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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형 : [[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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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누나 : [[허초희]](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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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나 : 증정부인 양천허씨
* 매형 : [[우성전]](1542~1593), [[동인]]과 [[남인]] 중진


== 저서 ==
== 저서 ==

2009년 10월 9일 (금) 20:09 판

제목

허균
출생1569년
강릉 초당동
사망1618년
사인능지처참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호는 교산,성소,백월거사 자는 단보
직업문인, 정치인
부모허엽 / 강릉 김씨
친척형제 허난설헌, 허성, 허봉
웹사이트http://www.hongkildong.or.kr/

허균(許筠, 1569년 음력 11월 3일~1618년 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허균의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성소(惺所)로 불리웠고, 후에는 백월거사(白月居士)로도 불렸다. 광해군 때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생애

허균은 1562년(선조 2년) 음력 11월 3일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허균은 아버지 초당 허엽의 둘째 부인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그의 부친 초당 허엽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동인의 영수가 되었던 인물로, 그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허엽이 상주의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을 한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를 한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해 피난 중이던 부인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한다. 허균은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교산이라는 호를 사용하게 된다.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국 최초의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었으며,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을과에 급제하고, 1597년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1604년(선조 37년)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 1606년에 누이 허초희의 시선을 모아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되게 된다. 1607년(선조 40년) 삼척부사와 공주목사를 역임하고,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내자시 정으로 임명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형조 참의가 되고, 다음해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피화(避禍)하였다가 이듬해 1614년(광해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그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라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정2품의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1617년에는 정2품 좌참찬에 오른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1]

죽음에 대한 의문점

그의 처형을 두고 당시 조정의 권신이었던 유희분이 죄인에 대한 면밀한 심문 없이 자백 직후 형을 집행했다 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이를 두고 허균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했던 또 다른 권신 이이첨이 처형의 정당성과 허균의 역모 혐의를 강조하면서 이 논란은 가라앉았으나, 허균이 능지처참되던 날 형장에서 죄안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증언이 있어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허균은 처형 직전 광해군이 친국하는 자리에서 광해군을 향해 '할 말이 있다' 고 외쳤으나 곧 제지당하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또한 이이첨은 허균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던 당시 허균에게 처벌은 없을 것이라며 꾸준히 안심시켰다고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실록은 '왕 역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허균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한 김개는 1678년(숙종 4년) '결정적인 죄안이 없다'는 당시 도승지였던 김석주의 주청에 따라 신원되면서 허균의 죄안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한 의문을 낳고 있다. 이러한 의문점 때문에 그의 하옥부터 형 집행의 순간까지를 소설화하거나 드라마로 제작하는 등 많은 흥밋거리도 낳고 있다.

1623년 3월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시절의 무수한 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과 추숭이 이루어졌으나, 허균만은 유일하게 조선왕조가 멸망하던 시점까지 역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형을 예감하고 자신의 문집 《성소부부고》를 자신의 외가에 비밀리에 의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그의 사상과 학문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평가

그가 지은 소설 《홍길동전》은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한 대표적 걸작이며, 허균이 진보적인 종교인이어서, 천시 받던 불교는 물론 천주교회까지 신봉하였다는 평가도 있다.[2]

가족 관계

  • 아버지 : 허엽(許曄) - 서경덕의 문인이며 경상도 관찰사.[3]
  • 어머니 : 후취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
  • 이복형 : 허성
  • 동복누나 : 허초희(허난설헌)
  • 매형 : 김성립
  • 동복형 : 허봉(許篈)[4]
  • 누나 : 증정부인 양천허씨
  • 매형 : 우성전(1542~1593), 동인남인 중진

저서

  • 홍길동전
  • 동국명산동천주해기(東國名山洞天註解記)》
  • 도문대작(屠門大嚼)》
  • 《남궁두전(南宮斗傳)》
  • 《유재론》
  • 《성소부부고(惺所覆?藁)》
  • 《학산초담(鶴山樵談)》
  • 《국조시산(國朝詩刪)》
  • 《한정록(閑情錄)》

주석

바깥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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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