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에 대한 오해 목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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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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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고조선]]'''(古朝鮮)은 보편적으로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에서도 고조선이라 불렸다. 《삼국사기》의 위만조선조와 고조선조가 나뉜 것으로 보아 일연은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키 위해 고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ref> 《[[삼국유사]]》 1권 기이(紀異)편 고조선(古朝鮮)조. </ref>
* 오늘날 '''[[고조선]]'''(古朝鮮)은 보편적으로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에서도 고조선이라 불렸다. 《삼국사기》의 위만조선조와 고조선조가 나뉜 것으로 보아 일연은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키 위해 고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ref> 《[[삼국유사]]》 1권 기이(紀異)편 고조선(古朝鮮)조. </ref>

* 과연 조선이 [[탁실라]]에서 나온 말이라면 탁은 독어로 ''Tag'', 영어로는 ''Day'', 한문으로는 낮 ''주''이며 한글로는 닭이다. 따라서 탁신라가 주신이고 조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궤변은 과연 우리 학계에 받아들여 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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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 “고려” ==
== 국호 “고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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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위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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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때 강물을 이용해 적을 몰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물을 이용했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전투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물이 얕은 줄 알고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많았다.”라는 요지의 내용이 칠불사(七佛寺) 창건 설화로서 실려 있을 뿐이다.<ref>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25쪽. </ref>
* 고구려 [[을지문덕]]은 '''[[살수대첩]]''' 때 강물을 이용해 적을 몰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물을 이용했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전투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물이 얕은 줄 알고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많았다.”라는 요지의 내용이 칠불사(七佛寺) 창건 설화로서 실려 있을 뿐이다.<ref>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25쪽. </ref>

* '''[[백제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실제로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의자왕 치세를 기록한 [[19세기]] 이전의 모든 역사서에 몇 명인지 밝히지 않았다.<ref> 《한국사 새로 보기》, 52~60쪽. </ref>
* '''[[백제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실제로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의자왕 치세를 기록한 [[19세기]] 이전의 모든 역사서에 몇 명인지 밝히지 않았다.<ref> 《한국사 새로 보기》, 52~60쪽. </ref>

* '''[[백제 의자왕]]'''의 '''[[나이]]'''([[595]]에서 [[599년]] 사이 출생<ref name="소년한국일보"> {{뉴스 인용
* '''[[백제 의자왕]]'''의 '''[[나이]]'''([[595]]에서 [[599년]] 사이 출생<ref name="소년한국일보"> {{뉴스 인용
|저자 = 김용만
|저자 = 김용만

2009년 3월 18일 (수) 18:40 판

한국사의 오류와 진실(韓國史의 誤謬와 眞實)은 한국사에서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을 모아놓은 문서이다.

고대

  • 오늘날 고조선(古朝鮮)은 보편적으로 이성계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에서도 고조선이라 불렸다. 《삼국사기》의 위만조선조와 고조선조가 나뉜 것으로 보아 일연은 위만조선과 단군조선을 구분키 위해 고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
  • 과연 조선이 탁실라에서 나온 말이라면 탁은 독어로 Tag, 영어로는 Day, 한문으로는 낮 이며 한글로는 닭이다. 따라서 탁신라가 주신이고 조선이라고 볼 수 있다는 궤변은 과연 우리 학계에 받아들여 질 수 있겠는가?
  • 고구려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통치한 왕은 흔히 광개토대왕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최대 영토를 이룩한 왕은 문자명왕이다.[2] 문자명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손자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이루어놓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잘 구가하고 유지해 나갔다. 광개토대왕은 “땅을 넓힌 왕”이란 뜻이고, “넓은 땅을 통치한 왕”이라는 뜻은 아니다.
  • 고구려 을지문덕살수대첩 때 강물을 이용해 적을 몰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물을 이용했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는 전투 과정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물이 얕은 줄 알고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많았다.”라는 요지의 내용이 칠불사(七佛寺) 창건 설화로서 실려 있을 뿐이다.[3]
  • 백제 의자왕삼천궁녀를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만, 실제로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의자왕 치세를 기록한 19세기 이전의 모든 역사서에 몇 명인지 밝히지 않았다.[4]
  • 백제 의자왕나이(595에서 599년 사이 출생[5])와 관련하여 사극 등에서 의자왕이 너무 젊게 나와 시청자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6] 의자왕은 7세기에 태어났다고 여겨지는 흥수·성충·계백 등보다는 더 일찍 태어났다.
  •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그러한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조선 시대에도 역시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의 시원은 조선사편수회라는 주장이 있다.[7] 신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지 못했고, 이어 등장한 발해와도 통일하지 못했으므로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것은 사실이나 통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 가족이 늙으면 에 내다 버려 짐승의 먹이가 되게 만드는 고려장(高麗葬)은 한국의 장례 풍습이 아니다. 한국의 장례 풍속이 소개된 가장 오랜 문헌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로 살아 있는 사람을 버렸다가 매장했다는 내용은 없다. 또한 고대 한국에서 늙은이를 버렸다는 고려장 이야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역사 문헌에는 없고, 꾸며진 이야기인 소설이나 동화에만 등장하므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보기 힘들다. 다만 ‘고려장’이라는 어휘는 무덤을 뜻하는 말로 일상용어로서 쓰였다.[8][9]
  • 귀주대첩에서 강감찬(당시 71세)은 강물을 막았다가 터뜨려 요군(거란군)을 몰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강물과는 멀리 떨어진 평야의 전투이다. 《고려사》 내용에 따르면, 강물을 이용한 전투는 제3차 고려-요 전쟁의 첫 번째 전투인 흥화진 전투이다. 그리고 강물을 막았다 터뜨린 이유도, 당시는 겨울이라서 강물의 양이 적었으므로, 몰살시키려 했다기보다 혼란을 일으키려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또한 귀주대첩에서 고려군 10만에 요군(거란군) 20만 8천여 명이라는 말도 사실과 다르며, 이 역시 제3차 고려-요 전쟁 때의 병력 규모이지 귀주대첩 때의 병력 규모는 아니다. 귀주대첩 때의 승리 요인은 겨울인데 갑자기 남쪽으로부터 비바람이 몰아치자 그것을 이용해 남쪽으로부터 공격하였다고 한 데에 있다.[10]
  • 고려문익점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강남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서 몰래 들여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오해이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들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몰래 숨겨서 들여오지는 않았다. 또한 문익점의 강남 유배도 그가 공민왕과 덕흥군 사이에서 덕흥군을 지지한 일이 그를 반대한 일로 바뀌면서 빚어진 오해이다. 문익점의 공은 목화씨 유입과 목화 재배로 한반도 섬유 산업을 발전시킨 일이며, 그것을 후대 사람들이 치하하면서 “문익점의 목화 밀수설”과 같은 전설이 만들어졌다.[11]
  • 최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고려사》〈최영열전〉에 따르면, 최영이 16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죽을 무렵에 남긴 말, 곧 최영의 아버지가 남긴 말이다.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가사와는 다르다.[12]

조선

  • 함흥차사조선 태조 이성계가 죽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적어도 《조선왕조실록》에서 차사로 보내진 사람을 이성계가 죽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사를 태종 이방원이 보내지 않아 섭섭하다고까지 이성계는 말하였다.[13] 함흥차사 가운데 차사의 직분을 수행하다 죽은 사람은 박순, 송류(宋琉)이며, 모두 조사의의 난조사의 일파에게 붙들려 죽었다.
  • 흔히 세종(1397년생)은 태종의 셋째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 틀리다. 태종의 아들 가운데 양녕대군은 1394년, 경녕군은 1395년[14], 효령대군은 1396년에 태어났고, 세종은 그 다음에 태어났다. 정확히 말해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 독도라는 이름은 조선 세종 때부터 있던 말이 아니다. 적어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독도라는 말이 나타나 있지 않으며, 우산도(于山島)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15] 노래 〈독도는 우리땅〉의 가사는 사실과 다르다.
  • 흔히 황희청백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부정을 저지른 일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세종 12년(1430년) 음력 11월 24일 태석균(太石鈞)이 제주감목관(濟州監牧官)으로 있었을 때 말 천 마리가 떼죽음을 당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황희에게 뇌물을 바쳤으며, 그로 말미암아 황희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된 일이 그것이다.[16]
  • 흔히들 홍길동은 홍길동전에만 등장하는 상상의 인물로 많이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연산군 일기》에 나타난 홍길동(洪吉同)은 조선 연산군 시대 큰 도적이라고 불린 강도 무리의 수괴(首傀)이며, 실존 인물이다. 즉, 지금으로 말하면 범죄단체의 두목 정도였다. 후대에 홍길동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허균이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었는데, 그 주인공은 홍길동(洪吉童)으로 실존 인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 둘을 자주 착각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이다.[17]
  • 조선 후기에 당쟁이 벌어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무근이다. 정치적 이유로 당쟁이 격심했던 기간(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초기)인 약 50년 동안 79명이 죽었을 뿐이며, 다른 나라의 정변보다 훨씬 적은 수가 죽었다.[18]
  •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옥사했다는 말이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제5권 4과에서 처음 나왔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1905년 이전에 편찬된, 김정호에 대해 기록한 문헌에는 김정호가 옥에 갇혔다는 기록조차 없다.[19][20]
  • 한국에서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인 병원은 의사 앨런이 1885년에 세운 광혜원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877년 1월 일본이 해군 군의였던 야하라를 파견하여 부산에 세운 제생의원(濟生醫院)이다. 광혜원은 한국인이 한국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적인 병원이다.[21]

일제 강점기

  • 1919년 3월 1일3·1 운동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 낭독에 모두 참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애초에 처음 약속 날짜는 3월 3일이었으며, 약속 시간도 정오가 아닌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하였다. 실제 독립선언서 낭독은 정오(낮 12시)나 오후 2시가 아닌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이루어졌다.[22] 그러므로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라고 밝힌 〈삼일절 노래〉는 사실과 다르다.[23]
  • 송병준(노다 헤이지로(野田平次郞))은 창씨개명 제1호로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한 사람 제1호[24]이고, 창씨개명 제1호는 1880년 10월에 아사노 도진(淺野東仁)으로 개명한 이동인이다.[25]

현대

  • 북위 38도선은 소련이 요구하여 만들어진 분단선이 아니다. 소련은 당시에 북위 40도 이북만을 허용해도 좋다고 여겼고, 미국이 38도를 제의하자 받아들였을 뿐이다. 또한 애초에 미국은 4국 분할을 고려하였다.[28]
  • 해방 이후 신탁 통치는 소련의 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일관된 정책이었다. 당시 소련은 전쟁으로 파괴된 소련을 복구할 자원을 한반도에서 공급받기를 바랐을 뿐 정치적 지배는 고려하지 않았다.[29]

참고 자료

  • 《개화백경 6》 = 이규태. 《[이규태의 개화백경 6] 오로지 교육만이 살 길이라》. 조선일보사. ISBN 8973653083.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실록 친일파》 =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ISBN 8971990368. 
  • 《이것이 한국 최초》 = 김은신.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ISBN 9788985407359. 
  • 《한국사 새로 보기》 =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ISBN 89-7474-870-3. 
  •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 박은봉.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초 1쇄판. 서울: 책과함께. ISBN 978-89-91221-31-4. 
  •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 김삼웅.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초 2쇄판. 서울: 인물과사상사. ISBN 89-88410-91-2. 

주석

  1. 삼국유사》 1권 기이(紀異)편 고조선(古朝鮮)조.
  2. 김유철; 윤희면·최병도·승용기·최재삼. 《고등학교 역사부도》. 서울: 천재교육. 9쪽쪽. 
  3.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25쪽.
  4. 《한국사 새로 보기》, 52~60쪽.
  5. 김용만.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의자왕, 뛰어난 전략으로 신라와의 경쟁에서 앞서” (HTML) (한글). 소년한국일보. 2008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 한국방송 드라마 《삼국기》 참조.
  7. 《한국사 새로 보기》, 61~69쪽.
  8. 김수문 교사. “[왜냐면] 고려장은 없었다” (HTML) (한글). 한겨레. 2008년 9월 9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9. 이순우. '고려장' 개념, 일제가 처음 퍼뜨렸다?” (HTML) (한글). 오마이뉴스. 2008년 9월 9일에 확인함. 
  10.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19~125쪽.
  11.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26~136쪽.
  12.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12~117쪽.
  13. 이덕일·이회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초 10쇄판. 서울: 김영사. 160~168쪽쪽. ISBN 89-349-0359-7. 
  14. 전주이씨대동종약원. “경녕군” (HTML) (한글). 2008년 12월 15일에 확인함. 
  15.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17쪽.
  16. 세종실록》 50권, 12년(1430년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11월 24일(신유) 3번째 기사 : 사헌부에서 황희의 파면 추방을 건의하니 관직을 파면하다.[1]
  17.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47~152쪽.
  18. 《한국사 새로 보기》, 145~151쪽.
  19. 이상태. 《한국 고지도 발달사》. 서울: 혜안. 236~238쪽쪽. 
  20. 소준섭.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는 옥사하지 않았다〉. 《조선인물실록 1》. 서울: 도서출판 자작나무. 127~140쪽쪽. ISBN 8976762258. 
  21. 《이것이 한국 최초》, 55~57쪽.
  22. 《한국사 새로 보기》, 199~210쪽.
  23.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117쪽.
  24. 《개화백경 6》, 38~39쪽.
  25. 《실록 친일파》, 24~25쪽.
  26. 《실록 친일파》, 120쪽.
  27.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2》. 서울: 돌베개. 44~45쪽쪽. ISBN 9788971990124. 
  28. 《한국사 새로 보기》, 220~227쪽.
  29. 《한국사를 뒤흔든 위서》, 260~268쪽.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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