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동 (1947년):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1번째 줄:
'''김태동'''([[1947년]] [[1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금융인, 경제 관료이다.
'''김태동'''([[1947년]] [[1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금융인, 경제 관료이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김태동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김태동의 일가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1955년 상경하였다.
김태동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김태동의 일가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1955년 상경하였다.
7번째 줄: 7번째 줄: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대학교 시절의 독서서클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년 만에 퇴직당했다.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대학교 시절의 독서서클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년 만에 퇴직당했다.


이후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던 그는 국제경제연구원 원장이던 정재석 전 부총리의 눈에 띄어 연구원으로 발탁된다. 1978년에는 유학을 떠나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교]] 상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이후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던 그는 국제경제연구원 원장이던 정재석 전 부총리의 눈에 띄어 연구원으로 발탁된다. 1978년에는 유학을 떠나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교]] 상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경실련에서 정책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OECD]] 가입 반대, [[한국은행]] 독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재벌과 부동산 문제를 집중 제기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경실련에서 정책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OECD]] 가입 반대, [[한국은행]] 독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재벌과 부동산 문제를 집중 제기하였다.

2009년 4월 30일 (목) 01:15 판

김태동(1947년 1월 14일 ~ )은 대한민국의 금융인, 경제 관료이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김태동은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김태동의 일가는 아들의 성공을 위해 1955년 상경하였다.

이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거친 그는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 1969년에 수석 졸업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한국은행에 취직하였지만, 대학교 시절의 독서서클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년 만에 퇴직당했다.

이후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던 그는 국제경제연구원 원장이던 정재석 전 부총리의 눈에 띄어 연구원으로 발탁된다. 1978년에는 유학을 떠나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석사,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교 상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다. 경실련에서 정책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OECD 가입 반대, 한국은행 독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재벌과 부동산 문제를 집중 제기하였다.

1998년에는 국민의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내정되었으며, 이후 정책수석, 정책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 편집부 엮음, 《시사인물사전 2》, pp57~63, 인물과사상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