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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호 ==
== 국호 ==
궁예는 건국 직후 국호를 '''고려'''(高麗)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다. 궁예는 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 (태봉)|무태]](武泰)로 하였다. [[905년]]에는 철원(鐵原)으로 천도했으며, [[911년]] 국호는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재변경하였다. 왕건은 역성혁명 이후 국호를 '''[[고려]]'''로 환원하였다. 현대에는 태봉을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부르기도 한다.
궁예는 건국 직후 국호를 '''고려'''(高麗, '''후고구려'''(後高句)라 통칭.)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다. 궁예는 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 (태봉)|무태]](武泰)로 하였다. [[905년]]에는 철원(鐵原)으로 천도했으며, [[911년]] 국호는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재변경하였다. 왕건은 역성혁명 이후 국호를 '''[[고려]]'''로 환원하였다. 현대에는 태봉을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부르기도 한다.


== 역사 ==
== 역사 ==

2020년 6월 17일 (수) 07:02 판

고려
(901년~904년)
마진
(904년~911년)
태봉
(911년~918년)
高麗
摩震
泰封

901년~918년
915년의 한반도. 황색이 태봉.
915년의 한반도. 황색이 태봉.
수도송악(901-905)
철원(905-918)
정치
정치체제미륵 신앙 기반의 신권군주제
국왕
901년 ~ 918년

궁예
인문
공용어중세 한국어
종교
국교불교
기타
현재 국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고려(高麗)-마진(摩震)-태봉(泰封)은 삼국 시대를 구성하던 나라로, 901년에 궁예를 국왕으로 하고 송악을 도읍삼아 건국하였다. 불교미륵 신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폭정을 일삼았으며 결국 918년에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축출되면서 붕괴되었다.

국호

궁예는 건국 직후 국호를 고려(高麗,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통칭.)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여 민심을 얻기 위함이었다. 궁예는 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무태(武泰)로 하였다. 905년에는 철원(鐵原)으로 천도했으며, 911년 국호는 태봉,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재변경하였다. 왕건은 역성혁명 이후 국호를 고려로 환원하였다. 현대에는 태봉을 후고구려(後高句麗)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

궁예892년 북원(北原)[1]의 적괴였던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고 강원도 각지를 공략하는 한편 수년 간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하고 임진강(臨津江)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 기반을 닦아 898년에는 송악군(宋岳郡 : 開成)에 웅거하여 자립의 기초를 세웠다.

이 무렵 왕건(王建)이 궁예의 휘하로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태수(鐵圓太守)의 벼슬을 주고 북원양길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 당시 궁예신라에게 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으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새 국호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旦)의 약자이며, 마하는 산스크리트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중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 '동방의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즉, 마진은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뜻하는 국호이다.

905년 국도(國都)를 철원으로 옮기고 성책(聖冊)이라 개원(改元)하였다가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政開)라고 고쳤다. 궁예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견훤(甄萱)의 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珍島)·고이도성(皐夷島城)을 격파하고 금성을 점령하였다.(금성 싸움) 이리하여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고, 오행사상(五行思想)을 믿어 신라의 금덕(金德)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水德)으로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를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불심을 따르고 불교사상을 통하여 국가를 통치하려 하였다.

궁예의 호족 세력 견제와 민중 지향적 정치 방향에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리게 된 측근자들과 호족은 전전긍긍하게 되어 마침내 918년 (천수(天授) 원년)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 측근 4인이 의논하여 호족 세력의 대표격인 왕건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는 김순식이 있는 명주성(강릉)으로 도피하는 도중 부양(斧壤)[2]에서 왕건의 추격군을 만나 퇴로가 차단당하고 추격군과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 자결하였다. 삼국사기에는 해를 입어 죽었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에서 맞아 죽었다고 되어 왕건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야사와 전설에는 왕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하였고 백성들도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육당 최남선은 풍악기유에서 궁예는 지방 호족들에게 맞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쫒겨났다고 언급하였다.

이후

궁예는 원래 승려 출신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도 모든 기거동작을 불교식으로 하여 그가 남긴 석등롱(石燈籠)이나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일 등은 뒤에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다. 태봉 도성 터는 현재 철원군 비무장지대 일대에 대부분 남아있어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조사가 어려운 실정이다.

태봉의 역대 국왕

  묘호 시호 능호 재위 비고
중국에서 내린 시호 후고구려에서 올린 시호
1 - - - - 일목대왕(一目大王) - 궁예 弓裔 - - 901년~918년

각주

  1. 현재의 강원도 원주시.
  2. 현재의 강원도 평강군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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