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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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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배경 ===
=== 가계 배경 ===
대중상의 출신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고구려의 장수로 전해진다. 그의 선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후에 [[고려]]로 귀순한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그를 시조로 하여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다.
걸걸중상의 출신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고구려의 장수로 전해진다. 그의 선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후에 [[고려]]로 귀순한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그를 시조로 하여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다.


=== 고구려 장수 ===
=== 고구려 장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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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건국 ===
=== 발해의 건국 ===
[[고구려]] 유민들은 대중상과 [[걸사비우]]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계속 고구려 영토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군대들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추격군과 큰 전투를 치른다. ([[천문령 전투]]) 대조영은 이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다.
[[고구려]] 유민들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계속 고구려 영토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군대들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추격군과 큰 전투를 치른다. ([[천문령 전투]]) 대조영은 이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다.


이후, 대조영은 도읍을 [[동모산]](東牟山)으로 정하고 국호도 [[발해]](渤海)로 하였다.<ref>{{서적 인용
이후, 대조영은 도읍을 [[동모산]](東牟山)으로 정하고 국호도 [[발해]](渤海)로 하였다.<ref>{{서적 인용

2020년 8월 14일 (금) 23:56 판

걸걸중상
본명 걸걸중상(乞乞仲象)
다른 이름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
사리걸걸중상(舍利乞乞仲象)
대사리걸걸중상(大舍利乞乞仲象)
별명 진국공(震國公)
시호 없음
출생일 생년 미상(生年 未詳)
출생지 고구려(高句麗)
사망일 몰년 미상(沒年 未詳)
사망지 만주(滿洲) 천문령(天門嶺)
관직 무신(武臣)
가문 영순 태씨(永順 太氏) 밀양 대씨(密陽 大氏)
부친 ?
모친 ?
배우자 시씨(時氏) 구당서 신당서 등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족보상 기록
자녀 고왕(高王) 대야발(大野勃)
종교 없음
주군 보장왕(寶臧王)
주요 참전 천문령 전투
기타 이력 고구려 부흥군 지도자
사당 ?

걸걸중상(乞乞仲象)은 고구려의 장수이자 고구려의 부흥을 이끈 지도자이다.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대야발 형제의 아버지이다. 대당 항쟁 때, 그는 속말말갈의 지도자 걸사비우와[1] 동맹을 맺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였으며, 측천무후로부터 진국공(震國公)에 봉작되었으며 이를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대조영 등과 함께 발해 건국을 주도했으나 발해가 건국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에서 시조로 받드는 인물이다.

생애

가계 배경

걸걸중상의 출신 배경은 알려진 것이 없다. 고구려의 장수로 전해진다. 그의 선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 후에 고려로 귀순한 대광현의 후손인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밀양 대씨 등은 그를 시조로 하여 가계 대수를 계산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

645년 제1차 고구려-당 전쟁 이후 당나라는 거의 매년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구려는 항상 당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고구려의 대막리지연개소문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간에 큰 권력 싸움이 일어났다.

결국 고구려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고, 이때 권력 싸움에서 진 연개소문의 장자인 연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해왔다. 667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이듬해인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에 따라 유민을 여러 지역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걸걸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당나라고구려 유민들을 여러곳으로 분산하여 끌고 갔는데, 걸걸중상 부자도 요서(遼西)의 영주(營州)로 끌려갔다. 한편, 북한 학계에서는 이를 부인하며 이 시기에 걸걸중상 세력이 따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696년 거란의 가한 이진충이 영주 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걸걸중상 부자는 이 때를 틈타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이후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로 이고 만주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활동하였다.

측천무후는 이들을 달래고자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에 봉하고, 말갈의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자 중랑장 섹구와 함께 거란족 출신의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이해고를 보내 반란을 일으킨 거란족을 토벌하고, 탈출한 고구려 유민을 추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이해고 대군의 공격을 받고 걸사비우와 함께 사망했다. 혹은 걸사비우 전사 이후 고구려 유민과 남은 말갈족을 이끌고 저항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사망 당시 그의 정확한 연령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7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된다.

발해의 건국

고구려 유민들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민들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계속 고구려 영토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의 군대들을 이끌고 천문령에서 당나라 이해고 추격군과 큰 전투를 치른다. (천문령 전투) 대조영은 이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다.

이후, 대조영은 도읍을 동모산(東牟山)으로 정하고 국호도 발해(渤海)로 하였다.[2]

성씨와 이름

걸걸중상의 이름을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 대(大)는 성, 사리(舍利)는 벼슬, 중상이 이름이라는 설(오대회요)
  • 걸걸중상까지의 성씨는 사리(舍利)였으나 그 아들인 대조영부터 성을 대(大)로 바꾸어 썼다는 설(발해국지)
  • 당 고종 시기의 장수인 사리아박(舍利阿搏)의 예를 들며 사리부(舍利部)의 추장족(酋長族) 사리씨(舍利氏)가 대(大)씨의 본래 성씨라는 설(통지(通志))

이 외에도 여러 설과 논란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논란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관계에 대해서 중국과 한국, 일본의 학자들이 여러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걸걸중상이 대조영과 무관한 사리라는 관명을 가진 거란인 호족이라는 학설[3], 걸걸중상과 대조영은 부자 사이로, 고구려에 귀화 내지 복속된 말갈인이라는 학설[4][5], 《구당서》에서 걸걸중상은 대조영에게 동일인물로 둔갑되었고 이런 즉, 걸걸중상은 고구려 종족인 대조영의 말갈식 이름으로, 걸사비우의 말갈과 우호적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학설[6] 등이 있다.

가계

부인의 이름과 성씨는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발해고에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 대씨와 태씨 측 기록에 의하면 걸걸중상의 부인은 시씨(時氏)라 한다.

걸걸중상이 등장한 작품

같이 보기

각주

  1. 김기흥(2011),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33, pp.446, 450~451.
  2. 서병국 (2005년 1월 25일). 《발해제국사 (서해역사책방 11)》. 서해문집. 416쪽. ISBN 8974832429.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3. 井上秀雄 (1976년 1월). 《東アジア民族史 2-正史東夷伝》. 東洋文庫283. 平凡社. 426쪽. ISBN 978-4582802832. 
  4. 송기호 (1995). 《渤海政治史硏究》. 一潮閣. 43쪽. ISBN 9788933701775. 
  5. 森安孝夫 (1982). 《渤海から契丹へ》.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7. 学生社. 73쪽. 
  6. 김기흥(2011), 발해의 종족적 연원, 동북아역사논총-33, 446~447쪽
발해 지도자
668년? ~ 698년
후임
발해 고왕
(발해 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