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서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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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도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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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 = 429,353명
| 인구 = 429,353명

2019년 12월 11일 (수) 19:56 판

달성 서씨 (達城 徐氏)
관향대구광역시
시조서진(徐晋)
집성촌경상남도 양산시·창원시·고성군·창녕군
경상북도 칠곡군·상주시·안동시·포항시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주요 인물서균형, 서변, 서정주, 서중호, 서영훈, 서병호, 서종철, 서정화, 서석재, 서정돈, 서석구, 서상목,서승환, 서영교, 서용교, 서배준, 서지수
인구(2000년)429,353명

달성 서씨(達城徐氏)는 대구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시조 서진(徐晋)의 출생년도는 대략 서기 1260년에서 1280년 사이로 추정되며 부인은 초계 주씨였다.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등을 역임하면서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그래서 후손들이 이천 서씨에서 분관하여 본관을 달성으로 하였다. 묘소는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달성공원(達城公園)에 있다.

인물

달성서씨는 시조인 서진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에 오르고 달성군에 봉해진 이후 아들 서기준과 손자 서영까지 3대에 걸쳐 달성군에 봉해졌다. 이후 증손인 서균형(徐鈞衡)이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간관으로 있으면서 신돈(辛旽)을 탄핵하고,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의 아들 서침(徐沈)은 정몽주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조선 개국 이후 전의소감(典醫少監)을 지냈다.

서침이 달성에 살고 있을 때 조선 세종조에서 달성을 나라의 관방으로 쓰겠다며 거두어 들이고자 하며 그 보상책을 논하자 서침이 보상받기를 사양하고 그 대신 대구 부민들이 관청에 바치는 적모의 이자를 한 석당 닷되씩을 감해 줄것을 주청하니 조정에서 특별히 허락하여 대구 부민들이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받았다. 서침의 박시제중(博施濟衆)에 감복(感服)한 대구 사림(士林)들이 1665년에 대구에 구암서원을 건립하고 서침을 봉안하여 매년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고 달성은 달성공원으로 바뀌어 대구 시민들의 도심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서침은 3형제를 두었는데, 그 중 장남 서문한(徐文翰)은 승사랑으로 광흥창 부승을 거쳐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서문간(徐文幹)도 중시에 올라 현감을 역임했으며, 3남 서문덕(徐文德)은 이조정랑과 만경현감을 지냈다. 또 대사간이었던 서충(徐衷)의 증손인 서한정(徐翰廷)은 세종 때 진사로 태학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소백산 기슭에 은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응시(徐應時)는 중봉 조헌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으며, 서인충(徐仁忠)은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김상헌과 함께 화의를 반대했다. 또 서수천(徐壽千)은 이순신 막하에서 선봉수문장으로 임명되었다.

근현대 들어 구한말에는 시서화에 능해 팔능(八能)이라 불렸던 서병오(徐丙五)가 있으며,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서상일(徐相日)과 총독부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된 서상한(徐相漢) 형제가 유명하다. 또 사헌부 감찰 서목렬(徐穆烈)의 아들 서재승(徐在承)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영주 근방에서 활약하였다.[1]

과거 급제자

달성 서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6명을 배출하였다.

인구

  • 1985년 94,873가구, 398,363명
  • 2000년 132,270가구 429,353명
  • 2015년 407,431명

집성촌

항렬자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