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트 힐베르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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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다. 이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는다.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다. 이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는다.


[[쿠르트 괴델|괴델]]의 결과로 어떤 공리체계의 무모순성의 증명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쿠르트 괴델|괴델]]의 결과로 어떤 <u>공리체계의 무모순성의 증명이 불가능함</u>을 알게 된다. 그러나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 참고 문헌 ==
* Reid, Constance. 《힐버트》. 이일해 역. 민음사.


== 명언 ==
== 명언 ==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lang|de|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인용문2|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br/>({{llang|de|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 참고 문헌 ==
* Reid, Constance. 《힐버트》. 이일해 역. 민음사.


[[분류:1862년 태어남|힐베르트, 다비드]]
[[분류:1862년 태어남|힐베르트, 다비드]]

2009년 4월 8일 (수) 15:50 판

다비드 힐베르트

다비드 힐베르트(독일어: David Hilbert, 1862년 1월 23일 오후 1시 ~ 1943년 2월 14일)는 독일의 수학자이다.

생애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오토 힐베르트와 마리아 힐베르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획득한다.

188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게 된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대학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π의 초월성을 증명한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Adolf Hurwitz)가 사강사로 부임하여,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된다.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다음해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간다.

1886년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Poincaré)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나게 된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교수자격을 얻는다.

1888년파울 고르단(Paul Gordan)을 만나 고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헬름홀츠, 바이어슈트라스, 코르네커등을 방문한다.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의 답을 담은 논문을 제출한다.

1892년 30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 eπ의 초월성에 대한 기존의 증명과는 다른 증명을 내 놓는다. 곧 뮌헨으로 떠난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된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음.

1895년 괴팅겐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보고서(Zahlbericht) 작성에 힘을 기울인다. 1897년 4월 자기 몫을 작성하지 못한 민코프스키와 별도로 수론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것으로 수학계의 명성을 얻는다.

1898년 ~1899년 겨울학기에 행한 기하학의 기초에 대한 강의를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를 발간한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나아가 한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무모순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며,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유명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23개를 제기한다.

1901년 이바르 프레드홀름(Ivar Fredholm)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에 몰두한다.

1902년 베를린으로 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킨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Waring)의 문제를 증명하여 수학계를 놀라게 한다. 1909년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한다.

1912년 적분 방정식에 관한 연구를 종합한 책을 발간한다. 이후 물리학을 수학과 같이 공리적 체계 위에 세우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15년 11월 아인슈타인일반 상대성 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얻는다.

1차 세계 대전후 브로베르(Brouwer)등의 직관주의에 대항하여 형식주의를 주장한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해 쾌유한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한다.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다. 이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는다.

괴델의 결과로 어떤 공리체계의 무모순성의 증명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80세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명언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독일어: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참고 문헌

  • Reid, Constance. 《힐버트》. 이일해 역.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