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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후 : [[알영부인]](閼英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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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 : [[운제부인]](雲帝夫人)
** 왕비 : [[운제부인]](雲帝夫人)
*** 장남 : 일지 갈문왕(葛文王)
*** 장남(?) : 박대서지(朴大西知)
*** 차남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 장남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 손자 :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 손자 : [[일성 이사금]](逸聖泥師今)
**** 손자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손자 : [[파사 이사금]](婆娑尼師今)
*** 3남 : [[박나로]](朴奈老)
*** 차남 : [[박나로]](朴奈老)
*** 장녀 : [[아효부인]](阿孝夫人), 제4대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의 왕후
*** 장녀 : [[아효부인]](阿孝夫人), 제4대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의 왕후



2020년 7월 13일 (월) 02:49 판

신라 남해차차웅
新羅 南解次次雄
신라의 2대 국왕
재위 4년-24년
전임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후임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부왕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이름
박남해(朴南解)
이칭 민해(愍海)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신상정보
출생일 기원전 50년
출생지 ?
사망일 24년
사망지 ?
왕조 신라(新羅)
부친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모친 알영부인(閼英夫人)
배우자 운제부인(雲帝夫人)
종교 불교(佛敎)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기원전 50년~24년, 재위 4년~24년)은 신라의 2대 국왕으로, 혁거세왕알영부인의 적자이다. 이름은 남해(南解), 다른 이름은 민해(愍海)이다. 그의 칭호에 대하여는 국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설이 있다.

왕호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니, 이것은 존장의 칭호로서 오직 이 임금에게만 칭한 것이다" 라고 전한다. "차차웅"이라는 왕호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김대문을 인용하여, "차차웅 혹은 자충(慈充)은 무당을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에, 그를 외경해 마침내 존귀한 어른을 일컬어 자충이라고 하게 되었다." 고 전하는 바, 당시까지 신라샤머니즘의 부족사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여 있었다고 해석된다.

치세

6년(즉위 3년) 음력 1월에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묘(廟)를 세웠고, 8년(즉위 5년)에 석탈해를 맏사위로 받아들였고, 10년(즉위 7년)에는 그를 대보(大輔)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다. 남해 차차웅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그릇되이 왕위에 있어, 두려움이 마치 냇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와서 침범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적(賊)이 우리가 국상(國喪)을 당하였음을 다행으로 여겨서 망령되게 군사를 이끌고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그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적이 잠시 후에 물러갔다. 14년(즉위 11년)에 가 민가를 노략하여 6부의 병사들을 내보내 격퇴하였다.

18년, 경주에 가뭄이 들었다. 음력 7월에 메뚜기떼의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창고의 곡식을 풀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고구려에 복종하는 일곱 나라가 와서 투항하였다.(월 미상) 19년(즉위 16년)에 북명(北溟)에서 예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 차차웅에게 바쳤다. 《삼국지》〈권30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條)에 "그 나라 인장에는 '예왕지인'이라 한 글귀가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라에서 부여가 그리 멀지 않고 가까운 이름이었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는 당시 신라의 세력에 비추어 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1]

24년(즉위 21년)에 죽어 경주 사릉원(蛇陵園) 안에서 장사지냈다.

가계

박씨사소부인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
남해 차차웅

남해 차차웅이 등장한 작품

참고

각주

  1. 신채호저, 《조선상고사》<제4편 제4장 3. 신라의 건국>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 '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 (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待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참고 문헌

전 대
혁거세 거서간
제2대 신라 국왕
4년 ~ 24년
후 대
유리 이사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