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린: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17번째 줄: 17번째 줄:


== 생애 ==
== 생애 ==
1543년 명나라 광동성(廣東省) 소주부(韶州府) 옹원현(翁源縣) 용전포(龍田鋪)(현재 광둥성廣東省 샤오관시韶關市 웡위엔현翁源縣 저우피진周陂鎭 롱톈촌龍田村)에서 태어났다.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출사하였다. [[1597년]]([[조선 선조|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5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廣東) 봉해졌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萬曆) 이순신에게 [[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8가지 선물들]](영패(令牌), 도독인(都督印), 귀도(鬼刀), 참도(斬刀), 곡나팔(曲喇叭),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 남소령기(藍小令旗))을 보내도록 하는 일조를 했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총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정22년(1543) 명나라 광동성(廣東省) 소주부(韶州府) 옹원현(翁源縣) 용전포(龍田鋪)(현재 광둥성廣東省 샤오관시韶關市 웡위엔현翁源縣 저우피진周陂鎭 롱톈촌龍田村)에서 태어났다.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출사하였다. 가정41년(1562), 광동성 조주(潮州) 영덕(英德) 등지에 수만 명의 평민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린은 가서 진압하였고, 광동수비(廣東守備) 승진하였다. 만력(萬曆) 초기, 광동성 고요(高要) 게양(揭陽) 산인(山人) 종월천(鍾月泉) 반란을 진압하였다. 진린은 모략이 있고 병사 통솔력이 뛰어났으나, 탐욕스러워서 파직되었다. 만력21년(1593) 부총병(副總兵)에 임명되어 남오도(南澳島)에 주둔하였다.


=== 임진왜란 시기 ===
전란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종되고, 그의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 시|난징]]으로부터 배를 타고 [[조선]]로 와서 [[남해군]]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1597년]]([[조선 선조|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5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萬曆帝)가 이순신에게 [[통영 충렬사 팔사품 일괄|8가지 선물들]](영패(令牌), 도독인(都督印), 귀도(鬼刀), 참도(斬刀), 곡나팔(曲喇叭),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 남소령기(藍小令旗))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총으로 추정하고 있다.

=== 전쟁 이후 ===
전란이 끝난 후 호광총병(湖廣總兵)에 임명되었고, 만력27년(1599) 명 조정은 진린의 공적을 인정하였다. 이후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파주(播州)(오늘날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일대) 묘족(苗族)의 난을 진압하였다.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되었다.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난징 시|남경]](南京)으로부터 배를 타고 [[조선]]로 와서 [[남해군]]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康津)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海南縣)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 관련 작품 ==
== 관련 작품 ==

2020년 7월 10일 (금) 17:33 판

진린
陳璘
별명 작위광동백(廣東伯)
출생지 명나라 광둥 성 사오관
사망지 명나라 광둥 성 사오관
본관 광동(廣東)
친척 손자 진영소(陳泳素)
복무 명나라 군사 수군
복무기간 1562년 ~ 1598년
최종계급 명나라 수군 어위도총관
주요 참전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타 이력 사후 태자소보(太子少保) 추증

진린(陳璘, 1543년 ~ 1607년)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출신 무관(武官), 장군(將軍), 제독(提督)이다.

생애

가정22년(1543) 명나라 광동성(廣東省) 소주부(韶州府) 옹원현(翁源縣) 용전포(龍田鋪)(현재 광둥성廣東省 샤오관시韶關市 웡위엔현翁源縣 저우피진周陂鎭 롱톈촌龍田村)에서 태어났다. 1562년 명나라 관직에 출사하였다. 가정41년(1562), 광동성 조주(潮州)와 영덕(英德) 등지에 수만 명의 평민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린은 가서 진압하였고, 광동수비(廣東守備)로 승진하였다. 만력(萬曆) 초기, 광동성 고요(高要)와 게양(揭陽) 및 산인(山人) 종월천(鍾月泉)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진린은 모략이 있고 병사 통솔력이 뛰어났으나, 탐욕스러워서 파직되었다. 만력21년(1593) 부총병(副總兵)에 임명되어 남오도(南澳島)에 주둔하였다.

임진왜란 시기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도독(前軍都督府都督)으로서 5천 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자 점차 이순신에게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萬曆帝)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영패(令牌), 도독인(都督印), 귀도(鬼刀), 참도(斬刀), 곡나팔(曲喇叭),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 남소령기(藍小令旗))을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전쟁 당시 사용했던 무기는 총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 이후

전란이 끝난 후 호광총병(湖廣總兵)에 임명되었고, 만력27년(1599) 명 조정은 진린의 공적을 인정하였다. 이후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파주(播州)(오늘날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일대) 묘족(苗族)의 난을 진압하였다.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되었다.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남경(南京)으로부터 배를 타고 조선로 와서 남해군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康津)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海南縣)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광동 진씨(廣東 陳氏)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

관련 작품

드라마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