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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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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증조부 [[송흥록]], 할아버지 송광록, 아버지 송우룡 등 3대조가 모두 동편제를 업으로 삼아 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 영향으로 7세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소리를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했는데, 특히 아버지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 매질을 하는 등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증조부 [[송흥록]], 할아버지 [[송광록]], 아버지 송우룡 등 3대조가 모두 동편제를 업으로 삼아 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 영향으로 7세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소리를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했는데, 특히 아버지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 매질을 하는 등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불렀다. 10대 후반 지역 민속축제 '대사습놀이'에서 인기있는 소리꾼으로 활약했고, 서울로 올라와서 [[원각사 (극장)|원각사]] 간부를 맡았으며, 이 때 [[조선 고종|고종]] 앞에서 어전 광대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감찰직을 제수받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기도 했다. 충정공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 등지를 다닌 적도 있다.
어려서부터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불렀다. 10대 후반 지역 민속축제 '대사습놀이'에서 인기있는 소리꾼으로 활약했고, 서울로 올라와서 [[원각사 (극장)|원각사]] 간부를 맡았으며, 이 때 [[조선 고종|고종]] 앞에서 어전 광대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감찰직을 제수받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기도 했다. 충정공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 등지를 다닌 적도 있다.

2009년 7월 20일 (월) 10:57 판

송만갑

송만갑(宋萬甲, 1866년 ~ 1939년)은 조선 말, 일제 강점기명창이다. 전남 구례읍 봉북리 출신. 동편제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여기에 서편제를 가미하여 새로운 소리제를 창조하였다.

일생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증조부 송흥록, 할아버지 송광록, 아버지 송우룡 등 3대조가 모두 동편제를 업으로 삼아 온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 영향으로 7세부터 소리 공부를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소리를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했는데, 특히 아버지는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때 매질을 하는 등 엄격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불렀다. 10대 후반 지역 민속축제 '대사습놀이'에서 인기있는 소리꾼으로 활약했고, 서울로 올라와서 원각사 간부를 맡았으며, 이 때 고종 앞에서 어전 광대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감찰직을 제수받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기도 했다. 충정공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 등지를 다닌 적도 있다.

소리로만 부르던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였으며, 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1923년 '조선 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다. 대표적인 제자들로 장판개, 박중근, 김정문, 박봉래, 박록주 등이 있다. 유성기 음반 87면에 다수의 판소리들을 녹음하였다.

평가

'청중과 교감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청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 및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대중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소리는 정교하지만, 동시에 아니리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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