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브륀티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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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브륀티에르는 미국으로 강연을 하러간다. 브륀티에르는 190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1897년 브륀티에르는 미국으로 강연을 하러간다. 브륀티에르는 190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브륀티에르는 본질적으로 17세기 이성주의적 고전주의의 지지자였으며, 그런 고로 동시대 문학 조류들과는 가끔은 심할 정도로 반목하였다. 브륀티에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특히 플로베르의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하여) [[졸라]]에 반대하는 (<자연주의 소설>에서)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1892년에는 [[샤를 보들레르]]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에 반대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브륀티에르는 당대의 주류였던 과학만능주의에도 적대적이였는데, 이 같은 이유로 그는 동시대보다 [[옥타브 미라보]]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시대에 더 다가갔다.
브륀티에르는 본질적으로 17세기 이성주의적 고전주의의 지지자였으며, 그런 고로 동시대 문학 조류들과는 가끔은 심할 정도로 반목하였다. 브륀티에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특히 플로베르의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하여) [[졸라]]에 반대하는 (<자연주의 소설>에서)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1892년에는 [[샤를 보들레르]]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에 반대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브륀티에르는 당대의 주류였던 과학만능주의에도 적대적이였는데, 이 같은 이유로 그는 [[옥타브 미리보]]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시대로 더 다가갔다.


반드레퓌스파였으나,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그는 1886년 <르뷔 데 되 몽드>에서 반유대주의자 [[에두아르 드뤼몽]]이 쓴 <프랑스 유대인>을 강하게 반박했다) 브륀티에르는 1898년 드레퓌스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드레퓌스 문제에 관하여 전공 영역을 벗어나서 논하는 것을 비난했다. 브륀티에르의 친구이자 드레퓌스파이던 플로르 생제는 몇 차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브륀티에르의 입장을 바꾸고자 시도했다.
반드레퓌스파였으나,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그는 1886년 <르뷔 데 되 몽드>에서 반유대주의자 [[에두아르 드뤼몽]]이 쓴 <프랑스 유대인>을 강하게 반박했다) 브륀티에르는 1898년 드레퓌스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드레퓌스 문제에 관하여 전공 영역을 벗어나서 논하는 것을 비난했다. 브륀티에르의 친구이자 드레퓌스파이던 플로르 생제는 몇 차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브륀티에르의 입장을 바꾸고자 시도했다.

2020년 7월 11일 (토) 05:30 판

페르디낭 브륀티에르
작가 정보
출생Ferdinand Vincent-de-Paul Marie Brunetière
1849년 7월 19일
툴롱
사망파리
1906년 12월 9일
직업문학 비평가
서명

페르디낭 뱅상드폴 마리 브륀티에르(Ferdinand Vincent-de-Paul Marie Brunetière)는 프랑스문학 비평가이자 문학사가로, 1849년 7월 19일 툴롱에서 태어나 1906년 12월 9일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해군 감찰관(inspecteur général)의 아들로 태어난 브륀티에르는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고향인 프로방스와 멀리 떨어진 퐁트네르콩트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된다. 브륀티에르는 리세 티에르드마르세유의 우등생이었다. 그는 1869년 고등사범학교 입시를 실패하여, 1870년에는 학원 강사가 된다. 브륀티에르는 1875년부터 <르뷔 데 되 몽드>의 편집일을 하기 시작하여, 1877년부터 1893년까지는 편집 비서가 되었고, 이후 1893년에는 국장이 되었다. 브륀티에르는 작가 폴 부르제와 가깝게 지낸다. 1886년 고등사범학교 부교수가 된 브륀티에르는 188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뒤이어 그는 소르본 교수가 된다.

1893년 6월 8일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된 브륀티에르는 28번 의석의 존 르무안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1894년 2월 15일 폴-가브리엘 도손빌에 의하여 입회를 허락받는다.

1897년 브륀티에르는 미국으로 강연을 하러간다. 브륀티에르는 190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브륀티에르는 본질적으로 17세기 이성주의적 고전주의의 지지자였으며, 그런 고로 동시대 문학 조류들과는 가끔은 심할 정도로 반목하였다. 브륀티에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특히 플로베르의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하여) 졸라에 반대하는 (<자연주의 소설>에서)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1892년에는 샤를 보들레르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에 반대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브륀티에르는 당대의 주류였던 과학만능주의에도 적대적이였는데, 이 같은 이유로 그는 옥타브 미리보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시대로 더 다가갔다.

반드레퓌스파였으나,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그는 1886년 <르뷔 데 되 몽드>에서 반유대주의자 에두아르 드뤼몽이 쓴 <프랑스 유대인>을 강하게 반박했다) 브륀티에르는 1898년 드레퓌스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드레퓌스 문제에 관하여 전공 영역을 벗어나서 논하는 것을 비난했다. 브륀티에르의 친구이자 드레퓌스파이던 플로르 생제는 몇 차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브륀티에르의 입장을 바꾸고자 시도했다.

브륀티에르는 다윈의 이론에 영향받은 문학 장르 진화론을 옹호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1909년 브륀티에르에게 장레노 상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