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뉴턴 알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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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학사 <br/> 마이애미 의과대학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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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직 = 장로교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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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직 = 외교관 <br/> 외과 의사<br/> 미국 공화당 당무위원
| 전직 = 외교관 <br/> 외과 의사<br/> 미국 공화당 당무위원<br>대한제국 외무아문 자문관
| 종교= 개신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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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자=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
| 배우자= 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

2020년 6월 30일 (화) 08:39 판

안연
원어이름安連
Horace Newton Allen
개인정보
출생1858년 4월 23일
미국의 기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
사망1932년 12월 11일(1932-12-11) (향년 74세)
미국의 기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노환으로 사망
교파개신교(장로회)
배우자프랜시스 앤 앨런(Frances Ann Allen)
가족자녀는 슬하 1남 1녀
재직장로교 선교사
전직외교관
외과 의사
미국 공화당 당무위원
대한제국 외무아문 자문관
학력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 학사
마이애미 의과대학 학사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년 4월 23일 ~ 1932년 12월 11일)은 미국의 조선 주재 외교관, 선교사로, 한국어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생애

선교사가 되다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를 나온 후 마이애미 의과대학교를 나왔고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의료 선교사중국 상하이에 갔다가 다시 장로회 본부에 조선행을 요구하여 1884년 조선에 왔다. 당시 조선국 주재 미국 공사 루시어스 푸트는 "아직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조선 땅에서 선교사 신분을 내세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차라리 무급의사가 더더욱 안전하다"라고 주장하고 앨런을 '미국공사관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에 임명했다. 조선에 도착한 지 3개월 뒤 갑신정변중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빠진 민영익을 수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중원(처음에는 광혜원이라 함)의 설립과 함께 왕실의 의사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1885년 고종은 최초의 서양 병원광혜원을 세우고 그로 하여금 서양 의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조선과의 인연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의 고문으로 미국에 가서 청나라의 간섭을 규명하고 독립국 사신의 체면을 유지하게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의 조선의 처지를 국무성에 밝혔다. 1890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어 외교 활동을 했고, 총영사·대리 공사 등을 지냈다.

1892년 이래 <코리안 레포지토리>를 간행하고, 1897년 전차·전등 등에 관한 설치권을 미국에 넘겨 주었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 조선 지부를 결성하여 회보를 발행하는 등 문화 발전에 공로가 있었다. 1902년부터 《한국 위보》를 간행했다. 1904년 고종으로부터 훈 1등과 태극 대수장을 받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남은 생애를 보냈다.

평가

한국의 의학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는 하나, 식민주의적 한국의 이권침탈에 안내 역할을 한 정치적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브란스 병원의 설립자 “앨런이 ‘친한적 인물’이 결코 아니다”며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은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1] 알렌은 1885년 4월 제중원이 만들어진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결과,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을 직접 획득해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겼고, ‘노다지(no-touch)’라는 말을 만들어낸 운산금광채굴권은 40년간 총 900만 톤의 금광석을 채굴해 5600만 달러의 수익을 미국에 건네줬다. 또한 아관파천을 주선해 친미세력이 대거 등용된 뒤에는 경인철도부설권을 따냈는데 두달 만에 일본에 넘기면서 약 200만 원의 차익을 챙겼다. 실제로 앨런선교사조선에 입국한 초기부터 조선 광산의 매장량, 위치 등을 조사했다. 그 광산탐사 보고서를 토대로 평북지방의 운산금광이 노다지 금광인 것을 확인했고, 그 채굴권을 미국회사에 넘겨주도록 조선 왕실에 요청했다. 또한 미국인 회사들이 조선 관료와 민간인들과 마찰을 겪을 때마다 앨런은 자국민의 권리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 때문에 한미외교관계사 연구가인 손정숙앨런을 ‘미국적’인 미국 외교관이라고 평가했다.[2] 또한, 하와이 이민자 모집 과정에서 사탕 수수 농장의 관리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인내심이 많고, 부지런하며, 유순한 인종이라 그들이 갖고 있는 오랜 복종의 습성 때문에 지배하기가 쉽다. 조선인들은 중국인에 비하면 교육하기가 쉬운 족속이라.”고 저평가를 했다.

이어 친미파 세력들이 결집력을 상실하자 미국의 이권에 호의적이었던 친일파 세력들을 간접적으로 후원했고, 일본조선지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에는 일본친미파 인사들의 명단을 넘겨주었고 이들에게 일본에 협력을 권고하였다는 점을 자부했다고 알려졌다.[3] 이와 함께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 7명에게 주어진 의사면허 발급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의 제4대 병원장이던 에비슨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협조를 구했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4]

관련 문화재

저서

한국이야기(Korean Tales, Horace Newton Allen,1889)[5]

같이 보기

각주

  1. 김기정.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 초 한미관계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3, p.212, 222
  2. 손정숙. “알렌, 미국의 이권수호에 앞장선 미국 외교관”, 《내일을 여는 역사》, 2006, p.130-141
  3. 강연석 (1999년 9월 15일). “앨런은 순수 의료 선교사가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2011년 8월 12일에 확인함. 
  4. 앨런 이그레이 클라크. “에비슨 전기: 한국 근대 의학의 개척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9, p.287-288
  5. (구텐베르크 프로젝트 -Korean Tales 퍼블릭도메인)https://www.gutenberg.org/files/55539/55539-h/55539-h.htm
전임
(초대)
제1대 제중원 원장
1885년 3월 ~ 1887년 9월
후임
존 헤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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