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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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발단과 의문적 결말 ==
== 사건의 발단과 의문적 결말 ==
=== 김형욱의 월권 득세와 실각 ===
=== 김형욱의 월권 득세와 실각 ===
김형욱은 육군 중령 시절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박종규]](朴鐘圭, 1930~1985) 육군 소령· [[차지철]](車智澈, 1934~1979) 육군 대위 등과 함께 가담하여 그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3년 7월, 제4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한 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을 맡은 [[김형욱]](金炯旭, 1925~1979)은 재임 6년 기간 동안 [[박정희]](朴正熙)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일권]](丁一權, 1917~1994)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 부장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가차 없이 공격으로 응징 처리하였다. 그 와중 1969년 당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이만섭]](李萬燮, 1932~2015)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만섭]]이 제출한 이 건의안을 수리하여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부장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김형욱은 육군 중령 시절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에 [[박종규 (1930년)|박종규]](朴鐘圭, 1930~1985) 육군 소령· [[차지철]](車智澈, 1934~1979) 육군 대위 등과 함께 가담하여 그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3년 7월, 제4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한 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을 맡은 [[김형욱]](金炯旭, 1925~1979)은 재임 6년 기간 동안 [[박정희]](朴正熙)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일권]](丁一權, 1917~1994)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 부장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가차 없이 공격으로 응징 처리하였다. 그 와중 1969년 당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이만섭]](李萬燮, 1932~2015)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만섭]]이 제출한 이 건의안을 수리하여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부장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 곁가지 신세 전락한 김형욱의 국외 망명 ===
=== 곁가지 신세 전락한 김형욱의 국외 망명 ===

2019년 11월 27일 (수) 19:12 판

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金炯旭 拉致 暗殺 事件, 혹은 김형욱 실종 사건(金炯旭 失踪 事件))은 1979년 10월 7일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준장 김형욱(金炯旭) 前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돼 의문을 남긴 채 암살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과 의문적 결말

김형욱의 월권 득세와 실각

김형욱은 육군 중령 시절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 1917~1979)가 주도한 5·16 군사 정변박종규(朴鐘圭, 1930~1985) 육군 소령· 차지철(車智澈, 1934~1979) 육군 대위 등과 함께 가담하여 그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냈고 1963년 7월, 제4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한 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김형욱(金炯旭, 1925~1979)은 재임 6년 기간 동안 박정희(朴正熙)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일권(丁一權, 1917~1994)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 부장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에게는 모두 가차 없이 공격으로 응징 처리하였다. 그 와중 1969년 당시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이만섭(李萬燮, 1932~2015)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형욱 중앙정보부 부장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만섭이 제출한 이 건의안을 수리하여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부장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곁가지 신세 전락한 김형욱의 국외 망명

이후 김형욱(金炯旭) 前 중앙정보부 부장은 1969년 중앙정보부 부장 직위에서 물러난 뒤 1971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듬해 1972년 한국골프협회 회장도 겸직하였다.

그렇지만 김형욱은 그 당시에도 아직 월권 행위 관련 등의 이유로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의 신임을 잃고 1972년 유신 선포가 되며 국회가 해산되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직위가 박탈되었으며 결국 김형욱은 이듬해 1973년 자유중화민국 타이완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형욱 암살 작전

김형욱 암살 기도 작전의 전모

그 후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1977년 당시 박동선(朴東善, 1935~ ) 코리아 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두하여 박정희 정권의 비밀스런 사건들을 폭로하였다. 하지만 그에 멈추지 않은 채 김형욱은 곧이어 일본에서 회고록을 발표하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당시 제8대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 1926~1980)에게 김형욱을 없애라고 지시하였다.

엇갈려버린 상반성 증언

그러나 다른 의견을 여담에 포함하자면, 1979년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全斗煥, 1931~ , 훗날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 당시 육군 소장이 1979년 10·26 사건 당시 김재규를 강도 높게 조사했지만 김형욱에 관한 말은 한마디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姜信玉, 1936~ , 훗날 민주자유당 국회의원) 등도 같은 증언이었는데 김경재(金景梓, 1942~ , 훗날 평화민주당 국회의원)가 쓴 김형욱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가 내린 암살 관련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김재규와 이상열이 합동 작전 성공과 동시에 폭압 증발 처치한 김형욱 납치 암살 작전

여하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김형욱을 없애라 지시한 대통령 박정희의 지령이 내려진 그 와중 1979년 10월 1일, 미국에 있던 김형욱은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 윤일균(尹鎰均, 1926~2017)으로부터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통보를 받고 1979년 10월 4일, 파리로 갔다가 1979년 10월 7일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공작원으로 보낸 중앙정보부 연수생 3명에게 납치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 이상열(李相悅, 1929~2006)도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의 사주를 받고 현장 지휘 및 방조한 것이 드러났다.

사건의 결말과 의문적 미궁

그렇지만 이렇게 김재규의 사주를 받은 이상열이 사건 현장 지휘를 하므로써, 김재규가 밀파한 중앙정보부 연수생 출신 공작원 3명과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 이상열의 사주를 받고 보내어진 프랑스인 공작원 2명, 이렇게 5명의 공작원들에게 납치 암살된 김형욱이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정확히 암살되었는지는 아직도 미지수이다.

거기다가 이 사건이 발생한지 22일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에는 김형욱 사건에 개입했던 김재규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 실장을 사살하는 10·26 사건을 일으키니 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이라는 이 사건은 더더욱더 사건 관련의 미지수가 번지어 있는 대한민국의 표본적 미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유신 후반 당시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며 마찰을 빚다가 제8대 중앙정보부 김재규의 꾐과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 이상열의 농간에 의하여 1979년 10월 7일을 기하여 파리에서 의문점을 남긴 채 납치 암살된 김형욱에게는 1982년 6월 4일을 기하여 서울가정법원에서 1차 사망 선고가 내려졌고 1984년 10월 8일을 기하여 서울고등법원에서 2차 사망 선고가 내려졌으며 1990년 10월 22일을 기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도 3차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김형욱 납치 암살 사건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였던 이상열김형욱 납치암살사건의 유일한 핵심 증인이기도 한데 훗날 1998년 6월, 그는 이 사건에 관한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의 진상 규명 과정에서 "나 이상열과의 면담은 차라리 No라고 기록해 달라. 입수한 정보를 누설하지도 않고 발설하지도 않는 것은 정보관계자로서의 절대 소임이다."라고 하며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이후 2005년 12월에는 미국에서 김형욱의 가묘가 발견되기도 했다.

외부 링크