인이며 [[대통령|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도미 후에는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가·언론인·정치인·독재자이며 [[대통령|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도미 후에는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거쳐[[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1948년]] [[5월 30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대한민국의 국회의장]], [[7월 24일]]부터 [[1960년]]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사퇴한 뒤 [[미국]] [[하와이 주|하와이]]로 망명하였다. [[호 (이름)|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1948년]] [[5월 30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대한민국의 국회의장]], [[7월 24일]]부터 [[1960년]]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사퇴한 뒤 [[미국]] [[하와이 주|하와이]]로 망명하였다. [[호 (이름)|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 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
== 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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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60805481&code=940100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붙인 제목 -->]</ref> 뒤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ref name="이정식 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4260805481&code=940100 경향닷컴 | Kyunghyang.com<!-- 봇이 붙인 제목 -->]</ref> 뒤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ref name="이정식 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 도미 유학 ===
=== 도미 유학 ===
[[1907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lang|en|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ref>{{언어고리|en}}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ref>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lang|en|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미국 달러|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스티븐슨을 저격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스티븐슨 저격사건은 폭력적이며 비인도적인 이유라고 생각했을 뿐 만 아니라 장인환과 전명운 등의 강경파 세력을 꺼려하여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ref>
[[1907년]]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lang|en|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ref>{{언어고리|en}}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ref>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lang|en|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미국 달러|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을 처단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ref>[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ref>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리).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8쪽 참조.</ref>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리).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ref>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8쪽 참조.</ref>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2009년 10월 11일 (일) 01:39 판

이승만
대한민국제1·2·3대 대통령
임기 1948년 7월 24일~1960년 4월 26일(사임)
부통령 1대 : 이시영
2대 : 김성수
3대 : 함태영
4대 : 장면
전임: 김구(제-대)
후임: 윤보선(제4대)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대 대통령
임기 1919년 9월 11일~1925년 3월 21일(탄핵 후 면직)
국무총리 1대 : 이동휘
후임: 박은식(제2대)

신상정보
출생일 1875년 3월 26일(1875-03-26)
출생지 대한제국 조선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
거주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거주하였음
사망일 1965년 7월 19일(1965-07-19)(90세)
사망지 미국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국적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본관 전주
학력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정당 독립촉성중앙회, 자유당
부모 이경선, 김해김씨
배우자 박씨(이혼), 프란체스카 도너
자녀 아들 이봉수, 양자 이강석, 이인수
종교 감리교
별명 호 우남, 다른 이름 승룡, 혹 이박사(별칭)
웹사이트 http://www.syngmanrhee.or.kr/
1959년에 만들어진 백 동전에 이승만이 그려져 있다.

이승만(李承晩,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교육가·언론인·정치인·독재자이며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도미 후에는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거쳐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 11일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하고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1948년 5월 30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7월 24일부터 1960년 4월 26일까지 대한민국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사퇴한 뒤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이다.

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생애 초기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왕족이며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그는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아들 장평도정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2]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2] 1879년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던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2]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에 뛰어났다 한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3] 서당 정원에 꽃을 심는 것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 한다.[3] 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셀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2]

계몽운동

1909년의 이승만
1910년의 이승만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4] 그러다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하였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 [2] 그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4] 그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2]

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2]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2]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2]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2]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2]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1899년 1월 17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2]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2]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5]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히 했으며,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옥중생활에 그의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6]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2] 1904년 8월 9일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전쟁이 발생하면서 특사로 감옥을 나올수 있었다.[2]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1904년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외교 활동

1904년 8월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7]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보냈다.[5]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5]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2]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2]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2]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2]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을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8] 어렵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7]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네델란드에서 병으로 사망한다.[2]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9] 뒤에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진실을 알게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8]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도미 유학

1907년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그리고 1910년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10]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슨을 처단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11]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ungman Rhee, 또는 승만리). 당시 박사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2]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출처 필요]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때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2]

임시정부 활동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지도자

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2]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신립교회' 헌당에 참여하였고,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2] 같은 시기인 1918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13]

1919년 3월 21일 러시아령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인국민회(노령(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5일에 통보받았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2]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3`1운동 이후, 1919년 9월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뽑혔지만 여전히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고,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출처 필요]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며,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오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다가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14]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15]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14]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14]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14] 그 후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6]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

1930년대 활동

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

구미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합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의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17]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하여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 대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18]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17] 2월 8일 그는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17]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 처녀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났다.[17] 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르·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17]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에게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17]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에 도착했고, 그해 10월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17]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17]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를 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19]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타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17] 139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 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 부인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17]

1938년 4월 24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17]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다.[17]

1940년대 활동

1941년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구미 침략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경고한 일본 내막기는 큰 설득을 얻게 되었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0]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21]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20]

이승만은 그뒤에도 계속 미국에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20]

19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22]

미국의 소리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일제 강점기시대, 1942년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워싱톤 D.C로부터 '일제는 일본이 전쟁에 패하고 있다'는 주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였다.[23]

귀국 직전

1945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21]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21] 김성숙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은 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1]

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22]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은 스탈린과 외무부의 비신스키차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승만을 "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하기도 했다.[22] 소련군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로, "이승만이 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근거로 했다.[22]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극동사령부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24]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25]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해방 정국

  • 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 [26] 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 1945년 10월 23일 자신이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1945년 11월 21일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 1945년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을 하였다.[27]
  • 1946년 1월 14일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27]
  • 1946년 1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 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28]
  •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 1946년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29]
  •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 1946년,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 1946년 9월 10일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하였다.[27]
  • 1946년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 미수를 당하였다.[27]
  •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는 김구·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30]
  • 1947년 1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김구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은 3.1절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김구와 임정의 행위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하였다.[31]
  • 1947년 3월 12일 미국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2]
  •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 1947년 4월 21일 귀국하였다.
  • 1947년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33]
  •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격적으로 외치는 이승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하지의 지시에 의해 연금상태에 들어갔다.[34]
  •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35] [36]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김구와 함께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전보를 보내 반탁 시위대를 격려하였다.[37][38]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37]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격려에도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39]
  •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40]
  •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41]
  • 1947년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42]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43]
  •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의 이승만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통령직 수행시

이승만은 1948년 7월 21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단독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으며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52년 이승만은 "여성은 이르니 가당치 않다"라며, 김병로 대법원장이 요청한 판사 임용 후보중 이태영을 제외시켰다. [44]

1957년 11월 경제 4부 장관들이 경무대를 찾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필요성을 설명하였으나, 이승만은 스탈린식의 사고방식이며 불구대천의 원수인 공산주의자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냐며 한마디로 거절했다.[45][46]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1960년 4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된 시위인 4·19 혁명이 일어나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하야할것을 권유, 설득했었다. 이에 장시간동안 설득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할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이 전달되자 애도의 뜻을 발표한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였다.[47] 4·19 혁명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주었고, 4월 26일 이승만은 자진 퇴임을 선언하고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 한편,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4월 28일, 경무대에서 가족들과 함께 자살하였다.

망명과 죽음

이승만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망명생활중이던 이승만은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1962년 3월 17일자 비행기표까지 끊어놓고, 3월 16일 '사과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3월 17일 박정희의 특별지시를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 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48] 이후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병세가 악화되면서 망명지 하와이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91세의 나이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7월 23일 오후 3시 미 공군 수송기가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이승만의 유해를 운구하여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박정희, 국회의장 이효상, 대법원장 조진만, 국무총리 정일권 등 3부 요인들을 대동하고 공항으로 나가 시신을 영접하였다.[49]

이후 장례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1965년 7월 20일 박정희는 이승만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하였으나 이승만의 문중 사람들과 이승만 측근들은 정부의 국민장 결정은 이승만에 대한 홀대라고 생각했고, 4월 혁명동지회 등은 국민장은 너무 과분한 조치라며 3일간 농성을 하였다.[49] 이승만의 시신이 운구되자 민중당 대변인 김영삼은 '적잖은 정치적 과오가 있으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바쳐왔으며,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 국민과 더불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애도성명서를 발표하였다.[49] 4월 혁명동지회 등 일부 단체에선 국장, 국민장, 사회장도 안된다며 반발하였다.[49] 한편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국민장을 거부하고 가족장을 하겠다고 응답하였고, 구 자유당측 인사들은 국민장을 거부하고 국장을 요구하였다.[49] 박정희는 정부가 국민장으로 양해했으면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개인장으로 지내겠다면 내버려두라며 역정을 냈다.[49]

평가

1940년대의 평가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지목하는 설문조사 결과에 9%가 이승만을 지목하였다.[50] 그뒤 11월 선구회에서 다시 대통령에 적합한 인물을 설문조사했을 때는 1957명 중 431명이 이승만을 선택하여 1위로 집계되었다.[50] 한편 최고의 혁명가를 꼽는 설문에서는 978명 중 176표를 얻어 2위였다.[50] 1946년 7월 조선 여론협회가 서울에서 누가 초대대통령에 적합한가를 조사한 설문결과에는 1961표로 전체의 29%를 확보했다 한다.[50] 1948년 6월 23일 조선여론협회에서 다시 조사한 결과(누가 초대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가?)에서는 1024표로 1위를 하였다.[50]

평가

이승만은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감리교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았다는 평가가 있다.[51] 이와 관련된 후문으로 인권운동가 박소영은 그가 하와이 망명생활 도중 임영신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했다는 후문이 있는 것 뿐, 그의 뒷얘기는 깔끔했다는 예를 제시했다.[51]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52]

비판

대한민국 임시정부활동 당시, 그는 1925년 임시정부를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썻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게 된다. 이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었다.' 라고 성토를 했었다. [53][54]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고 평하였다.[52]

강준만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은 비난과 독설에 매우 능숙했다' 한다. 이승만의 미국인 고문 로버트 올리버가 언젠가 이승만에게 그런 문제점을 제시했더니 이승만은 이렇게 답했다.

나도 알고 있소. 나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 왔으니까 그렇게 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오.[55]

다음은 1947년 가을 당시 돈암장 신문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친이승만 신문이었던 민중일보의 사장이자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인 윤보선의 요청으로 서정주가 이승만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슨 자료를 찾아오라고 프란체스카에게 시켰다는데 조그마하고 가냘프고 유순한 부인은 묵묵히 명령대로 나가 꽤 오랜 뒤에 돌아와서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일은 어느 집에서나 가끔 있는 일로 자세히 오래 찾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하고, 여기를 뜨려 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침대에서 허리를 반만 일으키고는 들어와 서 있는 프란체스카 부인을 화난 눈으로 바라보며 영어로 "겟 아웃!"하고 크게 소리치고는 나보고 거기 앉으라고 했다. 나는 그의 부인이 마치 꾸지람 들은 어린애처럼 풀이 죽어 주춤주춤 물러나가는 것을 보았다.

— 서정주[56]

서정주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전기를 완성했다. 그래서 1949년 10월 삼팔사에서 이승만 박사전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 그러나 이 책은 나오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당했고, 내무부 치안국이 압수 명령을 내려 서점에 깔린 책들은 다 몰수되었다. 이승만은 대변인 김광섭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 밑에 경칭을 안 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서정주는 그래 얼마만큼이나 되는 시인인가?"하는 질문에 김광섭이 좋은 시인이라고 대답하자, 이승만은 이렇게 비판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57] 강준만에 의하면 서정주가 어른을 모셔 보지 못해 경칭을 생략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로서 서양 물을 40년 넘게 먹은 이승만이 서양의 전기에선 경칭을 쓰지 않는다는 것쯤은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 뿐이었다. 서정주는 이승만이 오히려 정반대로 40년 넘게 외국을 떠돌아야 했기에 조선, 그것도 구한말 조선에 대한 전통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렬했다는 것을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57]

또한, 대한민국정부 수립이후, 1949년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최종적 결정 승인과 지시를 내린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친일 경찰,군인,관료 출신들을 대거 등용했다는점과[58], 한국전쟁때의 책임등, 이후 자유당과 연탁하여 종신독재 집권할려했던점에서 비판의 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기타

해방정국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필요] 뉴라이트 계열은 이승만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건국대통령', '국부'로 재평가, 상정하자는 의견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명박 정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으로 이승만 정부의 건국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한바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부정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출처 필요]

1983년부터 하와이 이민 1세대 중 장금환의 딸 로베르타 장은 지금 살고 있는 하와이 이민 1세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하였는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을 부정적 시각으로 증오하는 사람들과 긍정적으로 보는사람들등등 각각 서로 반반씩 존재했었다. 이승만에 부정적 시각가진 이들은 한민회 철폐한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려고 든 기억이 있었다고 증언한다.[59]

이러한 많은 부정적평가와 긍정적평가를 이루면서도 이승만은 평생을 복고적 투쟁을 위해 바친 인물이었다. 강준만은 '이 점을 무시한 채, 오늘날의 잣대로 이승만을 평가하는것은 이승만에 대한 불필요한 악의적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55]


가족과 친지

이승만은 태종 이방원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그의 다섯째 아들 장평도정 이흔의 15대손었다. 본래 이경선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두 형이 일찍 죽어 사실상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이경선. 누나가 둘이 있었으나,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혼인한 본처와 헤어지고 후에 오스트리아 국적의 프란체스카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어서,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양자로 삼았다. 이우의 아들 이청도 양자 후보에 올랐으나, '왕정복고를 연상시킨다' 하여 거부되었다. 이 후 이강석이 자살하여 대가 끊기게 되자, 종친회의 권유로 이인수가 양자로 입양되었다.[60] 이인수는 명지대학교 법정대 학장을 역임한바 있다.

한국 전쟁 뒤, 이승만은 사람들이 순종의 계비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를 존경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녀를 정릉의 수인제(修仁齊)에 가두어 두었다. 이승만은 그가 이씨 왕족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도 하기 시작하였다.[출처 필요]

기타

1957년 3월 21일 82회 생일을 맞아 우남장학회를 발족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비교

이승만과 김구 모두 구한말에 과거에 응시해 낙방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낙방 후 이승만은 개신교, 김구는 동학과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친미국 노선으로 갔고, 김구는 친대만 노선으로 갔다. 장개석의 중국은 몰락한 반면, 미국의 세계적 패권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미국은 비교적 다원체제 였던 만큼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은 미국의 어느 한 부분과의 갈등이었을 뿐, 큰 흐름은 친미노선을 선택한 이승만에게 유리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향후 12년간 통치하게 된다.[55]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와 함께 수시로 경마장에 들렀다. 경마가 있는 날이면 3층 귀빈실은 항상 북적거렸다. 마사회에서는 이들을 극진히 예우했으며, 예정에 없던 상장이나 상배를 마련하여 레이스를 하기도 했다.[61] 한편 김구도 경마장을 즐겨 찾았는데, 1946년 모친 곽낙원여사의 시신을 중국에서 운구하여 정릉뒷편으로 이장할 때 기마단이 운구를 호송했기 때문이다. 운구 호송을 고마워한 김구는 계속 경마장을 찾았다고 하며, 이승만과 김구가 자주 찾는것에서 '이승만상', '김구상'이 유래했다고 한다.[61]

화폐 속의 이승만

옛날에 사용하던 환화에 그려진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도 처음 발행된 1953년에는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1957년에 발행된 새 환화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에 있던 한복양복으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들어서 돈에서 이승만의 초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작품 속의 이승만

이승만을 연기한 배우들

저서

  • 《독립정신》[62]
  • 《일본 내막기》(1941)
  • 《건국과 이상》
  • 《이승만 한시선》
  • 《일본 그 가면의 실체》

함께 읽기

주석

  1. Lee Wha Rang. “Who Was Rhee Syngman?”. 2007년 12월 1일에 확인함. 
  2.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3.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4쪽 참조.
  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95쪽 참조
  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7쪽 참조.
  6. 한국사傳 제54회 :: <이승만-2부작>1부 이승만
  7. "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 (9)"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 주간조선, 2008년 9월 26일 읽어봄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97쪽 참조.
  9. 경향닷컴 | Kyunghyang.com
  10. (영어) Rhee, Syngman,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PhD Thesis, Princeton University, 1912.
  1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14867.html
  1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48쪽 참조.
  13.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5~26쪽.
  14.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15. http://historia.tistory.com/1867
  16. 의열투쟁과 한국독립운동(한국민족운동사학회 | 국학자료원 | 2003.02.03) 40페이지
  17.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1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63페이지
  19. 임시정부기념사업협회
  20.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99쪽 참조.
  21.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95페이지
  22. 소,애초 이승만배척/45년8월 "반소인물" 낙인 조선일보 1995.02.07일자
  23. 이승만 박사 육성
  24.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312~314쪽 참조.
  25. 허은, 〈8·15직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 2000) 307~308쪽.
  26.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47쪽쪽. 
  27. 대한민국사랑회
  2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13쪽
  2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06쪽
  30.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3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15쪽
  3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권) 24~25쪽
  3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8쪽.
  3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9쪽.
  3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1~32쪽.
  36. 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5쪽.
  3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2~33쪽
  38. 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6쪽.
  3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5쪽
  4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6쪽
  41.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0~61쪽
  4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5쪽
  43.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28쪽. 친일 경찰 문제로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사직한 최능진도 동대문구 갑에 출마해 이승만과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이승만의 방해공작으로 등록 무효선고를 받아 결국 이승만이 단독으로 입후보하게 되었다.
  44. 여성 차별의 벽, 이태영 첫 여성판사 임명, 이승만이 제동
  45.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제1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185
  46. 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경제개발5개년계획(상), 대한매일 1999년 3월 15일 6면
  47. 대한민국사랑회
  48. 이승만은 1960년~: 강준만,《한국현대사산책》(1960년편 3권) (2004년, 인물과사상사) 47쪽.
  49. 弔辭/朴正熙가 李承晩에게 - 조갑제
  50.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26~228쪽 참조.
  51. 코나스넷
  5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297쪽 참조.
  53. 좌파와 대립 일관한 ‘숭미 대통령병’ 이승만 한겨레신문 (한겨레 칼럼 | 2004.02.16 (월))
  54. 친일청산 없인 참된광복 없어” 대전일보 사회 | 2006.02.28 (화)
  5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4) 271쪽
  56. 강준만, 앞의 책, 269~270쪽
  57. 같은 책, 270쪽
  58. “미완의 역사, 친일청산” - 반민특위 김상덕 내용中..
  59. 한국사傳 제54회 :: <이승만-2부작>1부 이승만, 9월1일 읽어봄.
  60. 이승만은 ~ 입적되었다.:〈친인척 구설수 피한 이승만 전대통령〉, 굿데이, 2003년 3월 14일.
  61. [경마 이야기] 김구-이승만 이후 정치인 발길 끊겨 조선일보 1999.06.02
  62. 옥중기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참고 자료

  • 이원순, 《인간 이승만》 (신태양사, 1995)
  • 서정주, 《우남이승만전》 (화산문화기획, 1995)
  • 이승만, 《일본 그 가면의 실체》(대한언론인회, 2007)
  • 이종구, 《이승만(건국 대통령)》 (글벗사, 2005)
  • 로버트 올리버, 황정일 옮김, 《이승만 - 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2. 3)
  • 김제방, 《이승만과 김구의 대좌》 (한솜, 2005년)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연세대학교출판부, 2004)
  • 이승만, 《이승만의 전시중립론(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정인섭 역, 나남출판, 2000)
  • 이승만, 《이승만 한시선- 이승만 연구 총서》(이수웅 역, 배재대학교출판부, 2007)
  • 이한우,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출판사 해냄, 2008)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비한국학연구총서》(역사비평사, 2005)
  •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배재대학교, 2005)
  • 유영익,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3)》(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6)
  •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05년) 40, 42쪽.
  •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 나라세우기 X파일》(박일영 옮김, 동서문화사, 2008)
  • 유영익,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10)》(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 유영익, 《이승만 연구(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학술총서 2)》(유영익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 이주영,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출판사 김&정 펴냄, 2008)
  • 월간조선, 《이승만, 박정희를 추억한다》(월간조선편집부, 월간조선사, 2004)
  • 이승만, 《풀어쓴독립정신》(이승만, 김충선 외 역, 청미디어, 2008)

바깥 고리

제1·2·3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임
초대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6일 후임
허정
(권한 대행)
이승만 · 윤보선 · 박정희 · 최규하 ·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이명박 · 박근혜 · 문재인 · 윤석열
전임
이승만
(수반으로서의 국무총리)
제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1919년 9월 11일 - 1925년 3월 21일
후임
박은식
(의정원 보궐선출)
전임
초대
제1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1919년 4월 11일 - 1919년 4월 23일
후임
이동녕
전임
초대
제1대 국회의장
1948년 5월 31일 - 1948년 7월 24일
후임
신익희(보궐선거)
전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동대문구 갑)
1948년 5월 31일 - 1948년 7월 24일
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제헌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
무소속
(동대문구 을)이영준
후임
홍성하(보궐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