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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운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에 [[간송미술관]]이 된다. 간송미술관은 [[대한민국의 국보|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그와 관련되어, [[안동]]에서 2000원이란 큰 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962년]] 그의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운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에 [[간송미술관]]이 된다. 간송미술관은 [[대한민국의 국보|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그와 관련되어, [[안동]]에서 2000원이란 큰 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962년]] 그의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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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3일 (일) 22:58 판

전형필(全鎣弼, 1906년 7월 29일1962년 서울 출생)은 한국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그가 수집한 대부분의 문화재들은 매우 가치가 높은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국보보물 등으로 지정되었다.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운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간송미술관이 된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그와 관련되어, 안동에서 2000원이란 큰 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1962년 그의 사후에 문화훈장이 추서되었고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바뀌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